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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화 〉promotion(4) (21/429)



〈 21화 〉promotion(4)

“그, 그건. 그러니까 그게…”

리한은 별다른 생각 없이 뱉은 말이었지만오리나는 변명할 말을 찾아내지 못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십중팔구 과거에 지독하게 학대한 것을 비꼬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면 어디 한 번 먹어보도록 할까?”


우아한 자세로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드는 리한.

샐러드와 매쉬 포테이토, 통밀빵과 폭립, 파스타, 등등.

유통이 발전한 도시답게 바로 옆에 있는 아레스터에서는 구경도 하지 못했던 다양한 메뉴들이 나왔지만 오리나는 그에게 시선이 사로잡혀서 손도 대보지 못했다.


‘터무니없는 속도로 사라지고 있는데 씹는 소리가 나지를 않아?’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광경.


테이블 매너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녀조차도 감탄을 마다하지 못할 정도로 리한의 움직임은 우아하고 절도가 있었지만, 재빠른 손놀림 끝에서 자취를 감춰버리는 음식들은 마치 위장으로 연결된 불가시不可視의 포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분명히 입 주변에서 사라지고 있는데 언제 입속에 넣는 거지? 씹기는 하는 거야? 턱과 목울대가 전혀 움직이지를 않잖아?’


혼란에 빠진 그녀가 얼어붙었지만 진귀한 광경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어느새 구경하는 갤러리가 생겨났다.

“왜 먹지 않고 쳐다보는 거지? 식욕이 없는 것이냐?”


“아, 아니요! 지금 막 먹으려고 했어요.”

“훗. 그렇다면 토마트 스프를 추천하도록 하지. 가게 주인이 제대로 풍미를 낼 줄 아는 유일한 음식이더군.”


‘그 와중에 맛을 보셨다고요?’


여러 가지로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었지만여기에서 더 넋을 놓고 있다가는 자신의 몫까지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서 포크를 집어 들었다.

쿵!

산더미 같은 음식을 마지막 하나까지 완전히 먹어치우자 주변에서 탄성과 박수갈채가 쏟아졌지만 리한은 살짝 아쉽다는듯이 입맛을 다셨다.

“양이 조금 모자라는 것 같은데 일단 3인분만 더 추가하도록 하지.”


“...”

파지지직!

그리고 그는 정상 체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마치 말라비틀어진 나뭇조각을 물에 불려서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처럼 지독한 말라깽이에서 건장한 모습으로 돌아온 리한.


‘잃어버린 세월을 되찾겠다는 게 농담이 아니었잖아? 귀족들은 일반인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듣기는 했지만…이래서야 완전히 다른 생물이잖아?’

눈앞에서 일어나는 터무니없는 변화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녀를데리고 노점을 나온 리한은 그린 벨트 번화가 근처에 위치한 여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들국화 향기


주로 상인과 여행자들이 머무르는 숙소였지만 때마침 시장이 열리지 않는 비수기라서 내부는 적막할 정도로 한산했다.


‘하루 이틀 조용하게 지내기좋겠군.’


카운터에는 느긋하게 턱을 괴고서 장부를 정리하고 있는 안주인이 보였다.

30대 초중반으로 짐작되는 나이.

갈색 계열의 곱슬머리와 양쪽 어깨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헐렁한 옷차림이 눈에 띄었다.

리한은 그 앞에서 목청을 살짝 가다듬었다.

“방을 하나 주시죠.”

“하나?”


이 말에 안주인과 오리나가 동시에 반문했다.

“미안하지만 누이. 수중에 돈이 없어서 낭비하고 있을 여유는 없어. 방을 함께 쓰는 것이 불편하더라도 부모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참아주기를 바래.”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오리나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 방을 주는 것은 상관없는데 부모님은 어떻게 되신 거니?”

“노상에서 야영하다가 몬스터에게 습격을 당하는 바람에 헤어졌습니다. 벡워스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는데 언제 오실지를 모르겠어요.”


“어머나! 그것참 큰일을 당했구나. 사정이 그렇다면 어쩔  없지. 트윈룸은 원래 대륙 은화 하나를 받아야 하는데 특별히 동화 90개까지 깎아주도록 할게.”

“그러면 제값을 치러드릴 테니 이발과 목욕물까지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후후. 동생이 제법 흥정을 할  아는데? 아직 어려 보이는데도 대견하구나. 얘. 주변에서 그런 소리도 자주 듣지?”


“네, 그러게 말이에요. 정말로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니까요.”


그렇게 대답하며 리한을 흘겨보는 그녀였지만 왜 그러냐는 듯이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잠시 후.


종업원에게 안내를 받아서 방으로 도착한 오리나는 곧바로 조금 전의 일을 따지고 들어왔다.

“어째서 방을 하나만 잡은 거야?”

“다시 말을 놓는군.”


“거예요?”


“휴우. 조금 전에도 설명했지만 돈이 그렇게 넉넉하지는 않아. 제니아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가능하면 아껴서 써야지.”

“하지만 굳이 그런 거짓말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잖아요. 남매라고 하지 않아도 다른 사이라고 소개해도 되고. 예를 들면 여, 연인이라던가…”

꾸욱.


리한은 오리나의 이마를 검지로 밀어서 침대에 주저앉혀버렸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편하게 쉬세요. 누이.”

“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새빨개져서대답했다.


이쯤 되자 리한도 그녀가 품고 있는 감정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나한테 연애감정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군.’


그때 종업원이 와서 목욕물이 준비되었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미안하지만 먼저 씻도록 하지.”


“버, 벌써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니요. 그게…그러니까. 준비하고 있을게요.”

‘준비?’

이해할 수 없는 소리에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샤워를 마치고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갔다.


“하아.”


저절로 터져 나오는 한숨.


피로감이 해일처럼 몰려왔지만 한가하게 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리한 폰 아슈킬이라고 했나?”

물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


3년 동안 기억을 공유하면서 이제는 자신의 반신처럼 되어버린 인간이다.


백작 가문의후계자로 태어나서 유복한 인생을 살아왔지만, 너무나 사랑받는 따듯한 환경 속에서 살아오는 바람에 적의에 둔감했고 세상의 잔혹함을 배우지 못했다.


너무나 순수하고 바보 같을 정도로 선량했던 청년.


모든 인간이 종말의 마수라고 부르며 괴물 취급을 했던 더 원조차 불쌍해했던 그는, 백작 부인이라는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숙모가 꾸민 흉계에 말려들어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뜻하지 않게 신세를 지게 되었으니까 원수는 확실하게 갚아주도록 하지. 원하지 않더라도 말이야.”

앞머리를 쓸어올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리한은 욕실에 있는 전신거울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16살에서 성장이 멈춰버린 19살의 청년.


마스터 코어의 힘으로 정상 체형을 회복시켰지만 어디까지나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갔을 뿐이지 잃어버린 성장까지 재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더 지독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뭐처럼 강해지는 비결을 알아냈는데 처음부터 다시 수련해야 한다니.”

암살자들에게 공격당해서 단전이 파괴당하고 주화입마에 빠져버렸다.

태중양생술로 얻은 벌모세수와 격체전공의 효과. 그리고 엘리트 교육으로 쌓아 올린 모든 경지를 한순간에 잃어버린 상태.

애초에 마스터 코어가 살려주지 않았더라면 죽음을 면하지 못했을 테지만 뼈아픈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3년 동안 꾸준히 자가치유능력이 활성화되어서 단전까지 재생성되었다는 것.

‘이 능력덕분에 한스 일가의 가혹한 혹사 속에서도 버텨낼 수가 있었지.’

백치로 지내던 시절을 떠올린 그는 실소를 금할  없었다.

하지만 현재의 상태를 플러스냐 마이너스냐로 따지면 당연히 전자였다.

무려 백작 가문의 후계자라는 지위를 손에 넣었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강해지는 비결을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

이런 지식을 손에 넣은 것은 더  전체에게 있어서 커다란 진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래도 여기에서 만족할 수는 없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백작 가문을 차지하고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손에 넣어야 해.


파지지지직-

그렇게 다짐한 리한은 마스터 코어의 치유능력을 사용해서 자신의 피부세포를 재생시켰다.


새살이 돋아오르면서 거칠어지고 노화된 낡은 표면을 밀어내었다.


마치 뱀이 허물을 벗는 것처럼 벗어내어 작은 조각 하나도 남기지 않고 하수구로 흘려보냈다.

머리카락과 피부.

모든 것이 갓난아이처럼 보송보송하고 매끄러워졌다.

하지만  한 군데. 마스터 코어의 능력으로도 왼쪽 눈에 남아있는 흉터는 어째서인지 치료가 되지를 않았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 아직 남아있는 리한이라는 인간의 자아가 치료를 거부하고 있는 걸까? 이상하게 이 부분에 대해서 떠올리려고 하면 뭔가 안개가 끼어있는 것처럼 애매하기도 하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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