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문샤인 로즈(4)
“오라버니.”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는지 이를 악물며 말하자 나디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손을 붙잡아 왔다.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어쨌든 저희 남매가 숨기고 있었던 비밀은 이게 전부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군.”
“어떻게 하다니 무슨 뜻이냐?”
“더러운 수인이 감히 주제도 모르고 인간의 행세를 하고 있었습니다. 국법을 어긴 대역죄인들이 눈앞에 있는데 귀족의 대표로서 엄하게 처벌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이 물음에 리한은 담담하게 대답을 했다.
“딱히 그럴 생각은 없으니까 안심해라. 나는 그저 너희들이 감추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알고 싶었을 뿐이야. B+급의 무장이라면 종족에 상관없이 그만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야지.”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은 가이슨을 처벌하셨던 것과도 관련이 있으십니까?”
“오라버니!”
“…”
나디아가 깜짝 놀라서 외쳤지만 아토스는 멈추지 않았다.
“저도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녀석이 종말의 마수를 살해하는 과정을 쓸데없이 자랑스럽게 떠들어 대었을 때 말입니다. 주군이 보여주신 반응은 명백하게 언짢다는 수준을 넘어서고있었습니다. 마치, 가족을 살해했다는 이야기를 범인에게 듣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주군께서는 저와 여동생을 가족으로 받아들여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서로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셨죠. 기억하고 계십니까?”
“물론이지. 설마, 내가 한 말을 잊어버렸을 것 같으냐?”
“주군께서는…혹시 인간이 아니신 겁니까?”
“단도직입적이군.”
리한은 그렇게 말하면서 잠시 뜸을 들였다.
“만약에 내 정체가 인간이 아니라면 어쩔 셈이지? 예들 들면, 그래. 실재로는 인간으로 둔갑한 종말의 마수였다면 말이야.”
“저도 어처구니없는 억측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군께서는 신분이 확실한 대귀족 가문의 후계자님이시고 감정안으로 살펴봐도 인간이라는 것이 명백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만…”
“나는 너의 판단 기준을 물어본 게 아니다. 만약에 내 정체가 후계자도 인간도 아닌 혐오스러운괴물에 불과하다면 네가 어찌할 것이냐를 묻는 것이다.”
이 말에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그가 결심을 굳힌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만약에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 검은 이미 주군에게 바쳐졌습니다. 온 세상을 적으로 돌리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함께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제 동생은 부디 그 업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놓아주십시오. 주군과 함께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은 저 하나만으로 부탁드립니다.”
“오라버니!”
“눈물 나는 남매애로군.”
서로가 서로를 끔찍하게 아끼는 모습에 리한은 절반의 비아냥과 진심이 뒤섞인 말을 뱉어내었다.
솔직하게 토로하자면 그 또한 앞으로 어떤 가시밭길이 펼쳐질지도 모르는 미래에 불쌍한 처지에 있는 두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이 잔인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원을 이끌어가야 하는 지도자로서 독하게 마음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해줄지도 모르는 사람에게도 거짓말을 뱉어내었다.
거기에 적당한 진실을 섞어서.
“3년 전에 테세트 평야에서 내 목숨을 구해준 자가 종말의 마수였다.”
“!!”
“단전이 파괴되어서 꼼짝없이 죽을 운명을 바꿔주었다. 그리고 마나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의 새로운 힘을 선물해 주었지. 네 여동생을 구하고, 가이슨을 죽인 것 또한 그것의 도움을 빌린 결과물이다.”
“어, 어째서 그렇게 강력한 힘을 원수나 다름없는 주군에게…”
“글쎄? 특별하게 대화를 나누었던 것은 아니니까 내가 그 속을 알 리가 없지 않느냐?”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이야말로 내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본 모습은 세간에서 떠들어대는 것처럼 감정도, 사고도 없는 파괴와 살육을 즐기는 괴물들이 아니었어. 오히려 나를 배신하고 뒤통수를 때렸던 추악한 인간들과 비교하면 천사처럼 느껴질 정도였지.”
“…”
“어째서 입을 다물어버리는 거지. 아토스?”
“아, 아닙니다. 이것도 역시 조금은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주군이 하시는 말씀이니까 틀림없으실 테죠.”
“흥! 내가 인간이 아닐 거라는 황당무계한 소리보다는 훨씬 더 제대로 된 이야기가 아니냐?”
“백번 옳으신 말씀입니다. 하하하하. 저도 참, 도대체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해버렸던 것인지…”
아토스는 멋쩍은 웃음을 토해내면서 그렇게 대답했지만 리한은 그 속에서 아쉬워하는 기색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틀림없이 그것은 기대감이었을 것이다.
충성을 바친 대상이 인간이 아니라, 자신과 똑같은 처지를 가지고 있는 이종족일지도 모른다는 설레임.
전 세계 대부분의 이종족이 인간의 노예로 전락해서 지배당하고 있는 실정이었기에 함께 의기투합한다면, 아무리 어렵고 지난한 길이라고 해도 뭔가를 이루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리한은 그것을 일부러 외면해 버렸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이제는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본론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변환 시술에 관한 이야기예요.”
지금까지 얌전하게 듣고만 있었던 나디아가 입을 열었다.
“지금 제 모습이 어떻게 보이시나요? 오라버니.”
“당연히 우주에서 최고로 사랑스럽, 커헉!”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팔꿈치가 명치를 강타해 버렸다.
“장난하지 말고 진지하게 들어주세요! 우리 수인족 전체의 운명을 좌우할지도 모르는 중요한 일이라고요. 저는 조금 전에 후계자님이 보시는 앞에서 모든 야생을 개방했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부작용 없이, 아니 인간의 신체로 짊어지는 리스크가 거의 없는 상태로 흑호족의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그, 그게 정말이냐?”
“후계자님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시체 수집가처럼 열에 하나밖에 성공하지 못했고 부작용투성이였던 시술이 아니란 말이예요.”
꿀꺽.
아토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침을 삼켰다.
“그와 맺은 계약이 뭐였지?”
“우리 부족 전체가 그를 위해서 10년 동안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터에 나가서 싸웠습니다. 그 대가로 영원한 자유를 약속했고, 격리구역 바깥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인간의 모습으로 바꾸어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거짓말이었던 모양이군.”
“어리석었다는 것은 저도 통감하고 있습니다.하지만 제 모습을 봐주십시오. 이렇게 훌륭한 성공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다들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터무니없이 낮은 성공률 속에서 일어난 기적이었다는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게다가 그자는 간악하게도 마법사에게 절대 준수의 억제력을 가지고 있는 마나의 맹세까지 했습니다. 이런 약속을 어떻게 의심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호오. 마나의 맹세라니 상당히 세게 나왔군.”
최소한 6서클 이상의 마법사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고위 마법인 데다가, 약속을 깨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마나를 잃어버리는 서약이었기에 신뢰를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네. 하지만 약속 전체가 실제로는 교묘한 말장난에 불과했습니다. 맹세한 대로 변환 시술을 제공해주기는 하지만 성공할지 말지는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식이었죠. 덕분에 저희 부모님과 형제, 친구들이 모두 그자의 시술을 빙자한 실험에 희생양으로 전락했습니다. 나디아가 마혈병을 걸린 것도 그때의 일이었죠.”
“그래서 그토록 귀족을 믿지 못하고 증오했었던 것이군.”
“부디 오해하지는 말아주십시오. 처음에는 저도 다른 귀족들은 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이 거기에서 거기였습니다. 사기를 친다는 자각도 없이 천한 것들하고의 약속은 똥간의 뭐로 생각하더군요. 그런 일에 대이다 못해서 아주 질려버렸습니다. 물로, 주군이시야 특별한 경우이기는 합니다만…”
“그렇다면 복수를 해야겠구나. 아토스.”
“주군?”
예상하지 못한 리한의 말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중한 가족과 형제, 친구들이 살해당했다면 당연히 원수를 갚아야지. 미안하지만 나는 패배자는 키우지 않아. 미친개가 너를 물어뜯었다면 최소한 똑같이 살점을 뜯어내거라.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나는 너를 가신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하, 하지만 상대는…”
파지지지지직!
리한의 몸에서 가이슨을 죽일 때 편린을 보였던 힘이 다시 한번 움직여지는 것을 감정안으로 목격한 아토스가 깜짝 놀라서 방어태세를 갖췄다.
“너에게 위해를 끼치려는 생각은 없으니까 금강투합체를 해제해라.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냐?”
“오라버니.”
“아, 알겠습니다. 주군.”
나디아까지 나서서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얼른 힘을 풀었다.
“조금은 아플 거야.”
“네? 그것이 무슨…으갸갸갸갸갸갸갹!!!”
마치 감전당해서 발광하는 것처럼 요란하게 떨리며 진동을 일으키던 그는 시술이 끝나기 무섭게 바닥에 쓰러져 헐떡거리면서 땀을 비 오듯이 쏟아내었다.
“허억! 허억! 허억! 허억! 허억!”
“오, 오라버니?! 괜찮으세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고통스러워 보이는 모습에 깜짝 놀란 그녀가 다가가서 안부를 물었다.
“그, 그래.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아니? 오히려상태가 아주 좋구나. 정말로 인간 모습으로 야생을 모두 해방했을 때와 비슷하게 흘러넘치고 있어. 네가 했던 말이 정말이었구나. 나디아.”
“하지만 소녀에게 해주셨을 때는 이렇게 고통스럽지 않았는데…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후계자님.”
“굳이 말하면 속성 치료의 부작용이지. 너한테는 이틀 동안에 차분하게 밑바닥을 닦아놓았으니까 말이야. 그래도 아토스라면 이 정도 고통은 충분히 참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재로도 그렇지 않느냐?”
리한은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속마음은 삼켜버렸다.
‘남자의 몸을 구석구석 오래 만지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말이지.’
하지만 이런 생각을 조금도 모르는 아토스는 감격한 표정으로 엎드리면서 외쳤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주군! 여동생의 병을 치료해주신 것만으로도 평생을 갚을 수 없을 텐데, 평생을 짊어지고 살아가던 멍에에서까지 이렇게 해방해 주시다니…이렇게 커다란 은혜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감사 인사는 필요없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것은 테스트야. 내가 너의 힘을 완전하게 해방해주었으니 절치부심하여 과거의 은원을 확실하게 청산하도록 해라. 기회가 되면 시체 수집가의 목을 네 손으로 가지고 돌아와야 할 것이야!”
“며, 명심하겠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명령이었지만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그렇게 외치면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래. 어떻게 해서라도 나에게 보답하고 싶다면 하나를 허락해줬으면 좋겠군.”
“허락이니 당치도 않으십니다. 무엇이든지 하명해주십시오! 주군!”
“그렇다면야…”
리한은 그렇게 대답하고서 나디아에게 다가가서 그녀를 와락하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꺅?!”
“주, 주군?!!”
“여동생을 저에게 주십시오.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