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bad joke(2)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서 식당에 도착한 그는 연회장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수많은 테이블에 성대한 만찬이 차려져 있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얼마를 쓴 거지?’
“어서 오십시오. 주군! 주군을 위해서 약소하게나마 마련했습니다.”
아토스가 무릎을 꿇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래. 일단 마음 씀씀이는 고맙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평범한 가정식으로 준비해라. 오늘은 여동생의 쾌유를 축하하는 자리기도 하니까 넘어가겠지만 쓸데없는 낭비는 좋지 않아.”
“아, 네! 명심하겠습니다. 주군! 다음부터는 절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음식이 너무 많아. 이래서야 대부분이 버려지겠군.’
리한은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 무의미하게 소비되어버린 것을 보고 눈산을 찌푸렸지만, 곧 인간답지 못한 태도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흔들어서 다시 자신의 역할로 돌아왔다.
오리나와 함께 주빈석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나디아와 눈이 마주치자 다소곳이 인사를 해왔다.
“정식으로 처음 인사드립니다. 후계자님. 나디아 티거라고 합니다. 불초한 제 병을 고쳐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저희 남매가 갚을 수 없는 커다란 은혜를 입었습니다.”
“정중한 인사 고맙군. 내 이름은 리한 폰 아슈킬이다. 그런데 쟁반에 들고 있는 음식은 무엇이지?”
“식전에 드실 수 있게 연어 카나페를 준비해봤습니다.”
“네가 직접 만든 것이냐?”
“네. 부족한 솜씨지만 실례가 되지 않으신다면 맛을 봐주실 수 있겠는지요? 소녀를 지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상당히 돌려 말하는 권유에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이렇게까지 요청해버리면 거절할 수가 없지 않느냐? 그러면 이것은 치료비 대신에 받는 것으로 하지.”
“네? 가, 가당치 않으십니다! 겨우 이 정도 대접으로 어찌 소녀를 구해주신 은혜와 치환할 수 있겠…”
당황한 그녀가 어찌할 바를 모르며 대답하자 리한이 손을 들어서 중간에 멈추게 했다.
“아니. 너에게 받는 보수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물론, 네 목숨을 구해준 대가가 그렇게 가볍다는 뜻은 아니야. 하지만 대가는 아토스의 충성으로 보답받기로 했다. 이미 공정한 거래가 이루어졌으니 쓸데없는 부채의식을 느낄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말씀하시는 바는 알겠습니다만 그래서야 소녀의 마음이 편치가 못하여…”
“그거야 네 사정이고.”
“네??”
예상하지 못한 퉁명스러운 대답에 놀라서 눈이휘둥그레졌다.
“조금 전에 스스로 말하지 않았느냐? 네가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해서 보답하는 거라고 말이야. 하지만 그런 제멋대로의 사정에 나를 휘둘리게 하지 마라. 내 입장에서는 쓸데없이 성가실 뿐이야. 아니면 뭐지? 설마 내가 생명을 구해줬다는 핑계로 너희 남매에게 불편하고 신경 쓰이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냐?”
“!!”
이 말에 깜짝 놀란 그녀가 재빠르게 쟁반을 내려놓으면서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말씀하시는 것이 백번 지당하십니다. 실례되는 처신을 사과드립니다. 후계자님.”
‘한 번에 알아듣다니 상당히 이해력이 빠르군.’
“좋아. 그리고 이 카나페는 흠잡을 구석이 없이 훌륭하구나. 와인과 함께 마시면 아주 잘 어울리겠어. 네 성의에 감사를 표하지.나디아 티거.”
“마음에 드셨다면영광입니다. 그, 그러면 소녀는 이만…”
“잠시 기다려라.”
어째서인지 얼굴이 불그스름해진 그녀가 허둥지둥 자리를 떠나려고 했지만 리한이 멈춰 세우고 가까이 다가가서 귓속말을 했다.
[너무 그렇게 본성을 감출 필요는 없어. 너와 네 오라버니는 사정이 다르지 않느냐? 그렇게 억누르고 살았다가는 신체를 망쳐버릴 것이다.]
“네?! 지, 지금 무슨 말씀을…”
“응? 내가 뭐라고 했느냐?”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처럼 능청스럽게 굴자 잠시 당황하는 나디아였지만 금방 언제 그랬냐는 듯이 태연한 모습을 되찾아서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마도 환청을 들었던 모양이군요. 실례하겠습니다. 후계자님!”
그렇게 대답하고 여성 용병진이 차지하고 있는 테이블로 자리를옮겨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신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앙?”
호쾌하게 만화육을 뜯어먹고 있던 브리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솔직히 첫눈에 반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초대면에 이렇게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분은 처음이네요.”
“흐흐흐흐.”
이 말에 들썩거리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아토스가 이 사실을 알면 울어버리겠는데?”
“아마도 생각하시는 것과는 전혀 다를 테지만 그래도 제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오라버니에게는 비밀로 해주세요.”
“알았어, 알았어. 낄낄낄낄.”
수줍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즐거워하며 웃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반응하고는 별개로주빈석에 앉아있는 리한을 바라보는 나디아의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틀림없이 처음 보는 사람인데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아. 설마, 우리의 과거를 알고 있는 걸까? 아니야. 절대로 그럴 리 없어. 하지만…하아. 차라리 좋은 사람이었다면 오라버니를 맡기고 자유롭게 떠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하는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났지만 옆자리에 앉아있는 클레어 또한 어째서인지 그녀와 비슷한 표정으로 같은 대상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즐거운 연회 시간에 왜 그렇게 죽상들이야? 먹고 마시자고! 오늘을 즐겨야 내일을 손해 보지 않으며 살아가는 거라니까? ”
짝!
“꺅? 아니! 말로 해도 되는 것을 왜꼭 이런 식으로 전달하려고 해요??”
등짝을 얻어맞고 화들짝 놀란 클레어가 볼멘소리를 해왔다.
“아직도 마혈병을 치료하는 방법이 궁금해서 그러는 거야? 정 못 참겠으면 우물쭈물하지 말고 직접 가서 물어보라고.”
“에휴. 자신이 믿는 측근 말고는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비밀스러운 치료법이잖아요. 도대체 어떻게 해야 가르쳐주실지 상상이 가지를 않는다고요!”
“그러면 최후의 수단을 사용해야지!”
“최후의 수단이라고요?”
이 물음에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인 브리카가 기습적으로 등뒤로 다가가더니 그녀의 가슴을 덥석 움켜잡았다.
“꺅?! 지, 지금 도대체 뭐하시는 거예요?”
“후후후후. 남자를 쓰러트리려면 과감하게 나가보라는 말이야! 오오오? 밋밋한 사제복에 가려져서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의외로 글레머잖아? 이렇게 되어버린 김에 답답한 사제모까지 벗어버리자고!”
“하윽?! 이거 놓지 못하겠어요? 이런 변태 용병이!”
“으와아아앗! 브, 브리카님! 진정해주세요. 남성분들이 보고 있는데 꺅?! 서, 설마 그런 짓까지…”
“야! 동생 앞에서 무슨 파렴치한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리한을 접대하고 있던 아토스가 깜짝 놀라서 일어서며 외쳤다.
“상당히 시끌벅적하군.”
“죄, 죄송합니다. 주군! 지금 당장 멈추고 오겠습니다.”
“아니. 그냥 내버려 둬라. 기왕에 축하하는 자리인데 괜히 끼어들어서 분위기를 망칠 필요는 없지 않느냐. 그리고 너도 여동생이 저렇게 활기차게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게 오랜만일 테지. 내 말이 틀렸느냐?”
“여부가 있겠습니까? 정말로 주군이 아니었다면 저희 남매가 어떻게 되어버렸을지 상상만으로도 아찔합니다.”
“그런데 동생의 병은 언제 걸렸나?”
“네?”
예상하지 못한 물음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물어보면 안 되는 질문이었느냐?”
“아, 아닙니다. 거의 6년쯤 되었습니다.”
“6년이라니 놀라운 일이군. 평범한 사람이라면 6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숨이 끊어져 버렸을 텐데 말이야. 오전에 진찰했을 때도 보통 심각한 상태가 아니었는데 몽롱한 상태에서도 산책을 나와서 말대답까지 할 수가 있는 수준이었지. 감탄을 금할 수 없는 놀라운 생명력과 정신력이 아니냐? 마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말이야.”
움찔!
기습 공격에 상당히 동요하는 눈치였지만 동생과 마찬가지로 금방 표정을 수습하면서 얼버무리려고 했다.
“하하하하. 자, 자랑은 아닙니다만 동생의 의지가 워낙에 굳세서 말입니다. 그래도 오래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흡마석으로 꾸준하게 연명치료를 했기 때문입니다. 옛말에도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정신이 육체를 초월한다고요. 역시 뭐니 뭐니 해도 그런 의지가…”
“하아.”
대답을 듣고 있던 리한이 허탈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충성을 다하겠다는 것도 참 선택적인 표현이로군. 하기야 아무리 소중한 가족을 구해준 은인이라고 해도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새빨간 타인을 믿을 수는 없겠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을 정도니까 말이야.”
“윽?! 주, 주군…”
“괜찮아, 괜찮아. 전부 이해한다니까? 사실은 이번 연회도 나보다는 여동생에게 맛있는 것을 먹여주고 싶어서 열었을 테지만 말이야. 마음 같아서는 동생 곁으로 떠나고 싶지? 그래. 가고 싶으면 가라고. 원래 팔은 안으로 굽고, 피는 물보다 진하잖아. 가신은 얼어 죽을 가신이냐.”
“주군?? 저, 절대로 그런 게 아닙니다. 정말로 저는 순수하게 주군을 생각해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습니…”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거냐? 이렇게 작고 사소한 비밀까지 숨겨버리는 매정한 관계인데 말이야. 하다못해 나디아를 내게 시집보내기라도 하던가.”
“사소한 비밀이라니 그럴 리가…아, 아니. 뒤에 말씀하신 것은 대체 무슨 의미십니까? 끄으으윽.”
마치 성가신 애인처럼 투덜거리자 아토스가 어찌할 바를 모르며 당혹스러워했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넘어오겠군.’
하면 안 되는 말까지경솔하게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함락되기 일보 직전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쉬운 타이밍에 간병인 하나가 헐레벌떡 다가오는 바람에 시도가 무산되어버리고 말았다.
소곤소곤소곤.
“뭐야? 그게 사실이냐?”
“네, 그렇습니다. 지금 저택 앞까지 찾아와서 나오라고 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지?”
“별일 아닙니다. 주군. 금방 처리하고 돌아올 테니까 여기에서 만찬을 즐겨주십시오. 잠시 나가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대화 내용을 엿들은 리한은 테이블을 두드려서 그를 멈춰 세웠다.
“자리에 앉아라. 아토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너는 이제 나의 가신이며 모든 대소사가 연결된 운명 공동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까 뒤탈을 만들 수 있는 일을 숨기지 마라. 도와줄 수 있는 내용이라면 상부상조하도록 하지.”
“주군!”
“아, 물론. 너야 감추고 숨기고 싶겠지만 말이야. 흑흑.”
“주군?!”
짓궂은 괴롭힘에 아토스의 목소리가 꼬여져 나왔다.
잠시 후에 그가 이야기한 내용은 그가 엿들은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설마 벡워스의 경비대장이 직접 찾아올 줄이야. 아무래도 용병 길드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꼬리를 밟혀버린 모양이군. 슬럼가에서도 임페리얼 가드들이 예상하지 못한 상황과 마주쳤고. 아무래도 일 처리가 조금 경솔했던 모양이군.’
말이 끝나자 마치 처음 듣는다는 것처럼 연기를 하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너는 이 문제를 어떻게 대처할 생각이었느냐?”
“솔직하게 대답할 생각이었습니다. 어차피 용병 사이에서 일어난 다툼이니까 경비대가 끼어들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역시 단순무식하군.’
독단으로 나서지 못하게 제어한 것이 정답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