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과부하(3)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요란하게 비명을 질러댈 때마다 무엇인가가 으스러지고 찢어져 나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절규, 단말마,궁지에 몰린 사냥감들이 뱉어내는 비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저 덜덜 떨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던 오리나는 누군가에게 잡아 끌어져서 품속에 안겼다.
따듯하고 익숙한 감촉과 맡아본 적이 있는 향수.
“리한…?”
“쉬잇. 들키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해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설마, 어제와 똑같은 상황이…’
오리나의 머릿속에서 언데드 무리에게 둘러싸였던 끔찍한 순간이 플래시백 되었다.
시야가 가려져서 돌아가는 상황은 조금도 알 수가 없었지만 지난 일을 교훈으로 배운 사실이 있다면 리한이 조용히 하라면 무조건 조용히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시키는 대로 얌전하게입을 틀어막으며 몸을 맡겼다.
“이제야 말귀를 알아듣는구나.”
착하다는 듯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자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져 버렸다.
[폐하. 달아나는 녀석들은 어떻게 할까요?]
[한 놈도 살려 보내지마라. 듣자 하니 레드 벨트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은 조사 대상이 아니라고 하더군. 모처럼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제거할 수 있는 기회다. 더 원의 원한과 분노를 충분히 가르쳐 주도록 해라!]
[존명!]
부우우우웅!
세찬 날갯짓과 함께 임페리얼 가드들이 밤의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으아아악! 오, 오지 마!!]
[크아아아아악-!]
아스라이 들려오는 비명이 메아리 속에 사그라지며 평화로운 정적이 찾아왔다.
주변에는 인가도 있었지만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문을 걸어잠그고 있을 뿐이었다.
그 멋진 침묵 속에서 리한은 무방비하게 자신의 품속에 있는 오리나를 살펴보았다.
상기된 얼굴.
사건은 이미 일단락되었지만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그저 시키는 대로 입을 다물고 조용하게 들숨과 날숨만 뱉어내고 있었다.
‘안전을 위해서 임페리얼 가드로 미행하도록 했지만 설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레드 벨트로 뛰어 들어와 버릴 줄이야.’
사람이 아무리 경솔하다고는 하지만 경탄할만한 저돌성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덕분에 일을 진행하기에는 훨씬 더 수월해졌다.
‘일단은 여기에서 데리고 나가야겠군.’
더러운 뒷골목에는 쓰러진 시체들이 뒤섞여져서 역겨운 시체들이 즐비해 있었다.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기에는 전혀 좋은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리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꺅?”
“한 번만 더 소리를 냈다가는 입술을 막아버리겠어.”
‘막아버리다니. 대체 무엇으로???’
그녀는 패닉에 빠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주님 안기라는 상태이상(?)에 빠져버린 그녀는 이제는 무엇이 무엇인지도 분간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미칠 듯이 쿵쾅거리는 자신의 심장 소리.
혹시라도 이 소리가 리한의 귀에도 들리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숨을 죽이고 있을 뿐이었다.
잔잔한 냇물이 흐르는 조용한 다리 위에 도착한 리한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임페리얼 가드들을 모두 회수하고 그녀의 안대를 벗겨내었다.
“하여튼 여러 가지로 사고뭉치란 말이야.”
“리한!”
와락 하면서 안겨들었다.
“무서웠어. 정말로 무서웠단 말이야! 으아아아앙!”
“또, 또 기어오른다. 존댓말은 어디에 팔아먹었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밀어내지는 않고 다정하게 머리를 토닥거려줬다.
“어떻게 나를 찾아낸 거야? 거기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야? 그리고…”
여러 가지 의문을 쏟아내는 입술을 검지로 막아버렸다.
“시끄러우니까 닥쳐.”
“…네.”
화가 난 표정으로 주의를 줬지만 오리나는 달빛에 반사되어 비치는 진지한 얼굴에 넋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군. 천방지축도 정도껏이지. 자유롭게선택할 기회를 줬더니 도망쳐서 슬럼가로 들어가?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거냐?”
“죄, 죄송해요…”
변명할 여지가 없는 따끔한 질책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를 했다.
“아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아무래도 너에게는 따끔한교육을 시켜야겠군.”
“네?”
의문을 표시하기가 무섭게 입술이 다가와서 포개어졌다.
“?!!!”
너무 놀라서 반사적으로 밀쳐내려고 했지만 저항하는 손을 단단히 붙잡아 버리고는 더 격렬하게 행위를 이어나갔다.
탐닉의 시간.
“하읏? 읍, 으으으으읍.”
부르르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던 오리나는 허리에 힘이 풀려서 맥없이 늘어져 버리고 말았다.
“하아, 하아, 하아, 하아.”
스스로를 지탱할 수도 없는 상태로 안겨서 헐떡거리는 그녀.
“네 장래를 결정해주마. 평생 나를 따르며 메이드로 일해라. 앞으로 내가 하는 말에는 무조건 복종하고 의문을 표시하지 마라. 너의 모든 행동거지와 인생을 내가 관리하겠다.”
“어, 어떻게 그런…”
“대답은 네, 그리고 네밖에 없어.”
“...네.”
“착한 아이군.”
리한은 그제야 만족했다는 것처럼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나직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 밤은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안아주지.”
****
늦은 밤.
오리나는 리한의 손에 이끌려서 여관까지 돌아오게 되었다.
오는 내내 쭈뼛거리면서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창피하고 부끄러워했지만, 강압적이기 이를 데가 없는 그의 행동과 말투에 최면에 걸려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저항을 하지 못했다.
‘설마 오늘 밤에 첫 경험을 가지게 된다니…’
과거의 애인이었던 알렉스와도 비슷한 분위기까지 흘러간 적은 있었지만 마지막 일선을 넘지는 않았다.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생소한 일에 겁을 먹은 것도 있지만, 막연하게나마 그가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해서 책임질 만큼 성실한 사람이 아니라서 경계했던 것에도 원인이 있었다.
반면에 리한은?
‘비교할 사람을 비교해야지.’
스스로 생각해도 웃기는 대척점이었다.
외모도 외모였지만 품위와 지성. 그리고 자상함(?)과 책임감까지 완벽한 꿈에 그리던 이상형.
문제는 자신을 애인도 아닌 메이드로 받아주겠다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오늘 밤에 안아주겠다는 것은 역시나 그런 의미겠지?’
아무리 돌아가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그녀라도 귀족들의 은밀한 사생활에 대한 소문은 숙지하고 있었다.
오로지 주인의 성욕을 처리하기 위해서 부려지는 여인들이 있다고.
꿀꺽.
“뭘 멍청하게 서 있는거지? 가까이 와라.”
“넷!”
당황해서 삐걱거리는 골렘처럼 움직여버리자 리한은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하하하. 낮에는 용감하게 꽃까지 뿌려놓고 유혹하던 주제에 이제는 겁에 질려버린 것이냐?”
“그, 그거는…”
발언의 의미를 착각해서 일어난 질풍노도 청춘의 폭주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그런 속셈이 없는 행동이었냐고 물어본다면 당연히 아니었다.
“뭐처럼 선물한 옷이 더러워져 버렸군.”
“죄, 죄송합니다.”
“전부 벗어라.”
“읏.”
리한이 지켜보는 앞에서 옷을 벗는다고 생각하자죽을것처럼 창피했지만이상하게도 강압적인 요구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옷고름을 풀어헤치는 그녀.
일단은 어찌어찌 슈미즈 차림까지 되는 데는 성공했지만 거기에서 더 진행하지 못하고 양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감싸 안았다.
“전부 벗으라고 했는데 어째서 손을 멈춰버리는 거냐? 설마, 벗겨주기를 바라는 건가?”
“그, 그게…”
따끔한 질책에 이상하게도 자신이 잘못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칠칠치 못한 녀석이로군.”
웃음을 터트린 리한은 자신이 먼저 거침없이 옷을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꺄아, 꺄아, 꺄아아아--”
어찌할 바를 모르며 짓눌린 듯한 비명을 쏟아내는 오리나.
홍당무처럼 빨개져서 양쪽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는 있었지만 손가락을 벌려서 두눈을 가리지 않는 것이 킬링 포인트였다.
마치조각상처럼 단련된 상체가 드러났을 때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켜버렸지만, 바지를 벗어버리면서 우람하게 솟아있는 거대한 흉기를 드러나 버리자 다른 의미로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저, 저게 설마 남자의…’
사나운야생마처럼 꿈틀거리는 괴물.
다리가 풀려서 주저앉아버린 오리나의 얼굴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벗어라.”
“…네.”
알 수 없는 위압감에 멍하니대답을 했다.
완전히 알몸이 되어버려서 중요한 부위와 가슴만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있는 그녀를 리한은 팔을 잡아끌어서 욕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어느새 부탁했는지 욕조에는 이미 뜨끈한 증기를 뿜어내는 새로운 목욕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