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지도자의 조건(4)
“외람되오나 주군. 현재 아슈킬 가문을 이끄는 분은 마르텔 대모님도, 사모님도 아닌 주군이십니다. 주군께서 결정하시는 일이라면 저희는 어떤 선택이라도 기꺼이 따를 테지만 마음을굳게 먹으시고 흔들리지 마십시오. 그래야 가신들도 갈팡질팡하지 않고 제니아도 무탈할 것입니다.”
“나도 알아. 나도 안다고!”
래리는 그렇게 외치고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애 엄마가 저렇게 나오는 것을 어떻게 하냐? 정말로 아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떠나면 어떻게 해?”
“주군!”
“하여간에 여러모로 대단한 여자라니까.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 조카와 나는 저렇게까지 독하지 못한데 말이야. 저 무시무시한 권력욕을 봐라. 아주 장부야, 장부. 차라리 저 여자가 후계자로 태어났다면 나도 유유자적 낚시나 하면서 살아갈 텐데.”
“도대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무리 사모님이라도 아슈킬 가문의 혈통을 물려받지 않은 외부인에 불과합니다. 천년 가문의 후계자인 당신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워워. 그냥 해본 말이니까 그렇게 열 내지 마. 하여간에 다들 지나치게 심각하다니까.”
“…끄응.”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해버리는 바람에 버질의 답답한 심정은 커져만 갈 뿐이었다.
결국, 어떤 충고를 하더라도 우유부단한 성격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숨을 쉬면서 대화의 주제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기절해 있는 엑케라곤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흠. 호수로 다시 돌려보낼까? 완전히흥이 깨져버렸는데 다시 힘겨루기하는 것도 의미가 없으니까 말이야. 생각해보니까 쟤도 살아있는 생명체였는데 내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드네. 그래도 다시 낚시하러 오고 싶을지도 모르니까 낚싯바늘은 그대로 두자. 저거 보통 비싼 게 아니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주군.”
고개를 끄덕인 버질은 터벅터벅 걸어가서 강가에 쓰러져 있는 엑케라곤을 호수 속으로 던져 넣었다.
쾅!
뽀글거리는 물거품을 만들어내며 잠겨 들어가는 거대한 동체.
그 광경을 별다른 생각 없이 지켜보던 래리는 갑자기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밝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까 말이야! 아까 우리 마누라가 이리나와 리한 조카가 친하게 지냈다고 했잖아?”
“네, 확실하게 그랬습니다만…”
“역시 그렇지! 나도 그 말을 듣고 나서 떠올렸는데 둘이 동갑이라고 어렸을 적에 굉장히 친하게 지냈었더라는 말이야. 애쉬님의 뒤를 병아리처럼 졸졸 따라다니면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분을 얼마나 당황하게 했는지.”
“죄송합니다만. 주군.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버질이 어정쩡한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이리나를 보내서 조카를 데려오도록 하자는 말이지. 우리 마누라한테 들키지 않게 몰래 어머니를 만나게 해주고…”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주군!”
“깜짝이야! 아니, 왜 갑자기 정색하면서 그래?”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오히려 그렇게 말하자 그는 엉뚱하다고밖에 할 수가 없는 주군의 발언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조금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미 리한 도련님을 처리하겠다고 말씀해놓고 이제는 다시 구하고 싶다니요? 계속 그렇게 이중적으로 행동한다면 주군에게 충성하는 가신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게 될 뿐입니다. 이 일은 절대로 양립할 수가 없는 문제입니다. 죽이느냐, 살리느냐! 부디 하나만 선택해주십시오. 정녕, 당신의 손으로 제니아를 둘로 분열시킬 생각이십니까?”
“그래도 조카가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병석에 누워있는 어머니를 어떻게 보라고…”
“주군!!”
“알아, 안다고. 하지만 정말로 어쩔 수가 없어서 그래. 미안하다. 버질. 하지만 제발 부탁 좀 하자. 응?”
“휴우.”
도저히 답이 없는 모습이었기에 한숨만 무거워졌다.
그래도 주군의 명령이기에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던 버질은 곧바로 나팔관처럼 생긴 통신 마도구를 꺼내서 이리나를 호출했다.
지이이이잉!
잠시 푸른 빛을 내며 진동했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무슨 일이야?”
“몇 번을 시도해봐도 연결이 되지를 않습니다. 아예 이쪽을 무시하고 있거나 마도구를 소유하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인데…서, 설마?”
“왜? 뭔가 깨달은 것이 있는 것이냐?”
짐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떠올린 그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이마에 손을 올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벌써 벡워스로 가고 있는 모양입니다.”
제니아의 분열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
“흡마석이라고?”
“에휴. 어쩐지 버는 돈에 비해서 지나치게 짠돌이라고 생각했더니. 이건 또 터무니없는 물건에 손을 대고 계셨구만.”
아토스의 요구조건을 들은 브리카가 괜스레 대화에 끼면서 혀를 쯧쯧 찼다.
“흡마석이 무엇인가요? 주인님.”
“이름 그대로 마나를 흡수하는 돌이다. 사용처는 다양하지만 주로 밀도가 낮은 마법 오염을처리하기 위해서 쓰이지. 이번에도 그런 용도로 필요한 모양이고. 내 말이 맞느냐? 아토스.”
“…그렇습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게 필요한 거야?”
“네가 상관할 내용이 아니다. 브리카. 어쨌든 소원을 말씀하라고 하셨으니까 저도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상급 흡마석을 최소한 5개. 지금 당장 마련해주실 수 있습니까?”
“와, 씨! 이런 날강도 같은 새끼를 봤나? 상급 흡마석이면 하나에 100만 대륙 은화는 가뿐하게 넘어가는 사치품이잖아. 도대체 양심이 어디로 탈출한 거야?”
“끼어들지 말라고 했지! 이쪽은 이쪽대로 사정이 있어! 게다가 처음부터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주겠다고 하신 것은 내가 아니라 주군이다. 나는 그것을 믿고 어렵게 말씀드린 거야!”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오리나가 조심스럽게 귓속말로 질문을 했다.
[주인님, 주인님! 흡마석이라는 물건이 도대체 무엇인데 저렇게 비싼 건가요?]
[훗. 오리나. 세상만사를 궁금해하는 네 호기심이 귀엽기는 하지만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는 조용히 해라. 아니면 다시 차근차근 메이드의 미덕을 가르쳐 주어야 하겠느냐?]
[죄, 죄송합니다. 주인님. 하지만 가르쳐 주신다는 것은 혹시…아잉♡]
뺨따구를 감싸 안으며 부끄러워했다.
“이보쇼, 좀!”
쿵!
이야기 도중에 염장을 지르고 있자 아토스가 분노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시끄럽다. 이 녀석이고 저 녀석이고 쓸데없이 재잘거리는군.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한입으로 두말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텐데?”
꿀꺽!
“그, 그렇다면 혹시 정말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미안하지만 네가 요구하는 상급 흡마석은 지금 당장 구할 수 없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젠장, 역시 귀족 따위는 믿는 게 아니었는데…”
“닥쳐라!”
리한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갈했다.
“내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오히려 네놈이 아니냐! 원하는 것이 있다면 솔직하게 이야기하라고 했을 텐데? 마법 오염을 제거하기 위해서 상급 흡마석이 5개나 필요하시다? 하! 그렇게 심각한 오염 상태라면 흡마석이 천 개가 있더라도 임시방편에 불과할 뿐이다. 환자가 누구냐? 가족이 아픈 것이냐, 연인이 아픈 것이냐?”
“그, 그걸 어떻게…”
“지금까지 네가 하고 있는 얼빠진 행동을 보고 있으면 누구라도알아차렸을 것이다. 똑바로 말해라. 누구의 생명이 마법 오염으로 위태로운 것이냐!”
“여동생입니다.”
박력에 압도당해서 이실직고를 하자 리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장 환자가 있는 장소로 안내를 해라. 상태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그만한 흡마석이 필요하다면 그야말로 분초를 다투는 위중한 상태가 아니냐. 어서 앞장서러 길을 안내해라!”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주군! 설마 그 말씀은 지금…”
리한은 가볍게 혀를 차면서 자신의 머리를 쓸어올렸다.
“나는 일구이언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텐데?”
쿵!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토스가 바닥에 엎드리면서 머리를 찧었다.
“정말로, 정말로 치료해주실 수 있다면 진심으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주군! 제발 하나뿐인 불쌍한 저의 여동생을 구해주십시오! 만약에 그렇게 해주신다면 제니아 전체와 맞서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당신을 따르며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충성맹세를 하려면 치료가 끝나고 해라. 이렇게 쓸데없이 시간을 끌다가 환자가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아무리 나라도 손쓸 방법이 없지 않느냐? 어서 일어나서 안내나 해라.”
“네, 물론입니다. 주군!”
동생의 병을 고쳐주겠다는 말에 태도가 180도 바뀐 그는 헐레벌떡 일어서서 앞장을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