소설리스트

〈 74화 〉재회(2) (74/429)



〈 74화 〉재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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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화한 기후와 넓은 평야.


비옥한 베르디 강의 유역을 두고서 수많은 이민족이 패권을 다투고 이합집산을 반복한 끝에 세워진 나라가 바로 오팔 왕국이다.


역사적으로 자주 외적의 침입에 시달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봉건 제도가 자리를 잡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이 가장 강력했던 시절은 정복왕 칼라우 대제에 의해서 중앙집권체제가완성되었을 때였다.

동쪽으로는 라칼 사막, 남쪽으로는 킬바이아르 산맥 전체를 영향력 아래에 두고서 한때는 테르할 제국의 수도인 메테오풀까지 위협한 강대국이지만  영화는 100년도 이어지지 못했다.


현재는 완벽한 지방 호족의군벌 사회로 전락해버린 실태는 다음과 같다.

여섯 왕과 한 명의 대표자가 다스리는 봉건사회연합체.


표면적으로는 메인 가문이라고  수 있는 델링거 왕실이 국가를 지배하고 있지만, 대표라는 상징성만 제외한다면 실제로 보유하고 있는 역량은 지방을 다스리는 여섯 방백과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매년 의례적으로 보내오는 공물을 제외한다면 세금도 걷지 못하는 자치령 독립 국가의 지배자들.


제니아를 다스리는 아슈킬 가문 또한 그런 방백 중에서 하나다.

이들의 작위는 모두가 백작.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팔 왕국에 백작이 여섯 명밖에 없냐고 한다면 당연히 그렇지 않다.

벡워스만 해도 로얄 벨트에 조그마한 장원을 가진 명예 백작들이 있으며, 왕도 로즈풀에는 자기 영지도 없이 델링거 왕실의 녹봉만으로 살아가는 소위 궁정 백작이라는 것들이 널려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작위 하나만으로 귀족의 상하를 구분한다는 것은 어폐가 있으며 실질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어떠한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예를 들면 이 여섯 방백의 소유하고 있는 실권은 왕의 형제라는 이유만으로 하사받는 명예 공작위보다 강력하며,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 또한 변경군사령관인 후작보다 위에 있었다.


물론, 이런 위치에 있는 자들은 기본적으로 왕가에서 벼슬을 하사하여 대리인이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가 하대할 수가 없고, 기본적으로 서로를 존중하면서 격식을 차리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렇다면 백작이라는 틀을 벗어나서 살펴보는 아슈킬 가문이 오팔 왕국에 발휘할  있는 영향력은 얼마나 될까?


현재는 사망한 전임 가주. 알렉세이 폰 아슈킬의 묘비에 새겨져 있는 직함들을 전부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았다.

에이리얼, 마나크로, 에스테링험의 왕세자이자 코민후프, 아얄라누스, 에레팔스, 킬란, 마누, 케테누스령의 통치자, 아라풀, 엘레후, 나인불, 만케아코부르크, 잔스, 눅크의 공작, 테른할, 빙햄, 알리오스의 백작, 마나카, 에어로드풀, 매캐이안 보호령의 보호자이며, 툴링엄 기사단의 단장, 리카 시카, 아케시코의 로닝햄, 샴프, 아카이아를 다스리는 제니아의 방백이 여기에 잠들다.

비록, 지금은 죽어서 평민들이나 다를  없는 한 평의 땅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지만 직함은 이렇게나 길고 휘황찬란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이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냐고 물어본다면 당연히 그것도 아니다.

실제로 통치하는 직할령만을 따로 골라낸다면 절반 이하로 줄어드는데, 이런 많은 직함이 덕지덕지 달라붙는 이유는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결혼동맹이 가장 큰 원인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지참금이라는 것이다.

실제로는 통치하는 영주도 따로, 세금을 걷을 권리도 없지만 그 영지의 소유 권한을 주장할 수 있는 벼슬 감투만 씌워주는 셈.

덕분에 적당히 침략하고 싶은 영지가 생기면 조상의 사돈 중에 누군가가 이 땅을 우리한테 준다고 했다! 라고 외치면서 쳐들어갈 명분이 있는 버킷리스트인 셈이다.


 리스트는 가문의 역사가 길면 길수록 자연스럽게 늘어나게된다.

델링거 왕가의 역사는 약 400년.


하지만 아슈킬 가문은 여섯 방백 중에서도 가장 긴 천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가 중에서도 명가다.


오죽하면 알렉세이의 묘비에 기록하지 않은 자잘한 지참금 리스트를 전부 합치면 오팔 왕국 전체를 소유할 수도 있다고 하겠는가?

그래서 아슈킬 가문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모든 영주는 언제나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바로 오늘.

쏟아지던 폭우가 멈추고 맑게 갠 수평선 너머에서 다가오는 전함을 발견했을 때처럼.

위이이이이이잉!


[구, 국화문양과 직도? 제니아군의 선봉 아스트라세 자작 가문의 깃발이다!!]

[비상! 비상! 전 병력은 지금 당장 전투 준비를…]

[전투 준비는 무슨 개소리야! 팔콘 전사들과 정면으로 싸우는 것은 자살 행위라고! 이제 틀렸어, 살고 싶으면 모두 도망쳐!]


[안 돼! 우리는 벡워스의 5만 시민 시민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다. 휴크 남작님의 이름으로  영토에 발을 들이는 적들을…으아아악! 진짜로 오잖아? 모두 도망치지 말고 나를 지켜! 나를지키란 말이다!]

 천여 명의 병사들이 강가의 요새를 지키고 있었지만 총사령관마저 그렇게 약해빠진 소리를 뱉어내고 있을 정도로 완벽하게 전의를 상실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군이 몰려오는 것도 아닌 한 척의 전선戰船만으로도 이러한 반응.


선수에 있던 루돌프는 기가 찬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허, 참. 그야말로 오합지졸이 따로 없군. 휴크 남작은 그래도 나름대로 기개가 있는 인물이라고 들었는데 말이야. 국경 수비대가 이렇게까지 허접해서야, 쯧쯧쯧.”


“우리 가문의 위상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뜻이니까 실망하실 것은 아니잖습니까? 아버님. 실제로 영지전이 일어난다면 벡워스 같은 작은 도시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방어가 용이한 아일즈 요새로 도망쳐서 결사 항전을 준비할테죠. 그래봤자 사흘도 버티기 어려울 테지만 말입니다.”


“아니, 하루다.”

한 여성이 그 말을 단칼에 잘라내면서 끼어들었다.


“한심한 소리를 지껄이지 마라, 랜달. 제니아의 선봉 아스트라세 가문의 후계자라는녀석이 그렇게 한심한 소리를 지껄이다니 수치를 알아라. 전쟁은 속도전이야. 겨우 이따위 녀석들에게 사흘이나 허비하겠다니, 싸우다가 낮잠이라도 자겠다는 소리냐?”

“죄, 죄송합니다. 이리나 누님.”

사나운 일갈에 단숨에 주눅이 들어버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하하하하! 여전히 장부로구나! 그렇지, 그래. 사흘은 길어. 전쟁은 기세 싸움이야! 적들이 제대로 대비할 태세를 갖추기 전에 단숨에 콧대를 꺾어버린다면 어떠한 전투도 반나절 이상은 필요가 없다. 후-. 만약에 네가 래리님의 호위역할을 자처하지만 않았더라면 안심하고 후계자 자리는 물려줬을 텐데 말이다.”

루돌프가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그녀는 손사래를 쳤다.

“농담이 과하십니다. 아버님. 저는 의무를 저버리고 도망쳐 나온 탈영병에 불과합니다. 사실은 이렇게 동행하는 것만으로도 가문에 누를 끼치는 것인데…”

“글쎄다? 그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아직 위쪽에서 어떠한 징계와 처벌도 내려오고 있지 않느냐. 게다가 너에게 죄가 있다면 우리 부자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리한 도련님께서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제니아를 박차고 나와버렸으니까 말이다.”


“아버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누님. 아슈킬 가문의 정당한 후계자님께서 살아계신다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가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지요. 게다가, 리한 도련님이 우리 가문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아들이 거들어주자 그는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그래, 그렇지. 공적으로는 주군이자, 은인이시고 사적으로는 너희들과 함께 동문수학하며 형제자매처럼 친하게 지냈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장차 사위가 될지도 모르니까  집안이나 다름이…”


“사, 사위라니 무슨 소리십니까? 저는 딱히 도련님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습니다!!”

“으응?? 나는 딱히 너를 지목한 적이 없는데?? 네가 아직 모르나 본데 우리 집안의 작은 공주님이신 코제트도 도련님을 사모하고 있다는 말이지.”

“놀리지 마십시오. 코제트는 이제 겨우 13살인데…”


“13살이라도 알 거는 전부 압니다, 누님. 우리 동생이 도련님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아십니까? 가끔 방문하실 때마다 작은 새끼오리처럼 졸졸 따라다녔는데.”

“랜달! 너까지 그런 소리를…”

“후후후후. 만년설원의 빙면설화라느니, 혼기가  차도록 주변 사내들에게는 눈길 한 번도 주지 않으면서 그따위 별명이나 주워들었으니 말이야. 그래도이렇게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이라도 붉히는 상대가 있으니까 참으로 다행이다. 크흠, 아무리 하늘 같은 주인어른이 사위 후보라고 해도 딸을 위해서라면 힘을 조금써봐야지.”

“훌륭한 마음가짐이십니다, 아버님. 소자도 매형을 위해서라면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그, 그러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정말로 몇 번을 말해야. 으으으윽. 그, 그만 좀 놀리십시오!!”


“어이쿠! 저 녀석들 이제는 눈에 보이는 것도 없이 줄행을 치는군. 쯧쯧쯧. 저러다가 부상당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겠어. 랜달! 마법사들에게 지금 당장 요새에 메시지를 보내라고 말해라. 적대 의사는 없으니까 안심하라고 말이야. 평화롭게 짧은 볼일을 마치고 돌아갈 테니까 서로가 오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서 양보하자고 말이야. 응? 신사답게.”

“네, 알겠습니다!”

새빨개진 이리나가 정색하면서 화를 내기 시작하자 부자는 재빠르게 화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잠시 후, 메시지를 보내자 마치 종말이 도래하는 것처럼 혼란에 빠져있었던 요새에서는 환호성이 쏟아져 나왔다.

[적대 의사가 없데! 모두 살았어, 살았다고!!]


[흑흑흑흑.꿀보직이라고 생각했는데 십 년 감수했네. 더러워서 병사 따위 때려치울거야. 고향으로 돌아가서 농사나 지어야지…]


[난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이웃집 여자아이에게 고백할 거야.]

[이 새끼들이 재수 없게!]

불길한 플래그를 세워버리는 부하들에게 정색하면서 화를 내는 지휘관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루돌프가 꺼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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