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promotion(6)
[귀족인가?]
[십중팔구 귀족이네. 젠장, 운도 더럽게 없지.]
[저런 차림으로 로얄 벨트에서 나오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지?]
두려움과 호기심. 다양한 반응들이 뒤섞인 시선들이 쏟아졌다.
잠시 후.
가게의 오너로 보이는 남자가 종종걸음으로 달려 나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바로 르네처 양품점의 점장 르빌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인사치레는 필요없으니 어서 입을만한 옷을 가지고 와라. 감히 평민 주제에 귀족을 기다리게 하다니 죽고 싶은 것이냐?”
“죄, 죄송합니다.제가 귀하신 분을 몰라뵙고 실례를 저질렀군요.”
무례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굽실거리면서 사과를 했다.
‘좋아. 일단은 허세가 먹히는 모양이군’
리한이 이런 행동을 하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모든 것은 백작 가문의 후계자라는 지위를 되찾기 위한 포석.
단순하게 생각하면 제니아로 돌아가서 섭정 마르텔 대모를 만나면 끝나는 일이지만, 임페리얼 가드가 수집해온 정보에 따르면 돌아가는 상황이 그렇게 녹록하지가 않았다.
가장 큰 장애물은 영지의 병권을 틀어잡고 있는 래리 삼촌의 존재.
3년 전에 리한을 죽이려고 암살자를 보냈던 돌로레스의 남편이자 후계 서열 2위가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비록 부인이 꾸민 흉계와 직접 관련되지는 않았지만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꽉 잡혀 살면서 그녀가 저지른 잘못을 알고도 묵과해버린 공처가.
하지만 그의 트롤 행위는 이것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현재 병석에 누워있는 섭정 마르텔 대모는 죽기 전에 마지막 소원으로 실종된 후계자 리한을 찾아내서 백작 지위를 물려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살날이 얼마남지 않은노인의 변덕 때문에 지금까지 쌓아 올린 공든 탑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돌로레스가 아니다.
비록 3년 전에 암살자들이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기는 했지만 만에 하나라도 일어날지 모르는 일말의 가능성까지 모조리 싹을 잘라내려고 했던 것이다.
덕분에 래리는 고부갈등에 끼어버린 새우등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완전히 상반된 두 사람의 요청을 듣고 고민 끝에 내린 최악의 결정.
[실종된 백작 가문의 후계자를 데려오는 사람에게는 1만 대륙 은화를 포상금으로 주겠다.]
[실종된 백작 가문의 후계자를 죽이는 자에게 그 두 배를 지불하겠다.]
전자는 모든 사람에게 공식적으로 발표한 포고문이었고 후자는 비공식적으로 현상금 사냥꾼들에게만 돌린은밀한 지시사항이었다.
그로서는 나름대로 어머니와 마누라를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서 짜낸 궁여지책이었지만 이 사실을 접한 부하들의 반응은 일목요연했다.
[우리 각하께서 드디어 후계자가 되려고 결심하셨구나!]
[제니아를 봉쇄해라! 마르텔 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리한 도련님으로 의심되는 사람은 발견하는대로 죽여라! 백작 지위는 래리님의 것이다!]
현재 제니아에서 래리를 차기 후계자로 지지하는 가신들은 거의 70%에 이른다.
나머지 30%도 완전히 반대한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입장.
표면적으로는 섭정 마르텔의 의사를 존중하고 있었지만, 리한의 생사가 불투명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거의 전부가 그의 승계를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후계자 지위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던 그가 자신이 후계자가 되겠다는 선언(?)을 처음으로 내보낸 것이다.
부하들의 충성경쟁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
돌로레스에게도 엄청난 호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미 백작부인의 지위에 오른 것처럼 가신들의 충성 맹세가 이어졌고, 남편 휘하의 군대를 마음대로 움직여서 마르텔 대모가 요양 중인 별택을 격리해버리고 외부와의 소통을 완전히 차단해버리고 말았다.
모든 것이 그녀의 통제하에 있는 상황.
‘이런 사정을모르고 제니아로 향했다면 검문조차 통과하지 못하고 살해당했을 테지.’
한스 일가의 비참한 말로는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이었다.
리한이 놓인 처지도 암울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에게는 아직 하나의 희망이 남아있었다.
짝짝!
르빌이 손뼉을 치자 종업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일단은 치수부터 재어드리겠습니다. 며칠 기다려주시면 맞춤복으로제작해드리겠습니다만…”
“쓸데없는 참견은 필요 없다. 나는 지금 입고 있는 더러운 거적때기를 치워버리고 싶을 뿐이니까.”
“알겠습니다.”
리한은 줄자를 들고 다가오는 직원들에게자연스럽게 몸을 맡겼다.
이 모습에 르빌은 그에게 가지고 있던 일말의 의구심을 완전히 털어버렸다.
‘정말로 높으신 집안의 자제가 틀림없군.’
사소한 움직임에서부터 기품이 느껴지는모습이 하루도 빠짐없이 누군가의 시중을 받지 않으면 보여줄 수가 없는 오연함이 묻어나왔기 때문이었다.
그 생각에 확신을 더해주는 것은 리한이 가게에 등장한 순간부터 그를 눈여겨봤던 직원의 귀띔이었다.
리한이 여기에 행차한 것이 ‘여흥’때문이라는 것이다.
‘귀족 나리들이 생각하는 것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그 자신도 부르주아 출신이기는 했지만 특권층의 사고방식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절대로 그들을 화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천재지변에 감정을 토해내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거스르지 말고 받아들여야 하는 자들.
하지만 르빌에게는 그 이상으로 잘 보이고 싶은 대상이었다.
‘살면서 평생 한 번도 마주치기 어려운 귀족이 제 발로 찾아오셨다?’
그가 재단사로 자수성가하여 자신의 가게를 가진 것이 10년째였다.
부유한 부르주아들을 상대로 장사하면서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항상 이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싶었던 그에게는 도저히 넘을 수가 없는 통곡의 벽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건 바로 화려한 꽃과 공작새들이 어우러지는 지상 최대의 패션쇼, 사교계에 진출하는 것이었다.
세계 최고의 모델들이재단사들이 심혈을 기울여서 제작한 정장과 드레스를 입고 펼치는 꿈의 스테이지.
여기에서 자신의 솜씨를 뽐내었느냐, 아니냐는 업계에서 말 그대로 천지 차이의 대접을 받는다.
어딘가에서 새롭게 양품점을 낸 재단사가한 번이라도 사교계에서 작품을 출품했다는 소문이 나면, 그야말로 구름 같은 인파가 몰려들어서 무엇이라도 사보겠다며 아우성을 치는 장사진이 펼쳐지고는 한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사기꾼이거나 실력이 뒤떨어지는 자들이었다.
왜냐면 정말로 귀족의 총애를 받는 재단사들은 평생 그 가문을 위해서만 옷을 지어 바치기 때문이었다.
가문의 고용인이라는 표시로 주어지는 노블 마크.
누군가는 그것을 노예의 낙인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일반적으로는 평생의 명예요, 영광이자 훈장이었다.
‘실력이라면 나도 뒤떨어지지 않아. 한 번만, 딱 한 번만이라도 그분들에게 나의 솜씨를 보여드릴 수 있다면…’
소싯적에는 이런 야망을 품고 수도 없이 로얄 벨트 근처를 기웃거렸지만, 귀족 사회가 워낙에 폐쇄적인 환경인 데다가 경쟁자들을 쫓아내려는 기득권에서 눈에 불을 켜고 있어서 번번이 좌절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반쯤포기하고 있던 상황.
눈앞에 리한이 나타나 버린 것이다.
‘아무리 봐도 예사로운 분이 아니야. 잡티가 하나도 없는 깨끗한 피부에 대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 틀림없이 귀족 사회에서도 상위에 먹힐만한 준수한 외모까지. 도대체 이런 인재가 어디에 숨어있다가 나타난 거지?’
지역사회의 사교계 스타들을 모조리 파악하고 있던 그는 자신의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다크 호스의 등장에 침을 꿀꺽 삼켰다.
‘무조건 잘 보여야 해. 나의 솜씨를 보여주고야 말겠어!’
짝짝!
촤아아아악-
르빌이 손바닥을 치자 종업원들이 비장의 컬렉션을 모아놓은 거치대를 가지고 들어왔다.
“손님을위해서 특별히 모아왔습니다. 보다시피 본점에서는 고풍스러운 엔티크부터 왕도에서 유행하는 최신 베르가일 스타일까지 모든 종류의 제품을 두루두루 갖추어놓고 있습니다.”
오오오오오!
이 상황을 몰래 지켜보고 있던 손님들은 그 화려한 퍼포먼스에 탄성을 뱉어내었다.
‘좋아!’
기선제압에 성공했다고 생각한 르빌은 남몰래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리한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흥! 유행이 끝나도 한참 전에 끝나버린 옷들을 가지고 와서 잘도 지껄여대는군. 역시나 시골이라서 그런지 촌뜨기 냄새를 지울 수가 없구나.”
“네?”
예상하지 못한 일침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하지만 베르가일 스타일이라면 우리 오팔 왕국에서 틀림없이 선풍적인 인기를…”
“오팔 왕국?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하는 그를 보고서 르빌은 자신이 뭔가를 단단히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