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과부하(1)
“정말로 사례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냐? 나중에 하인을 시켜서 보내줄 수도 있다만.”
“괜찮습니다. 도련님! 대신에 르빌의 이름 두 글자를 절대로 잊어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언젠가 불러주시는 것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흥! 겨우 이 정도로 노블 마크를 요구하다니 생각보다 뻔뻔한 녀석이었구나.”
“하하하. 그저 잘 봐주셨기를 바랄 뿐입니다.”
실제로 돈을 내지 않더라도 오늘 벌어진 일이 두고두고 회자될 테니 본전을 찾는 것은 문제도 아닐 터.
리한은 자신의 모습이 가려질 수 있게 망토를 둘렀다.
갤러리들은 뭐처럼 차려입고 다시 가려버리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이 상태로 지저분한 거리를 돌아다닐 수는 없었고 무엇보다도 차림새가 너무 눈에 띄었다.
“살펴 가십시오!”
르빌에게 마차를 탈 수 있는 장소를 물어보자 친절하게 바래다주고 차비까지 지불.
직원 일동과 함께 배꼽 인사로 배웅을 했다.
리한은 어떻게 해서라도 잘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에서 묘한 연민을 느꼈다.
‘인간 사회는 정말 여러모로 지치고 피로해지는군. 그래도각오를 하고 왔으니까 이런 일에도 점점 익숙해져야 하겠지. 저 녀석은 후계자 지위를 찾고 나서 한 번 불러줘야 하겠어.’
리한은 창가에 기대어 턱을 괴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우체국으로 가지.”
목적지를 물어오는 마부에게 다음 행선지를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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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무렵.
세상모르고 잠들어있던 오리나는 그제야 일어나서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거렸다.
“리한?”
무심코 불러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쥐죽은 듯이 조용한 사위.
멍하니 방안을 둘러보다가 테이블 서랍 위에 옷이 한 벌이 개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입어라.]
“뭐라고 쓰여져 있는 거야?”
글자를 모르는 오리나는 메시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사이에 끼워져있는 장미꽃을 한 송이를 발견하고 환하게 표정이 밝아졌다.
‘혹시 리한이 보낸 선물이 아닐까? 틀림없이 그럴 거야. 어쩌면 이렇게 낭만적일까!’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져서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씻지도 못하고 잠들어버렸기 때문에 부랴부랴 욕실로 들어가서 샤워를 하고 나온 그녀는 서둘러 돌아와서 선물 받은 옷을 침대 위로 펼쳤다.
“이게 뭐야. 혹시 메이드…복?”
실망을 감추지 못했지만 곧바로 생각을 바꿔서 도리질을 쳤다.
“분명히 돈이 모자라서 이것밖에 구하지 못했던 거야. 그래도 전에 입던 옷 보다는 훨씬 깨끗하고 좋아 보이잖아? 후후후후. 기특한 성의를 봐서 특별히 입어주도록 하겠어.”
강한 척을 하면서 그렇게 중얼거린 오리나는 서둘러서 옷을 갈아입고 나서 전신거울에서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쁜 메이드님일까요?”
꼬르르륵.
뱃속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윽. 그러고 보니까 벌써 저녁이네.”
앞서 지불한 여관비에서 식대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그녀는 1층으로 내려와서 카운터로 향했다.
오전과 마찬가지로 안주인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어지간히도 한가했는지 우드파일로 손톱을 다듬고 있었다.
“동생이라면 한참 전에 나갔어. 밤까지 돌아오겠다고 했으니까조만간에 오겠지.”
“어디로 가겠다는 말은 없었나요?”
“몰라.”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브렌다의 태도가 리한을 대할 때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좋아요. 그럼. 식사는 어디서 하죠?”
대답 대신에 손가락으로 식당을 가리켜 보였다.
스트레스가 확 밀려온 오리나는 자리를 떠나는 척하며 그녀의 등 뒤에서 메롱 하며 혀를 내밀어서 소심하게 화풀이를 했다.
잠시 후.
식당에 도착하자 종업원이 경치가 좋은 야외 테이블로 안내를 해줬다.
화려한 열대 관상식물들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식당.
길옆에는 조그마한 운하가 있어서 졸졸거리면서 흘러가는 맑은 냇물 위로 보름달이 비치고 있었다.
여관 자체는 한가했지만 식당 자체는 시끌벅적해서유복해 보이는 부르주아 계급의 사람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가족들과 함께 외식을 즐기고 있었고, 스테이지에서는 음유시인이 하프를 뜯으며 운치 있는노래를 불렀다.
시골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던 오리나에게는 모든 것이 처음 보는 생소한 풍경이었다.
‘정말로 하나부터 열까지 달라도 너무 다르네. 도시에서는 다들 이렇게 사는 걸까?’
괜스레 자신의 차림새가 부끄러워졌다.
잠시 후에는 종업원이 요리를 가지고 왔다.
너무 깨끗해서 자신의 손으로 잡아도 괜찮을까 걱정스러워지는 고급 식기들.
절묘한 간의 배합이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양송이 스프와 저녁 시간에 맞춰서 갓 구워낸 뜨끈 부드러운 빵. 그리고 대미를 장식해주는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까지.
낮에 방문했던 노점의 요리 솜씨에도 감탄했었지만 이번에는 차원이 달랐다.
사회적으로 중산층 이상의 재력을 가지고 있는 부르주아들에게는 흔히 즐기는 외식 코스였지만, 오리나가 받은 컬쳐 쇼크는 자제력을 잃어버리게 만들 정도였다.
“음?!”
목구멍을 타고 사르르 내려가는 스프에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한 손으로 그릇을 들고서 입 주변에 묻혀버리는 것도 개의치 않고 먹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부르주아들은 이런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어머머. 저것 좀 봐! 여자아이가 도무지 품위가 없네. 저렇게 추잡스럽게 먹어치우다니 꼴사나워라.]
[어느 집안에서 일하는 메이드인지는 모르겠지만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 모양이군.]
[어휴. 이래서 시골뜨기들은 그린 벨트에 들어오게 하면 안 된다니까? 우리도 귀족 나리들처럼 출입 통제를 해야 하는데. 여기가 동물원이야, 뭐야?]
“읍?! 크흡. 켁켁!”
자기들끼리 하는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노골적으로 들려오는 소리에 오리나는 당황해서 사레들려버리고 말았다.
가슴을 붙잡고 괴로워하자 오히려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는 것처럼 킥킥거리는 사람들.
쥐구멍에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창피했지만 가까이 다가온 누군가가 등을 두드려주었다.
“진정하고 천천히 물을 마셔.”
“고, 고맙습니…리한?!”
“왜 그렇게 놀라는 거야?”
“어, 얼굴하고 모습이. 어, 어, 어, 어.”
마치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말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버퍼링이 걸렸다.
“어째서 이렇게 변했냐고?”
“그래, 그거!”
리한은 웃음을 터트리면서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조금 꾸며봤어.”
‘조금 정도가 아니잖아!!’
머릿속으로 절규했지만 너무 놀라서 입 밖으로는 한 마디도 뱉어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잠을 자는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달라져 버려도 너무나 달라져 버린 리한. 어째서인지 옷차림은 망토로 가리고 있었지만 꿈에나 보았던 왕자님 같은 외모로 자신을 마주 보고 있었다.
놀라는 것은 주변도 마찬가지.
그가등장한 순간부터 식사를 멈추고 넋을 잃어버린 여자들이 속출하면서 질투에 가득한 남자들의 시선까지 더해져 순식간에 주목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웨이터?”
“네, 손님!”
“앞에 계시는 숙녀분과 같은 것으로.”
“네, 주문받았습니다! 사랑과 정성을 담아서 봉사하겠습니다!!”
여종업원의 대답이 유난히 크고 이상하게 들려오는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잠시 후에번개처럼 돌아온 그녀는 오리나에게 서빙했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푸짐한 음식을 차곡차곡 내려놓았다.
국물보다 건더기가 더 많아보이는 양송이 스프. 빵으로 쌓아 올린 피라미드. 테이블의 반은 차지하는 엄청난 크기의 스테이크.
백미는 수많은 토핑이 얹어져 있는 아이스크림이었다.
“본점에서 드리는 사소한 서비스입니다. 손님!”
‘사소한 서비스 같은 소리 하네. 사심이 철철 흘러넘치잖아! 이런 불여시 같은 년이!!’
오리나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째려봤지만 영업용 마스크를 흐트러트리지 않는 여종업원은 어디에서 개가 짖냐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리한은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친절한 서비스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숙녀분께서 정말로 친절하시군요.”
자연스럽게 손등을 잡고 입을 맞추자 주위에서 자지러지는 비명이 쏟아져 나왔다.
꺄아아아아아악!
“가, 감사합니다! 손님!! 앞으로 이 손은 두 번 다시는, 절대로, 평생 씻지 않을 거예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럴 것까지는…”
감격에 차서 울먹거리며 고마워하는 여종업원을 보고 당황하는 리한이었지만, 질투에 차서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오리나를 발견하고 급하게 표정을 수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