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블러드 머니(3)
“세상에! 그, 그게 정말이유?”
“이 여편네가 오늘따라 유난히 감이 없네. 당연하지.이만한 돈이면 노예 4, 50명은 부려도 끄떡없어!”
“아빠! 그러면 나도 귀족 집 마나님처럼 예쁘게 차려입을 수 있어?”
“물론이지. 그까짓 옷 한 벌이 대수냐? 아예 양품점을 통째로 사주지. 으하하하하하!!”
한스가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다는 것처럼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려 보이자 두 모녀는 황홀한 표정을 지으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하지만 신이 나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오리나와는 다르게 처음부터 어딘가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던 매기는 짙은 한숨을 뱉어내었다.
“에휴.”
“아까부터 왜 그래? 그러다가 땅 꺼지겠네. 이렇게 경사스러운 날에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한스가 추궁하자 마지못해서 입을 열었다.
“사실은 말이유. 야코프 그 영감탱이한테 오늘까지 정박이. 아니 도련님을 넘겨주기로 해버린 일이 신경 쓰여서 말이에유.”
“아니, 어차피 말로만 주고받은 약속이었는데 뭘 그렇게 신경을 써?”
“사실은 그게 말로만 주고받지를 않았어유.”
그렇게이야기하면서 조심스럽게 펼쳐 보인손바닥에는 구리 동전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한스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이, 이게 뭐야? 설마. 계약금을 미리 받아버린 거야?”
끄덕.
쿵!
오리나가 들고나오던 짐을 떨어트려 버리고 말았다.
“도, 도, 도,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어? 엄마! 그 독사 같은 영감탱이한테 무슨 짓을 당하고 싶어서…”
“아니, 나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았니? 요즘 살림살이가 너무 고단했다고. 그나마 내가 이거라도 받아왔으니까 저녁식사를 했지. 애비나 딸년이나 게을러 빠져서는 뒤주에서 쌀 떨어지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크흠.”
푸념을 늘어놓으면서 신세 한탄을 하던 그녀는 남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멋쩍게 헛기침을 했다.
“지금 당장 떠나자.”
“여보?”
“꼭 필요한 짐만 챙기고 나머지는 버려. 밤새 걸으면 벡워스까지 도착할 수 있을 거야. 거기에서 배를 타면 제니아까지 사흘 거리밖에 안 돼. 어서 서둘러!”
하지만 모녀는 움직이지 않고 머뭇거렸다.
“설마 지금 야반도주를 하자는 말이유?”
“다른 방법이 없잖아!”
“그냥 자경단한테 도와달라고 하자. 아빠. 벌써 해도 떨어졌는데…”
“자경단 같은 소리 하네! 그 녀석들이 영감탱이한테 고리까지 빌린 거 몰라? 당장 내일 아침에 해가 뜨면 앞장서서 몽둥이를 들고 올 새끼들한테 무슨 도움을 받아?”
“히익! 그, 그러면 어서 서둘러야겠네유.”
이제야 돌아가는 사태의 심각함을깨달은 매기가 겁을 먹고 말했다.
“아무렴 그래야 말고. 내가 겨우 동화 30개에 도련님을 넘기려고 하루종일 뛰어다닌 줄 알아? 어림 반푼어치도 없지. 절대로 남에게 빼앗길 수 없어.”
강하게 다짐하는 한스였지만 오리나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불량하게 팔짱을 끼었다.
“하아. 보자 보자 하니까 도저히 못 따라 주겠네. 저는 그냥 여기에 남을게요. 둘이서 다녀오세요,아빠.”
“이 년이 지금 뭐라는 거야?”
“쪽팔리게 야반도주가 뭐야? 동네 사람들이 얼마나 수군거릴 텐데. 창피해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라고…”
“조금만 참으면 떼부자가 될 텐데 그까짓 평판이 무슨 상관이야?!”
“정박이가 진짜 귀족이라는 증거도 없으면서 자꾸만 이러잖아! 만약에 아니면? 포상금은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집도, 돈도 없는 알거지 신세로 거리에 나앉게 되면 아빠가 책임질 거야? 솔직히 얘가 어디를 봐서 백작 가문의 후계자다운 구석이 있어?”
나름대로 일리 있는 말을 하면서 반항해오자 한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호오, 그래? 그러면 이년아 어디 한 번 네가 원하는 대로 한 번!…오라, 갑자기 왜 이러시는가 했더니 이제 보니 알렉스 녀석하고 헤어지기 싫어서 그러는구만?”
“뭐? 아니, 여기에서 알렉스가 대체 왜 나와?”
어처구니를 상실한 오리나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는 매기까지 동조해서 그녀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에휴. 등신 모지리 같은 년. 치마만 두르면 모조리 껄떡거리는 한심한 놈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수절을 하니? 너는 낮에 그런 일을 당해놓고도 자존심도 없어? 하여간에 잘생겼다면 사족을 쓰질 못하니 누구를 닮아서 이러는지…”
“진짜로 아니라니까. 엄마까지 대체 왜 그래?!”
얼굴이 더 빨개질 수 없을 정도로 빨개진 그녀가 수치심에 부들부들 떨면서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한 번 약점을 발견한 한스 내외의 공세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냥 내버려 둡시다. 임자.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어? 안타까워도 어쩔 수 없지. 도시로 나가면 알렉스 정도는 길가에 치이는 돌인데 말이야.”
“그러게 말이에유. 세상이 얼마나 넓고 잘생긴 남자들이 많은데 굳이 우물 속에서 살아가시겠다니까 어쩔 수가 없네유.”
“뭐?”
이야기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오리나는 당황했다.
“알렉스 녀석이 우리 딸을 잘 지켜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야코프 그 독한 영감탱이한테 동화 30개를 저당 잡혔으니까 10배로 뽑아내려고 하겠지? 녀석이 갚아주려나 모르겠어.”
“그 돈을 어째서 우리가…”
“어휴! 부모한테 얹혀사는 백수가 그런 돈이 어디에 있겠슈. 끽해야 대신 팔려가주는 정도겠쥬. 그래도 정말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그 정도는 해주겠쥬?”
“…”
여기에 대해서는 그녀도 할 말이 없었다.
낮에만 해도 최악의 방법으로 자신을 배신해버린 알렉스.
오리나라고 해서 그가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다만,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100%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는 야반도주로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녀라고 해서 어째서 상금이 탐나지 않았겠는가?
오리나에게는 오리나 나름대로 야망이 있었다.
한스는 알레프에 정착하면 두 번 다시는 아레스터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부자가 되면 꽃가마를 타고 금의환향해서 자신을 배신한 알렉스와 마을 사람들에게 복수해주겠다는 다부진(?)계획을 세워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야반도주라는계획은 그 환상에 세차게 찬물을 끼얹어 주었다.
덕분에 무조건 성공을 자신하는 두 사람보다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보고 있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그녀에게 선택지를 남겨두지 않고 있었다.
“에휴. 아깝구나. 아까워! 우리 딸이 예쁘게 차려입으면 멋쟁이 신사들이 줄을 서서 청혼하려고 야단법석을 떨 텐데 말이야. 그렇지. 임자?”
“!!”
“두말하면 잔소리쥬. 지금이야 촌티가 나서 그렇지 얘가 젊은 시절의 나를 얼마나 빼닮았다고. 코도 오뚝하고 몸매는 늘씬한 것이 주근깨만 없으면 사내들의애간장을 사르르 녹여버릴 텐데 말이쥬.”
“아니. 그 정도는…헤헤. 그, 그럴까?”
오리나는 쑥스러워하면서 자신의 탈색된 금발을 만지작거렸다.
“뭐야? 죽어도 따라오지 않는다고 버티더니 그새 마음이 바뀌어버린 거야?”
완전히 넘어왔다고 생각한 한스가 팔꿈치로 툭툭 건드리면서 장난스럽게 질문해 왔다.
“내가 언제 죽어도 따라가지 않는다고 했어? 그냥 단지 어디까지나 정든 고향을 떠나는 것이 마음이 아파서…”
“마음이 아프다면 어쩔 수 없네. 슬프지만 오리나는 두고 갑시다. 임자.”
“알겠시유.”
“아니야! 알았어. 갈게, 가면 되잖아. 어디 두고 가기만 해 봐!”
허겁지겁 자신의 방으로 뛰어 들어가는 그녀를 보면서 부부는 승리의 웃음을 터트리면서 손바닥을 마주쳤다.
하지만 한스는 한편으로는 딸의 장래가 염려스러워졌다.
‘에휴.철딱서니 없는 년이 속을 썩이네. 속을 썩여. 사람이 이렇게 쉽고 순진하게 넘어가 버리니 장래에는 어떤 사기꾼 같은 녀석에게 속아서 신랑이랍시고 데리고 올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의 머리 위쪽으로 벌레 한 마리가 거슬리는 소리를 내면서 지나쳐 갔다.
위이이잉
짝!
“젠장,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녀석들이 자꾸만 기어 들어오는 거야? 여보. 알레프로 이사하면 노예들을 시켜서 벌레 쫓는 향을 피우도록 합시다. 매일 이렇게 지저분하고 더러운 것들한테 치이며 살아가니 지긋지긋해서 살 수가 있어야지.”
“그러쥬. 그만한 돈이라면야 무슨 사치를 누리지 못하겠수. 나도 이 지긋지긋한 집안일에서 해방될 수 있다면야 쌍수를 들고 환영하우다!”
두 사람은 그렇게 김칫국을 들이마시면서 자신들의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잠시 후.
여행할 채비를 마친 한스 일가는 어둠이 짙어지는 틈을 노려서 조심스럽게 집 밖을 나섰다.
혹시라도 누가 볼까 랜턴으로 불조차 붙이지 않았고 어스름한 달빛만을 의지해서 으슥한 오솔길을 통과. 한참을 이동한 끝에 마을 어귀를 지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