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테세우스의 배(1)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엿듣고 있던 줄리아 교단의 사제, 클레어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브리카님!]
자신을 제외한 유일한 여성 용병에게 다가가서 옷소매를 잡아당기는 그녀.
[왜 그래?]
[후계자님께서 마법 오염에 걸린 환자를 치료하겠다고 말씀하신 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글쎄? 무슨 방법이 있으니까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나오시는 거 아니겠어?]
[무슨 방법이라는 게 뭐죠? 저도 일단은 줄리아님을 섬기는 사제에요. 의학에 대한 지식이라면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지만 세상에 마법 오염을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하물며 아토스님의 여동생분께서 앓고 있는 병은…]
[어떤 병이었는데?]
말을 이어가다가 머뭇거리는 그녀를 재촉하자 조심스럽게 선두에 있는 아토스의 눈치를 살피면서 더 조그마하게 귀띔을 했다.
[마혈병이라고 해서 이름 그대로 피가 점점 오염된 마나로 변해가는 병이예요. 혈액자체가 오염원이라서 완전히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유일한 연명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게 흡마석으로 마나를 뽑아내고 새로운 피를 수혈해주는 거예요. ]
[오염된 마나라. 그렇다면 흡마공을 수련한 사람한테 뽑아달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이 말에 클레어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절대로 안 돼요. 그런 짓을 했다가는 흡마공을 시전한 사람까지 오염된 마나를흡수해서 새로운 마법 오염으로 발생하는 병을 얻을 뿐이라고요.]
[흐음. 어렵네, 어려워. 그런데 마법 오염이라는 게 정말로 그렇게 처리하기 어려운 거야? 그 왜. 예전에 나타났던 종말의 마수들은 테세트 황무지를 정화했다고 하잖아.]
[사실은 그게 논란이 많은 지점이거든요. 애초에 정말로 종말의 마수들이 마법 오염을 정화할 수 있는지도 불분명하고요. 백령아의 마탑에서는 연구를 위해서 데피리스 교단의 허락을 받고 사로잡아서 실험하고 있다는데 현재까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고 들었어요.]
이 말에 리한의 고개가 슬그머니 기울어졌다.
‘백령아의 마탑이라고?’
감히 더 원을 사로잡아서실험을 진행하고 있다는 말에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기분이었지만 아직은 우선순위에서 제외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백작의 지위를 차지하고 나면 가장 먼저 조사해야겠군. 반드시 구하러 가겠다. 반드시…’
그렇게 다짐하며 이를 악무는 사이.
일행은 그린벨트 주택가 외곽에 위치하고 있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규모를 가지고 있는 커다란 저택.
“도착했습니다. 주군.”
“와우! 흡마석을 달라고 징징거리시던 것 치고는 생각보다 훨씬 잘살고 계시네. 역시 썩어도 준치라더니 상금 랭킹 1위는 뭔가 달라도 다르시다니까.”
“시끄러워! 이 저택은 의뢰비를 대신해서 잠시 임대하고 있을 뿐이야. 고용하고 있는 사람들도 전부 간병인인데…”
“오올~ 그렇다면 이게 전부 다 여동생을 위해서라는 거네? 요놈, 요거.이제 보니까 뼛속까지 시스콤이었구만? ”
“누, 누가 시스콤이라는 거야!”
정곡을 찔린 아토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잠시 후.
초인종을 울리자 집사로 보이는 늙은 사람이 나타나서 문을 열어주었다.
“아토스 나리? 벌써 돌아오신 겁니까?”
“그래, 호리스. 나디아는 지금 어디에 있지?”
“장미 정원에서 휴식을 취하고 계십니다. 햇볕을 쬐고 싶다고 말씀하셔서…”
“뭐? 방에서 나오게 하지 말라니까 어째서그런 억지를 들어준 거야? 젠장, 서두릅니다. 어서 빨리!”
깜짝 놀란 그는 정문을 억지로 밀다시피 열어젖히고는 따라오는 일행을 재촉했다.
화창한 오후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신록의 정원.
장미 덤불이 얽혀있는 아치를 지나자 간병인들의 시중을 받으면서 분숫가 벤치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여성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디아!”
“…오라버니?”
초점이 없는 공허한 눈동자로 한 박자 느리게 고개를 들어 올리는 여성.
동시에 일행들 사이에서는 다양한 감탄사가 쏟아져 나왔다.
“오옷?!”
“세상에 어쩜…”
“말도 안 돼. 저렇게 단아하고 예쁜 여자아이가 저런 짐승 새끼의 여동생이라고? 이건 사기야, 사기. 도대체 어디에서 납치해온 거지?”
가장 커다란 충격에 휩싸인 브리카가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아토스는 동생의 상태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젠장! 열이 나잖아. 몸도 성치 않은데 바깥바람을 쐬게 하다니 제정신이야? 너희들이 그러고도 간병인이라고 지껄일 수가 있어? 당장 꺼져! 모두 해고야!!”
“나리…”
흥분한 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간병인들이 어찌할 줄 모르며당황했지만 나디아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서 소매를 붙잡고 다독였다.
“아니에요. 오라버니. 제가 간절하게 부탁해서 어쩔 수 없이 어리광을 들어주신 거예요.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따듯한 햇살을 느끼고 싶어서…”
이 말에 아토스가 울컥하며 동생을 껴안았다.
“마지막이라니 무슨 약한 소리야! 내가 반드시 고쳐주겠다고 했지? 주군, 주군!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제발 하나뿐인 저의 동생을 살려주십시오. 만약에 그렇게 해주신다면 이 아토스의 모든 것을 당신에게 바치겠습니다!”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일단은 나와라. 상태부터 먼저 살펴보도록 하지.”
“네, 알겠습니다!”
리한은 가까이 접근해서 진찰을 시작했다.
“…당신은 누구?”
“쉬잇. 조용히 하고 가만히 있어라.”
자신을 제대로 알아보고 있는지조차 불분명한 상태였지만 시키는 대로 얌전하게 따랐다.
‘그나저나 정말로 보기 드문 미인이기는 하군.’
흑발의 롱헤어.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빛나는 암회색의 눈동자와 작고 앙증맞은 분홍색 입술.
한 떨기 가녀린 백합처럼 단아해 보이면서도 병으로 약해져서 어딘가 덧없는 자태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양손을 무릎에 포개며 꼿꼿한 자세를 잃어버리지 않는 몸가짐이 그녀의 기개를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어디에서 납치해오지 않았을까 의심하던 브리카의 말이 이해가 될 정도로 거칠고 자유분방한 아토스와는 정 반대의 모습.
‘혈색이 전혀 보이지 않아. 피부가 하얘도 너무 하얘서 백자 인형하고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군. 진작에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인데…엄청난 생명력이군.’
그렇게 생각하면서 조심스럽게 팔목을 잡아서 맥을 살폈다.
예상대로 거의 움직이지 않는 맥박이 느껴질 뿐이었다.
“어떻습니까? 주군.”
“…오라버니. 이분은…”
“네 병을 고쳐주실 분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주군?”
“조금 아슬아슬한 상태기는 하지만 이 정도라면 손을 써볼 수는 있겠군.”
“그, 그게 정말입니까?!!”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던 아토스가 대번에 반색하며 물었다.
마치 깊고 어두운 동굴 속에 갇혀있다가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발견한 사람처럼 희망에 벅찬 눈동자.
“그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기에서 치료를 시작할 수는 없지. 동생을 데리고 적당한 병실로 안내해라. 오리나! 너만 따라오고 나머지는 응접실에서 대기하도록.”
“네, 주인님!”
하지만 일행이 움직이려는 순간에 클레어가 번쩍 손을 들면서 외쳤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후계자님! 죄송하지만 저도 입회하면 안 되겠습니까?”
“안 된다.”
단칼에 거절했지만 물러서지 않고 재차 물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어떤 치료를 하시더라도 절대로 방해하지 않고 곁에서 도와드리겠습니다. 이래 보여도 저는 단순하게 신성 마법에만 의존하는 게 아니라 기본적이 의료 지식도 가지고 있어서…”
“의료 지식이라고? 하하하하. 그렇다면 너는 마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소리냐?”
“그, 그건 아닙니다만…”
“그렇다면 초보자와 다를 게 없군. 쓸데없이 짐만 늘어날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능력에 대한 문제가 아니야. 어디까지나 비밀을 지킬 수 있느냐는 대한 신뢰의 문제다. 미안하지만 나는 여기에 있는 누구도 믿지 않아. 오직 오리나를 제외하고 말이야.”
“주인님!!”
이 말에 오리나가 기뻐하며 팔짱을 꼈다.
“하, 하지만 저는 당신을 섬기겠다고 맹세했습니다만…”
“네가 따르는 신보다도 말이냐?”
“그건, 그런 질문은 비겁하십니다!”
“비겁하다고?”
리한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돈과 성공을 약속받아서 충성을 맹세한 용병 주제에 대단히 잘난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그래. 그렇게 잘난 윤리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한 번 물어보도록 하지. 만약에 나와 적대하고 있는 세력이 나보다 후한 조건으로 너희들을 매수하려고 하면 너희들은 어쩔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