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promotion(5)
거울을 보면서 갸우뚱했지만 일단은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수가 있는 상처이기도 했기에 그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파지지지직!
마스터 코어의 힘으로 마지막 세부 조정을 마친 리한은 일부러 3년전보다 더 준수하다고 생각되는 외모로 돌아와서 백작 가문 후계자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해내었다.
“휴우. 무리하게 힘을 끌어쓰니 역시나 지치는군.”
체력이 고갈되어서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는 것을 씻어내고 욕실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방 안의 분위기가 바뀌어버린 것을 알아채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지?”
아직 밝은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커텐을 쳐서 어두워진 실내.
그곳을 촛불로 밝혀놓아서 은은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고 어디에서 구해왔는지 침대에 꽃잎까지 뿌려져 있었다.
그리고 오리나는 그 위에서 속옷 한 장만을 걸치고 있었다.
새근새근새근
“흠냐아앙.”
아무래도 뭔가를 준비해놓고 기다리다가 곯아떨어진 모양이었다.
“태평하기도 하군.”
“리한님~”
잠꼬대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뒤척거리다가 상의가 밀려 올라가 버리는 바람에 팬티 한 장만 걸치고 있는 모습이 고스란히 시야에 들어왔다.
움찔!
그 순간 리한의 하복부에 급격하게 피가 쏠렸다.
“이게 무슨…”
이해할 수 없는 충동과 생리현상.
“서, 설마 내가 저 인간 암컷과 번식행위를 하고 싶어 하는 건가?”
엘리트 교육을 받은 백작 가문의 후계자였으니 성지식도 당연히 가지고 있다.
하지만 배후령처럼 지내던 시절에는 동물의 왕국을 감상하는 것처럼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었는데, 자아를 차지하고 신체 감각이 일체화되어버리면서 모든 욕구가 다이렉트로전달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충동이 지나치게 강했다.
마치 극심한 갈증에 시달리는 흡혈귀처럼 참아내기 어려운 유혹.
자신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이렇게 강력한 번식 욕구라면 인간이란 사시사철 시도 때도 없이 짝짓기만 해대는 발정난 짐승들이라는 소리가 아니냐? 세상이 이런 괴물들로 채워질 거라고 생각하니 끔찍하기 이를 데 없군.”
스스로의 욕구가 남다르다는 사실을 자각하지는 못한 리한은 차가운 냉수로 흥분을 가라앉히며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아무리 육체가 인간이라고 해도 정신은 퍼스트 선인 내가 통제한다. 자손을 만드는 결정은 욕망에 사로잡혀서가 아니라 내 의지로 실천할 것이다.”
거울을 보면서 그렇게 10분 정도를 되뇌고 나서야 간신히 충동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카운터로 내려온 그는 안주인을찾아가서 이발을 부탁했다.
흔쾌히 수락한 그녀는 아직 개점하지 않은 부속 레스토랑에 리한을 데려가서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헝클어대며 수선을 떨었다.
“세상에 너무 복슬복슬해서 양이 따로 없네. 도대체 이렇게 덥수룩하게 자랄 때까지 어머니는 무엇을 하셨나니?”
‘어머니’라는 단어가 나오자 그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지만 다행스럽게도 앞머리 덕분에 표정의 변화가 드러나지는 않았다.
‘참자. 참아. 겨우 이런 일로 동요해서는 안 되지.’
하지만 이런 생각을 꿈에도 모르는 그녀는 계속 수선을 떨었다.
“오우야. 얘 볼살 좀 뽀송뽀송한 거 보래. 머리카락은 어떻게 잘라주면 좋을까? 이 브렌다 누나한테 말만 해보렴.”
‘누나라고?’
나이에 비해서 젊고 예쁜 편에 속하기는 했지만 염치없는 소리.
살짝 당황하기는 했지만 일반인의 시시콜콜한 수다에 일일이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왼쪽 눈에 흉터가 있는데 가려질 수 있도록 가르마를 타주셨으면 좋겠군요.”
“어머머머! 정말로 그러네. 세상에 잘생긴 얼굴에 이게 무슨 무슨 흉사니? 하아. 보는 내가 다 마음이 아프다. 얘. 조심하지 그랬어.”
본인의 일이 아닌데도 세상 아쉬워하며 이발을 시작했다.
사각사각
조금 시끄러운 것이 흠이기는 했지만 브렌다의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별의별 손님들이 찾아오는 여관답게 이발 요청도 잦다는 모양이라서 전용 도구를 갖추고 있을 정도였고, 준수한 외모를 하고 있는 리한이 머리를 만져달라고 부탁하자 신이 나서 솜씨를 부렸다.
그리고탄생한 작품.
“세상에 이건, 우와…”
마지막을 가위질을 끝낸 그녀는 감탄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보시기에 어떤가요? 조금 이상하지는 않습니까?”
리한이 잘려나간 머리의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
“이상하다니 전혀! 세상에 오리하르콘의 원석이 여기에 잠들어있었네. 처음부터 바탕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훌륭해질 거라고는생각하지 못했어. 와우,엑설런트!”
“전부 누님이 솜씨를 발휘해주신 덕분입니다.”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 꺼낸 칭찬이었지만 그녀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리한을 끌어안아버렸다.
“아이고! 정말로 예쁜 말만 골라서 하네. 얘. 너 돈이 모자란다고 했지? 이번 기회에 도시에서 일해보지 않을래? 일반 시급의 2배, 아니 3배까지 쳐줄 테니까. 응? 누나하고 같이 여기서 일하자. 잘해줄 테니까~”
“죄, 죄송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놓아주세요!”
커다란 가슴으로 얼굴을 파묻어버리고는 사정없이 흔들어대는 바람에 간신히 가라앉힌 하복부가 다시 부풀어버리고 말았다.
때마침 카운터에서 여관 주인을 부르는 차임이 울려서 살아났지만 이렇게 시도 때도 성욕에 사로잡히는 것이 여간 짜증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젠장! 이렇게 아무한테나 발정하다니 원숭이도 아니고…’
다시 가라앉히려고 쓸데없는 시간을 허비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이제는 제법 귀한 집안의 자식처럼 보이기는 하는군. 브렌다가 첫 번째 샘플이기는 하지만 지금 외모가 타인에게 호감을 둘 수 있다는 것도 알아냈고 말이야.’
현재 상태에서 가장 빠르게 보유할 수 있는 사회적인 무기는 외모였고 리한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머리를 정돈하고 자잘한 부스러기들까지 말끔하게 털어낸 그는 여관 밖으로 나와서 임페리얼 가드를 호출했다.
[성과는 있느냐?]
[그렇습니다. 폐하. 지금까지 수집한 정보들을 간략하게 요약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부하의 보고를 받은 리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예상대로군.’
내용을 듣고 앞으로 해야 하는 일들의 방침이 명확하게 정해졌기 때문에 곧바로 목적지를 설정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환골탈태한 외모는 확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마다한 번씩 돌아보면서 감탄을 금하지 못할 정도였고, 시선이 교차하는 여자와 아이들은 아는 사이도 아닌데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유일한 옥에 티는 허름한 차림새.
“실례지만 길 좀 묻겠습니다.”
“어머나, 예! 무슨 일인지 말씀해주세요.”
지나가는 여성에게 말을 걸자 굉장히 적극적으로 대답을 해왔다.
“여기에서 제일 큰 양품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양품점이요? 어휴. 어쩌면 좋죠? 거기까지 찾아가시는 길이 조금은 복잡하거든요. 저쪽으로 두 블록 이동해서 오른쪽으로 보시면 늘어서 있는 가게들이 보일 거예요.”
‘하나도 복잡하지 않은데?’
자신을 바보 취급하는 줄 알고 살짝 당황했지만 슬그머니 거리를 좁혀오면서 가슴을 강조해보이는 것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어때요? 많이 어렵죠? 제가 직접 안내해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혼자서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가씨.”
“아니에요. 뭐 이런 것을 가지고…하지만 꼭 보답을 하고 싶으시다면 여기에 제 주소를 적어드릴게요. 오늘 오후에 제가 마침 굉장히 한가하거든요.”
주소를 건네주는 손아귀에서 엄청난 압박이 느껴져 왔다.
“아, 알았습니다. 시간이 나면 연락해드리죠.”
“꼭 연락해주세요. 꼭이요!”
‘환장하겠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스트레스에 기가 빨려버린 기분이 들었지만 영업용 마스크를 흐트러트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안내받은 장소로 향했다.
양품점들이 늘어서 있는 거리.
적당한 후보를 찾아낸 리한은 잠시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심호흡을 했다.
딸랑~
“어서 오세요. 손님! 무슨 일로 오셨…”
“가게 주인을 불러와라.”
“네?”
“귓구멍은 장식으로 달고 있느냐? 가게 주인을 불러오라고 하지 않았느냐!”
“네, 네!”
갑작스러운 호통에 놀란종업원이 허둥지둥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정말이지. 아랫것들이 사는 거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군. 쓸데없는 여흥에 어울리느라 괜히 하루종일 먼지만 뒤집어쓰고 다녔어. 젠장!”
투덜거리면서 매서운 눈초리로 장내를 쏘아보자시선을 마주치는 사람마다 다급하게 고개를 돌리면서 딴청을 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