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선언(5)
투두두두둑!
중력에 사로잡힌건물의 잔해와 시체의 비가 바닥으로 쏟아져내렸다.
“허억, 허억, 허억, 허억, 허억, 젠장!”
모든 내공을 쥐어짠 무투기 사용으로 일어설 힘조차 남지 않은 아토스가 롱소드에 기대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치 자연재해가 휩쓸고 간 것 같은 광경.
하지만 그런 난리 속에서도 잔해를 털어내며 일어서는 사람들이 있었다.
거기에 당연하다는 듯이 포함되어 있는 리한.
그것도 옷에 먼지 하나 묻히지 않는 멀쩡한 모습이었다.
“큭! 정말로 허풍이 아니었다는 건가…”
보아하니 라운드 테이블을 마법으로 강화해서 방패처럼 자신과 주변을 감싼 모양이었지만, 어떻게 충격파를 완전히 막아낼 수 있었는지는 감조차 오지 않았다.
B급 무장을 쓰러트리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을 했던 자신의 감정안이 이렇게까지 무력하다는사실에 절망감이 몰려왔지만, 동시에 자신이 우물 속에 개구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그가 자신의 소원을 이뤄줄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흠. 아무래도 이게 마지막 발악이었던 모양이군.”
오리나에게 받은 모자를 가볍게 툭툭 털어내 그가 아토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동시에 사방에서 몰려드는 용병들.
“마지막으로 할 말은 남아있느냐?”
“아, 알겠습니다! 까짓거 당신하고 계약을 맺으면 되는 게 아니오? 일단은 진정하고…”
“아직 혼이 덜 난 모양이군.”
그가 손짓하자 용병들이 우두둑거리면서 몸을 풀었다.
“잠깐! 추,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부하가 되라고 하셨죠? 그렇게 하겠습니다. 주군이라고 부르면 되는 겁니까?”
“궁지를 벗어나려고 뱉어내는 말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나는 약속대로 네놈의소원을 들어주고 그것에 대한 정직한 충성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마지막 제안이다. 나와 계약을 하겠느냐?”
“…진심이십니까?”
“내가 이런 상황에서까지 거짓말을 할것 같으냐?”
그의 말이 백번 옳았다.
아토스는 지금까지 보여주고 있던 불성실한 태도를 완전히 바꿔서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만약에 정말로 제 소원을 들어주신다면 영원히 변하지 않을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리한은 그렇게 대답하고 주변에 있는 용병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아토스와 브리카, 가이슨, 브롱크. 그리고 클레어와 반다크라는 영감까지. 아니, 얼떨결에 구해버린 캐논까지 전부 7명인가? 이 정도면구색은 갖췄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혼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캐논은 잔해만 남은 길드 앞에서 절규했다.
“으아아아악! 20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의 벡워스 용병 길드가 통째로 날아가 버렸어! 길드장님이 돌아오시면 뭐라고 해야 하는 거지? 이걸 도대체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 거냐고!!”
척!
그런 그에게 다가간 브리카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
“예로부터 이렇게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는 36계 줄행랑을 치라는 명언이 있지.”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무책임한…”
“잘 안 풀리더라도 그건 너의 탓이 아니다!잘 안 풀리는 건 세상이 잘못된 거다! 안 좋은 일로부턴 도망쳐도 좋다! 도망치는 것은 지는 게 아니다. 도망치면 이긴다는 말이 있지 아니한가!”
“!!”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열변에 그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고민 끝에 나온 답은 어느 것을 골라도 후회하는 것. 어차피 후회할 바에야 지금 편한 것을 고르거라!”
“도망치면 이긴다고…그, 그런가? 그렇게 하면 이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었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
세차게 흔들리는 눈동자와 공허한 웃음소리는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해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캐논의 귓가로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포기하면 편해.”
“!!”
그렇게 완벽하게전도 당해서 악에 물들어버리는 모습을 뒤로하고 리한은 무릎을 꿇은 아토스에게 손을 내밀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주군.”
하지만 손을 잡기 직전에 모양을 바꿔버리더니 검지를 세워서 좌우로 까딱거리며 흔들어 보였다.
“??”
“자네와 계약한다고 하기는 했지만 아직 다른 용병들의 고용 조건이 충족되지를 않아서 말이야.”
멈칫.
이 말에 화기애애하게 마무리되어 가는 것 같았던 장내의 분위기가 갑작스럽게 얼어붙었다.
“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한 번 약속한 일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지켜내지. 자네의 고용 조건은 충족했지만 다른 용병들은 아직 그것을 충족하지 못하지 않았나? 그들에게도 기회를 줘야 공평하지.”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그게…하, 하필이면 지금이어야 합니까?”
툭툭
이해한다는 듯이 어깨를 두드렸다.
“건투를 빌지.”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주군, 주구우우우운!!!”
크르르르르.
그가 자리를 비켜주기가 무섭게 사나운 짐승처럼 낮은 울음소리를 터트리며 접근해오는 용병들.
[내 목을 가져가겠다고 말한 저 건방진 용병을 때려눕히는 녀석부터 먼저 고용해주겠다.]
저벅저벅
쿵! 쿵!
우드득! 우드득!
완전히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것처럼 각자의 무기를 들어 올리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속에 슬그머니 끼어드는 종업원.
“캐논. 너마저?!”
“죄송합니다. 아토스님. 하지만 저는 이제 돌아갈 장소가 없다고요? 요즘 세상에 재취직을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줄 아세요? 그것도 길드 하나를 통째로 말아먹은 직원을 말이에요. 이게 전부 당신 때문이야. 헤헤헤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저도 이런 때를 대비해서 암독술을 연마해 두었거든요.”
“암독술이라니 사람 죽이는 기술이잖아!”
쿠그그그그긍! 쿠그그그긍! 부아아아아아앙!!
그렇게 절규하고 있을 때 어딘가에서 요란하게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참마도에 감겨있는 체인이 맹렬하게 회전하는 모습.
슬그머니 근처에 있는 바위에 가져다 대자 불꽃이 튀어 오르면서 매끄럽게 잘려나갔다.
“야, 임마. 브리카! 이건 그냥 때려눕히기만 하면 되는 미션이잖아! 왜 갑자기 절단 모드로 들어가 버리는 건데?”
“하하하하. 그러고 보니까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도 얼추10년이 되어가네. 생각해보니까 오랜 교제였어. 너를 잊지 않을게. 아토스.”
“아직 살아있는데 죽을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 줄래?!”
“걱정하지 마세요. 아토스님. 일격에 주님 곁으로 보내드릴게요. 홀리 웨폰!”
“야!!”
“회춘! 회춘! 우오오오오오오! 불타라 청춘이여!!”
“무념.”
“…”
저마다의 광기를 드러내면서 다가오는 그림자들에게 둘러싸인 아토스의 처절한 비명이 아스라이 길게 길게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아!! 이 망할 새끼들아. 너희 전부 다 싫어어어어어어어!!!”
****
야심한 시각.
“으아아아아악!!”
형언할 수 없는 악몽에 시달리던 돌로레스가 비명을 지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생생한 체험이었는지 입고 있는 투명한 레이스와 이불까지 흥건하게 젖어버린 상태엿다.
“하아. 하아.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뱉어내면서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고 있자 그녀의 이변을 깨달은 하인들이 처소에 불을 밝혔다.
동시에 자연스럽게 침대 위로 올라오는 두 명의 여성.
“아티. 괜찮으십니까? 마님.”
“카티. 여기에 시원한 물을 가지고 왔어요.”
특이하게도 서로의 이름을 호명하는 쌍둥이 자매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몸을 더듬으면서 안겨들어 왔다.
연한 갈색의 피부와 조그마한 체구.
은발 적안의 요정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들의 이마에는 작고 뾰족한 빨간색의 뿔이 있었고엉치뼈에서 뻗어져 나온 검고 긴 꼬리도 달려 있었다.
“고맙구나. 아티, 카티.”
“아티. 황송합니다.”
“카티. 주인님을 위해서라면 당연한 일인걸요.”
“후후후. 귀엽고 사랑스러운 녀석들 같으니라고…”
돌로레스는 입맛을 다시며 아티의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을 만지작거렸다.
“하읏?”
“아흑. 주, 주인님…”
한 명을 희롱하고 있는데도 마치 서로의 감각을 공유하는 것처럼 열락에 들뜬 신음을 뱉어내는 자매들.
‘후후후후. 아랫것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나 다름이 없는 악마들을 성노예로 부릴 수 있는 것이야말로 귀족이 가진 특권이지.’
그녀들의 목에는 대상의 모든 자유와 권리를 박탈하는 강력한 마법진이 새겨져 있는 구속구가 채워져 있었다.
덕분에 원래대로라면 성교 대상을 에너지 드레인으로 말려 죽이는 서큐버스조차귀엽고 사랑스러운 애완동물에 불과할 뿐.
자매의 귀여운 반응에 음욕이 끌어 오른 그녀가 속옷을 벗어 던지려고 했지만,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인상을 쓰면서 거사를 미룰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