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H이벤트)일장춘몽(7)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이를 낳으라니…아직 확실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단정적으로 마을 할 수가 있지?’
틀림없이 자신을 놀리는 소리였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를 불안감이 사라지지를 않았다.
마치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사로잡혀 버린 것 같다고나 할까.
지난밤내내 자신을 뜨겁게 안아주었던 그 강인한 생명력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자신을 잉태시켜버릴 것 같은 불길한 느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남편처럼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원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녀라고 어찌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않겠는가?
만약에 그가 불임만 아니었더라면 벌써 2~3명은 출산해서 삭막한 집안은 기쁨으로 넘쳐흘렀을 터였다.
하지만 이제는 이룰 수도 없고 가져서도 안 되는 꿈이다.
‘정신 차려. 브렌다!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사고로 인생을 망쳐버릴 거야? 만약에 다른 남자의아이를 품었다는 사실을 알면 그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지금까지 소중하게 지켜온 여관은 고사하고 위자료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겠지. 절대로 그럴 수는 없어!’
답답한 마음에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을 때 로비를 청소하던 여종업원이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브렌다 안주인님! 오늘따라 굉장히 얼굴이 좋아 보이시네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지금 내 표정이 밝아 보여?”
기가 막혀서 물어보자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하루 만에 굉장히 예뻐지셔서요. 살도 많이 빠지셨고 화장도 엄청나게 잘 먹으신 것 같은데요?”
“그래?”
이 말에 무심코 자신의 상의를 잡아당겨보자 여종업원의 말처럼 평소보다 훨씬 더 허리 품이 여유롭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어젯밤에 너무 격렬하게 사랑을 나눠서…?’
다시금 뜨거웠던 순간을 떠올리자 얼굴이 화끈거려서 세차게 손부채질을 했다.
그때.
심부름으로 시가지로 나갔던 남종업원이 여관의 문을 박차고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크, 큰일 났습니다. 안주인님! 큰일났어요!!”
“어머, 깜짝이야! 진정해 렉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허억! 허억! 허억! 아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세, 세상에 글쎄 케이힐 나으리가 돌아가셨다고요!”
“뭐, 뭐라고?”
갑작스럽게튀어나온 남편의 소식에 놀라서 말을 더듬어버렸다.
“지금 그것 때문에 병사들이 여기로 오고 난리도 아니…앗?!”
쿵!
그가 이야기를 마치기도 전에 다시금 세차게 여관의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육중한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여관의 내부로 들이닥쳤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당신이 여기의 안주인이오?”
대장으로 보이는 화려한 깃털 장식 투구를 쓰고 있는 남자가 위압적인 목소리로 질문을 해왔다.
“네, 네! 그, 그렇습니다만 나리. 도대체 여기는 무슨 일로…”
겁을 잔뜩 먹은 표정으로 말하자 그가 투구를 벗었다.
“흠. 특별하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으니까 두려워하지 마시오. 내 이름은 멜더릭. 휴크 남작님의 명령으로 벡워스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경비대장이오.”
“네, 네…”
여전히 얼어붙어서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자 그가 병사들에게 밖으로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일사불란하게 빠져나가는 경비병들.
덕분에 위압감이 훨씬 줄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을놓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들이닥쳐서 미안하오. 너무 급하게 터진 일이라서 경황이 없다 보니 실례를 저질렀소. 우리가 갑자기 부인을 찾아온 것은 부군에 관해서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오. 혹시 최근에 그에게서 수상한 행동이나 움직임을 목격하지는 못했소?”
“죄송하지만 전혀 모르겠어요. 저도 지금 막 종업원에게 부고를 들은 참이라서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그녀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이야기하자 멜더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군의 시체는 오늘 아침에 레드 벨트의 슬럼가에서 발견되었소. 지난밤에 그곳에서 수수께끼의 대량학살이 일어났는데 거의 20여구나 되는 무더기 시체와 함께 찾아냈다오.”
“대량학살이라고요? 그것도 레드 벨트라니 남편이 그곳은 무슨 일로…”
“부군이 매일 그곳에 출입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다는 소리오?”
“그럴 리가 없어요! 매일 아침 술에 취해서 돌아오는 사람인데 단골 술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니 말도 안 돼요.”
“흠. 보아하니 부부 사이가 그렇게 원만하지는 못했던 모양이오. 남편이 매일 술에 취해서 돌아온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곳은 단골 술집이 아니라 레드 벨트의 슬럼가였소. 그것도 아주 취미가 나쁜 고약한 장소였지.”
멜더릭은 자신의 뾰족한 수염의 끄트머리를 어루만지면서 그렇게 말했다.
“고약한 장소라면…”
“그 전에 먼저 하나만 물어보도록 하겠소. 부인은 지금까지 레드 벨트의 슬럼가에 발을 들여본 적이 없으시오? 데피리스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할 수 있겠냐는 말이오.”
“네, 네…”
위압감에 눌려서 살짝 자신 없게 대답했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종업원들이 앞으로 나서며 그녀를 감쌌다.
“안주인님이 슬럼가 따위에 가실 리가 없잖아요!”
“맞아요. 주인 어르신처럼 여관은 뒷전으로 미뤄놓고 한량처럼 돌아다니는 분이 아니라고요! 도대체무슨 의심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안주인님은 결백합니다!”
“너, 너희들…”
예상하지 못한 변호에 브렌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종업원들의 행동이 고맙기는 했지만 지금 하는 행동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무모하기 이를 데가 없는 만용이었기 때문이다.
벡워스 전체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경비대장이라면 비록 작위가 없는 하급이라도 어엿한 귀족.
어지간한 부르주아 신분은 재판 따위를 거치지 않아도 거슬린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여버릴 수가 있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안주인님. 저희들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안주인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
“맞아요. 저희들의 은인이신 안주인님께서 이렇게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잡혀가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은인이라니 그게 대체…”
너무나이상한 반응에 브렌다가 물어보려고 했지만 껄껄거리는 커다란 웃음소리가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것 참, 내가 커다란 실수를 저질러버린 모양이오. 설마, 이렇게까지 인덕이 있는 안주인께서 범죄에 연루되어 있을 거라니.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바보 같은 의심을 했소. 내 정식으로 사과드리겠소!”
“아니요. 그게…그러니까 얘들은 지금 제정신이…”
“알았소. 알았소! 부끄러워하시는 것도 다 이해하오. 외모만이 아니라 마음씨까지고우신 분이었구려. 휴우. 이렇게 되니까 오히려 죄송스러워지오. 부군이연루된 끔찍한 범죄를 알려드려야 한다는 사실이 말이오.”
여러 가지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브렌다였지만 그 소리를 간과할 수는 없었다.
“끔찍한 범죄라니요?”
“부군의 시신이 있던 현장에서 수십 명의 어린아이가 발견되었소. 모두 짐승처럼 비참한 모습으로 우리 속에 갇혀있었다오. 그리고 사악한 혈마법을 진행하려고 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오. 주동자는 아지트가 발각당하자 모두 도망쳐버린 모양이지만…”
“뭐, 뭐라고요? 세상에 혀, 혈마법이라고요?
이 세계에서는 다양한 마법이 존재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혈마법은 유일하게 모든 나라에서 금지하고 있는 마법이었다.
궁극의 바이오 테크놀로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생물이라는 개념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가장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지만, 반드시 대가를 필요로 하는 재물의식과 인체실험, 합성생물, 태아살해 등의 반인륜적이고 비인도적인 행위가 반드시 동반되는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이 끔찍한 사실에 브렌다는 충격을 받아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케이힐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그녀를 비참하게 했다.
아이에 대해서 광적일 정도로 집착을 보였던 남편이라면, 혈마법 의식으로 불임을 치료할 수 있다는 소리를 듣고 조금도 망설이지않고 넘어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떄문이었다.
틀림없이 아무리 끔찍한 일에 연루되었다고 해도 절대로 주저하지 않았으리라.
‘어째서. 도대체 어째서 그렇게까지…’
휘청!
“안주인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버린 브렌다가 휘청거리면서 쓰러지려고 하자 종업원들이 다급하게 뛰어와서 부축해줬다.
잠시동안 소파에 앉아서 휴식을취하고 정신을 차린 그녀는 상당히 오랫동안 자신을 기다려준 멜더릭에게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나리. 못난 꼴을 보여드렸습니다.”
“인간으로서 지당한 반응이니 부끄러워하지 마시오. 오히려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사악하기 이를 데가 없는 혈마법 의식에 손을 댄 자들이지. 감히 데피리스님의 은총을 받은 빛의 자손으로서 수치스럽기 이를 데가 없는 일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