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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화 〉선언(1) (35/429)



〈 35화 〉선언(1)

“네…”

특별하게 신을 믿고 있지는 않았던 그녀는 별로 공감하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무튼, 내가 물어보고 싶었던 것은 이게 전부였소. 부군의 시체는 공동안치소에 있으니 수습하려면 그곳을 찾아가시오. 그리고…흠. 원래대로라면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했소만 안주인께서는 옐로우 벨트에서 태어난 평민 출신이시오?”


이미 가족관계까지 조사하고 왔는지 세세한 부분까지 알고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만…”

“허허. 그것 참으로 딱하게 되었소. 부부가 서로 같은 신분이었다면 부군의 재산 6할을 상속받을  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안주인의 신분 때문에 시댁에서 7할을 가져가겠구려.”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브렌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럴 수가. 그랬다가는 우리 들국화 향기는 끝장이에요!”


“시부모님과 합의를 해서 계속 운영하면 되지 않소?”

“그분들은 원래부터 저를 탐탁지 않게 여기셨…아니, 죄송해요. 괜스레 나리에게 넋두리를 늘어놓고 말았군요. 지금 말은 잊어주세요.”

하소연을 뱉어내던 그녀가 절망에 빠져서맥없이 주저앉아버리자 멜더릭은 충분히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정이 그렇다면 어쩔  없겠구려. 슬하에 자녀라도 두었다면 부군의 재산은 물론이고 신분까지 물려받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오.”


“죄송하지만 그런 일은…어멋?!”

무심코 대답하려는 순간에 머릿속에서번개처럼 스치고지나가는 사실이 있었다.

“왜 그러시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야? 안돼. 멈춰!’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반대로 말이 튀어나와 버리고 말았다.

“어, 어쩌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라요!”

“가능성이…있을지도 모른다?”


멜더릭이 수상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니까 그게. 아직 확실하게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며칠 전에 우연히 남편하고 그, 관계를 가질 기회가 있어서…어쩌면.”

횡설수설했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흠. 안주인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소. 만약에 그렇다면 재판소에서 재산분배계류신청을 할 수가 있소. 하지만 시댁에서 사실관계에 의문을 품고 이의제기를 하면 다소 복잡한 법정 공방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괜찮겠소?”

법정 공방이라는 말에 살짝 겁을 먹는 브렌다였지만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수는없었다.

‘그래.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그동안 아이가 없다고 시댁과 남편에게 얼마나 수모를 당했어? 그래도 여관 때문에 참아왔는데 이제는 그것마저 내놓아야 한다고? 절대로 그럴 수는 없어. 처음부터 나에게는아무런 잘못도 없었어. 이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것이 확실하게 증명되는 거야.’

꿀꺽!

결의를 다진 그녀는 단호한 표정으로 멜더릭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물론이에요. 태어날 아이가 무사히 자라기 위해서라도 이 여관은 반드시 제 손으로 지켜내고야 말겠어요.”

****


“어제는 도대체 어디를 다녀오신 건가요? 주인님.”


마차를 타고 이동하던 도중에 오리나가 질문을 해왔다.

“알 필요 있느냐?”

“조, 조금쯤은 알려주셔도 되잖아요. 으으으으.”

매정한 대답에 글썽거리며 투정을 부리자 리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후후후. 쓸데없이 호기심도 왕성한 녀석이로군. 보다시피 새로운 옷을 장만하기 위해서 양품점에 다녀왔다. 그리고 우체국과 대장간에도 들렸지.”


“엄청나게 좋은 옷이던데 어떻게 구하신 거예요? 돈도 없으실 텐데…”


“전부 공짜로 주더군.”

“네??”

믿을  없는 소리에 눈이 희둥그레졌지만 그는 어깨만 으쓱해보이고 별다른 대답은 해주지 않았다.

“아, 알았어요. 그건 그렇다치고 우체국이랑 대장간은 뭐하러 다녀오신 거예요?”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가 필요하니까 말이야. 정보와 무기.  가지를 손보고 왔지. 이제는 군인들을 모을 차례고.”

“정보, 무기, 군인? 거기에 전쟁이라니 도대체 누구와 싸우시려는 거죠?”


도저히 이해할  없는 말에 혼란스러워하며 물어봤지만 역시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잠시 후.

마차는 한적한 교외 외곽에 혼자 떨어져 있는 용병 길드의 건물 앞에서 멈췄다.

메이드와 함께 있다는것만으로도 주목을 모으기에 충분했지만 길드 내부로 들어서자더 많은 이목이 리한 일행에게쏠렸다.

‘불황이라더니 사실이었군.’

대충 헤아려도 4~50명은 되어 보이는 용병들이 한가하게 테이블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지만 손님은 하나도 없었고 의뢰서의 숫자도 눈에 띄게 적었다.

그는 여기에서 조금 더 세게 나가보기로 했다.

“외투를 들고 있어라. 오리나.”


“네, 주인님.”


촤아아아악!


망토를 벗어 던지자 예상대로 장내가 후끈 달아올랐다.

[귀족님이다.귀족님이야!]


[휘유~! 진짜배기 귀족 나으리가 오셨잖아!]

[으헤헤헤.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무모한 계약이라도 반드시 따내고야 말겠어!]


[하악하악. 내 취향의 미청년이야. 앗흥! 나의 주니어가 불끈 달아오르고 있어!]


어째서인지 살짝 정신 나간 위험한 이야기도 들려왔지만, 대다수는 구세주라도강림했다는 것처럼 열의에 가득한 시선으로[픽미 업!]이라는 단어를 머리 위에 띄워놓고 있었다.

하지만 리한은 구태여 서두르지 않고 모자를 털면서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런, 이런. 시골의 길드는 손님을 대하는 자세가 영 되어먹지 않았군. 아직도 마중 하나 없다니 말이야.”


“캐논!!”

이 말이 나오기 무섭게 용병 하나가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

“뭐 하는 거야. 이 자식아! 귀족 나리께서 방문하셨는데 빨리빨리 튀어나와서 안내를 해드려야  거 아니야?!”


“옳소! 매번 꼬박꼬박 받아 처먹는 수수료는 뒷구녕으로 쑤셔 넣었냐?안락한 의자에 홍차, 달콤한 쿠키와 차분하게 쓰다듬을 수 있는 귀여운 댕댕이 한 마리는 벌써 내어드렸어야 할  아니야!!”


야유가 쏟아지자 젊고 호리호리한 청년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죄, 죄송합니다. 손님! 댕댕이까지는 무리라도 지금 당장 응접실로 안내해드릴 테니까 제발 돌아가지 말아 주세요!”

“흠, 좋아. 그렇게까지 절박하다면 의뢰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할 것도 없겠지.”


“성은이 망극합니다. 손님!”


완벽하게 갑과 을의 자세가 정립되고 나서야 만족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그의 뒤를 따랐다.

안내를 받은 장소는 길드 내부의 별실.


푹신한 소파와 테이블, 차와 다과까지 구색은 모두 갖추고 있었지만, 문제는 수많은 용병이 방 밖에 몰려들어서 노골적으로 대화를 엿듣는 바람에 실제로는 오픈되어 있는 공간이나 다름없게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흠. 이래서야 비밀유지는 어림도 없겠군.”

“죄, 죄송합니다. 손님. 요즘 들어서 업계가 너무 불황이라서…”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마라, 캐논!]


[옳소!  때문에 의뢰비가 줄어버리기라도 하면 책임질거야?]

빠직!

“정~~말로 죄송합니다. 손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부디 하해와 같은 너그러운 아량으로 이 해주세요. 제발, 흑흑흑흑.”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지 상당히 처량한 모습이었다.


“오팔 왕국은 지난 3년 동안 평화로웠으니까 말이야. 파벌싸움은 점점 심해지고 있지만 아직 정면충돌로 발전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지. 이런 와중에 영주들이 군대를 동원해서 몬스터의 씨를 말려버렸으니 왕국 용병들의 실력도 많이 녹슬었겠군.”

“꼬,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손님! 원래 전쟁이라는 것이 하루를 위해서 백일을 단련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벡워스 길드의 용병들도 그런 쓰임새를 위해서 나날이 연찬을 게을리하지 않는 일당 백의 재원들입니다!”

[좋아, 좋아! 잘하고 있어. 캐논! 그런 식으로 팍팍 우리들의 세일즈 포인트를 어필해 드리라고!]

[참고로 내 도끼는 바람을 가르고 죽음을 삼키지. 이 볼프에게 의뢰를 맡긴다면 질풍처럼 빠르게 해결해 준다고!]


[이 자식이 치사하게 은근슬쩍 자신을 선전하다니. 이 크로커다일님의 데스롤로 혼쭐을 내줘야 하겠군.]

[웃기지 마라. 이몸의 무기는 하늘을 꿰뚫는 드릴이다아아앗!]

“…”


“흐허허허헝! 정말로, 정말로 면목이 없습니다. 손님! 제발 저희들을 버리고 돌아가지 말아주세요!!”


끝없이 들려오는 외야의 중2병 배틀에 창피함을 모조리 혼자서 떠안은 캐논은 얼굴을 감싸 쥐고 눈물을 터트리면서 애잔할 정도로 간청을 해왔다.


‘여러 가지로 마음고생이 심한 모양이군.’

괜스레 짠해지는 리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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