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promotion(1)
자세히 들여다보자 범인의 실루엣이 보였다.
“벌레? 이 녀석들은 아까 귀찮게 날아다녔던…”
상상도 하지 못한 정체 당혹스러워졌다.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꼭 붙어있는 녀석들.
자신의 손가락보다 작은 벌레들에게 힘으로 밀려버렸다는 사실이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저, 저리 가지 못해?!”
소심하게 손사래를 치며 쫓아보려고 했지만 요지부동.
찝찝한 마음에 차마 건드리지는 못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고 할 때 모닥불이 시야에 들어왔다.
‘횃불로 쫓아버릴까? 그래. 저거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위이이이잉!!
“큭?!”
그런 생각으로 걸음을 옮기려고 했지만 새롭게 날아온 벌레들이 장벽처럼 펼쳐지면서 그의 앞길을 막아버리고 말았다.
부우웅! 부우웅!
마치 서툰 수작은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거세게 날갯짓을 해오는 무리.
이쯤 되자 자신에게 명확하게 의사 표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 알았어. 불은 싫다는 거지? 알았으니까 진정해. 일단은 진정하고 천천히…”
항복하겠다는 것처럼 양손을 들고 뒷걸음질을 치던 마커스는 가만히 눈치를 보고 있다가 잽싸게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벌레들의 움직임이그보다 빨랐다.
위이이이잉!!
촤아아악!
“파이어…크윽! 저, 저리로 가! 저리로 꺼지란 말이야!”
시동어를 말하기 전에 스크롤이 찢어져 버리자 당황하면서 손과 팔을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별다른 소용없이 움직임을 봉쇄당하고는 벌레들에게 제압당해버리고 말았다.
슈우우우욱-
한 줄기바람이 불어오더니 구름을 몰아내면서 세상에 푸른 달빛을 비췄다.
[그대는 누구인가?]
정박이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부신 황금 광채로 시선을 향하자 벌레들의 왕이 반짝거리는 날개를 드리우며 하강해 왔다.
“아- 아- 아-”
그 아름답고 신비로운 광경에 매료당한 정박이가 손을 뻗었다.
[도대체 누구이기에 몸속에 우리의 지보를 품고 있는 것인가?]
“아- 아아아- 아아아악!”
이 질문에 갑작스럽게 머리를 감싸쥐면서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무엇인가에 억눌려서 제대로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벌레들이 왕이 하늘로 떠오르는가 싶더니 공중제비를 돌았다.
다음 순간.
쾅!
그와 충돌한 정박이의 고개가 완전히 뒤로 꺾여버리고 말았다.
[흐르는 피여 깨어나거라. 망각의 심연에 잠들어 있는 본질을 떠올려 자신을 기억해내라. 그내는 누구인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그토록 간절한 목소리로 우리 더 원을 불러들였는가!!]
이마를 따라서 흘러내리는 피가 소년의 입술을 붉은색으로 그려나갔다.
블러드 디자이어.
사아아아악-
강하게불어오는 바람이 구름을 몰아오면서 달빛을 가려 다시 한 번 세상을 어둠 속으로 물들여 나갔다.
천천히 올라오는 새빨간 미소.
소년은 자신의 머리를 뒤쪽으로 쓸어넘겼다.
“오랜만이구나. 네비로스.”
후우우우우우우웅!
사방의 숲과 나무들이 격렬하게 요동을 쳤다.
두근두근두근
[서, 설마 당신은…]
이지를 상실했던 흐리멍덩한 온전한 눈동자가빛을 되찾았다.
신선한 공기를 폐부로 깊이 빨아들이면서 음미한 그가 털어내듯이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돌아왔다.”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숫자를 헤아릴 수도 없는 아우성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퍼스트 선의 귀환.
세상에서는 이미 그들이 멸망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여왕은 죽고 근거지는 초토화되었으며 살아남은 소수의 개체는 연구실로 끌려가서 실험동물로 전락해버렸다.
지도자를 잃고 구심점을 잃어버린 더 원은 헌터들에게 손쉬운 토벌 대상이었으며 짭짤한 벌이였다.
하지만 그들은 더 원이 자신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수많은 방식으로 세상에 암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세상을 멸망으로 이끌 신탁을 받았다는 종말의 마수들과 그들의 왕.
어떤 의미로는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할수가 있었지만 그런 분위기를 읽지 못한 이방인이 공포에 질려서 괴성을 질렀다.
“으아아악! 아슈킬 백작 가문의 후계자가 괴물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니. 이건 말도 안 돼! 전부 꿈이야! 악몽이라고!!”
“시끄럽게 잘도 짖어대는군. 도대체 언제까지 저따위 것을 살려두고 있을 셈이냐? 네비로스.”
[죄송합니다. 폐하. 즉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으아아악! 저리로 가. 저리커흐어어어억!”
콰드드드드득!
순식간에 몰려드는 벌레들에게 머리끝까지 파묻혀버린 마커스는 물컹한 과일이 뭉개져 버리는 것처럼 사방으로 피를 뿜어내면서 최후를 맞이했다.
그리고 평화로운 침묵이 찾아왔다.
“이리로 오너라.”
퍼스트 선이 명령하자 날아온 벌레 한 마리가그를 구속하고 있는 목줄을 잘라내 주었다.
“휴우. 내 의지로 행동하는 것도 3년 만이군.”
자유롭게 풀려난 그는 오랜만에 몸을 움직여보는 사람처럼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을 겪으신 겁니까?]
“보다시피 인간의 몸에 흡수되었다. 아마도 마스터 코어의 능력 때문이겠지.”
[하필이면 어째서 인간의 몸으로…]
“정확한 이유는 나도 몰라. 워낙에 베일에 싸여있는 변덕스러운 보물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생존을 위해서 최선의 선택을 내리기는 했던 모양이다.”
[최선의 선택이라 하심은?]
“3년 전에 눈앞에서 리사엘의 무리가 불타는 모습을 봤다. 나 또한 죽음의 창에 관통되어서 사경을 헤맸지. 추격자들이 나를 쫓는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면 몸을 숨겨야만 했지. 마침, 근처에 인간들의 시체가 널부러져 있더군.”
[의태를 하셨다는 말씀이군요.]
“정확하게는 흡수, 합체라고 해야 하겠지. 지금까지는 계속 인간의 몸속에 배후령처럼 갇혀 있었으니까 말이야. 설마, 백치의 자아에 밀려나 버려서 3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쳐다만 보고 있어야 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어떻게 그럴 수가…]
상당히 놀랐는지 네비로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뭐, 지금이라도 자유롭게 해방되었으니까 다행이지. 그리고 아무런 성과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것보다 더 원은 어떻게 되었지? 모두 무사한 것이냐?”
[제 무리는 보다시피 건재합니다. 말씀하신 리사엘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루스탐과는 연락이 닿아서 합류를 의논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위험에서는 벗어난 것이냐?”
[일단은 그렇습니다. 테세트 평야를 차지하고 방심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마지막까지 집요하게 추격해오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은 비교적 안전한 근거지를 확보해서 생존자를 모으고 상처를 추스르고 있습니다.]
“불행 중에 다행이로군.”
[여왕 폐하와 함께 지켜드리지 못해서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잔악무도한 인간을상대로 이만큼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대견한 일이다. 나같은 것은 여왕 폐하조차 지켜내지 못해서 이런 꼴이 되어버렸는데 누구를 탓하겠느냐?”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폐하. 이제부터는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퍼스트 선이 자책하자 네비로스가 무릎을 꿇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손바닥 위에 내려앉은 벌레만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네 코어 종족인 블랙하드비틀이 내가 기억하던 것과는 달라졌구나. 혹시 세대교체를 해버린 것이냐?”
[바로 보셨습니다. 3년 전의 패배를 교훈으로 엔지니어들에게전투능력을 개선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마스터 코어로 조정해주시면 훨씬 나아질 겁니다. 이제 옥좌로 돌아와서 저희를 이끌어주십시오.]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우우우우우우웅!
[어째서입니까?!]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네비로스가 흥분하며 세차게 날개를 떨었다.
“나에게는 아직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여왕 폐하의 유언대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기 위해서 새로운 변화를 몰고 와야만 해. 나는 적을 배우고 깨우치겠다.”
[설마, 이대로 인간이 되시려는 겁니까?
“아니. 나는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더 원의 퍼스트 선으로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종족의 번영과 생존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리한 폰 아슈킬의 삶도 받아들일 것이야. 반드시 돌아오겠다. 네비로스. 그때까지 더 원을 부탁하겠다.”
[!!]
퍼스트 선이 고개를 숙이자 벌레들의 왕과 신하들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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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툭! 툭툭!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던 오리나는 누군가가 자신의 뺨을 두드려대자 인상을 찌푸리면서 깨어났다.
“아웅, 씨! 잘 자고 있는데 대체 누구야…읍?!”
[조용히 해라.]
갑작스럽게 입이 틀어막혀지는 바람에 당황했지만 상대를 보고 더 놀라서 눈이 동그래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