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화 〉블러드 머니(1) (11/429)



〈 11화 〉블러드 머니(1)

“하이고. 세상에! 1만 대륙은화가 도대체 얼마나 되는 돈이랴?”

“묻기는 뭘 물어? 우리 같은 평민은 꿈도 꾸지 못할 액수지. 지난주에 열린 노예시장에서 제일 비싸게 팔린 고급 엘프 노예도 고작해야 500은화 밖에 하지 않았다고.”

“꿀꺽. 아니, 그 선녀 같은 이종족 계집이 말인가? 하여간에 귀족 나으리들은 통도 크시군.”

“누가 아니래? 나 같은 놈은 은화 냄새를 맡아본 지가 언제인지도 모르겠는데 말이야. 도대체 어떤 녀석이 포상금을 받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부럽군. 부러워!”

“염병. 3년 전에 전쟁터에서 사라진 사람을 어떻게 찾아? 진작 죽어서 뼈다귀만 남아있을 테지.”

“그것도 그런가?”


한가로운 시골에서 일어난 해프닝에 재잘거리던 사람들은 자신들과 상관없는 이야기에 금새 흥미를 잃어버리고 하나씩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남자만은 수배서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세상에 맙소사! 지금 도대체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야? 왼쪽 눈에 있는 불꽃 흉터. 저 입과 코의 생김새하며 아무리 봐도 정박이가 틀림없어. 이게 꿈이야 생시야?’

“자네 지금 뭘 하고 있나?”

“으아아아아아!!”


혼이 나가버린 것처럼 서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노인이 어깨를 치자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을 질러대었다.


“으아닛, 깜짝이야! 아니  갑자기 소리는 지르고 그래? 하여튼 요즘 젊은 놈들은 정신머리를 어디에 두고 다니는지. 에잉, 쯧쯧쯧. 사람  떨어지게 말이야!”

“죄, 죄송합니다. 어르신!”

다급하게 사과한 남자는 누가 봐도 수상할 정도로 허둥거리며 장내를 빠져나갔다.


‘이런 멍청한 바보, 쫄보 같으니라고! 거기에서 왜 그렇게 소리를 질러? 젠장, 하필이면 오늘. 이제와서 저런 내용을 발견하다니 재수도 없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지만 일단은 서둘러야만 했다.

평소에는 쉬엄쉬엄 올라가던 마을의 비탈길을 단숨에 뛰어오르는 남자.

숨이 너무 차서 심장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올  같았지만 어서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어서 힘들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했다.


쾅!

그가 집 문을 박차고 들어오자 쭈그려 앉아있던 아내가 화들짝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에구머니나, 깜짝이야! 아니 이 양반이  죄 없는 문짝을 부수고 그래? 로바 열매를 팔겠다고 하더니 고스란히가지고 오고…”

“정박이는 어디에 있어?”


“정박이는 갑자기 왜?”


“묻는 말에나 대답해!!”

소리를  질렀다.


“아, 아니. 어제 노예상인한테 팔기로 했잖수. 그래서 오리나가 벌써 한참 전에 데리고 나가버렸는데…”


“이런 젠장!!”

“갑자기 몽둥이는  들고, 여보! 바깥양반!!”

들고 있던 바구니를 바닥으로 패대기쳐버린 그는 아내가 부르는 소리도 무시하고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벌써 팔아버렸으면 어떻게 하지? 그 독한 늙은이가 절대로 순순히 도로 내놓을 리가 없는데. 설마, 이렇게 허무하게 1만 대륙은화를 날려버리는 거야? 안 돼! 절대로 그럴 수는 없어. 그 영감탱이하고 사생결단을 내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정박이를 찾아와야만 해!’

우드득!

그렇게 결심한 그는 몽둥이를 강하게 잡아 쥐었다.


읍내를 지나는 길.

걸음을 재촉하던 그는 한가하게 마주 오는 지인과 마주치게 되었다.


“여어! 한스. 지금 마실 나가는 거여?”


강아지풀을 물고 얄미운 미소를 지어 보이는 이웃집 웬수.

어느새 또 도둑놈처럼 야금야금 재산을 불렸는지 처음 보는 낯선 소인小人 노예의 목줄을 뒷짐으로 잡아끌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배가 아파서라도 무시해버렸을 일이었지만 오늘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벤! 자네 혹시야코프 영감한테 다녀오는 길인가?”

“어이쿠, 이런! 자랑하려던 셈은 아니었는데 한 번에 알아보는구만 그래. 자네도 알다시피 요즘 파즈 수확이 이만저만 어려운 게 아니잖나? 지금 부리는 녀석들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겠더라고. 하기야 자네는 이제 땅도 없는 처지니까 한갓지겠지만 말이야.”

아니나 다를까 전생에 자랑하지 못해서 죽은 귀신이라도 되는지 사람 속을 긁어대면서 아니꼬운 소리를 늘어놓았지만, 그가 마을에서 유일한 노예상인한테 다녀오는 길이라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거기서 내 딸을 보진 못했나? ”


“오리나는 왜? 아, 드디어 정박이를 팔아버리려는 모양이군. 녀석이 답답한 구석이 있기는 해도 밥값 정도는 스스로 벌어오는 녀석이었는데 말이야. 매정하시기도 하셔라. 어지간히도 사정이 급했나 보지?”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묻는 말에나 답해! 내 딸을 봤어? 못 봤어!!”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폭발해버린 그가 몽둥이를 들이밀면서 외쳤다.


갑자기 멱살을 잡고 윽박지르자 기겁하면서 겁을 먹은 벤.

“히이이익! 가, 갑자기 무섭게 왜 이러나? 진정하게. 못 봤네, 못 봤어! 읍내까지 가는 길이라고는 여기 하나뿐이니까 마주쳤다면 알아봤을 테지만…”

“젠장! 이런 빌어먹을 년이 대체 어디로 새어버린 거야?”

“혹시…”

“혹시 뭐?!”


눈을 희번들하며 물어보자 그의 목이 자라처럼 움츠러들었다.


“아니, 자네 딸이 요즘 알렉스라는 애송이하고 가까이 지내지 않나? 두 사람이 요즘 엘리드의 호숫가에서 깨가 쏟아진다는 것을 봤다는 사람이 하나둘이 아니라서 말이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내가 일러바쳤다고 하지는 말게. 응? 이, 이봐. 약속일세!!”

한스는 목적지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기가 무섭게 뜀박질을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이동했을까.


호숫가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완연한 봄.


여름에 성큼 다가서는 화창한 햇살에 새들은 느긋하게 젖은 날개를 말리고 있었고, 물가에서는 길게 목을 늘어뜨린 요정 같은 은방울꽃들이 앙증맞은 조그마한 발들을 나란히 담그고 있었다.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장소.

수풀 속에서 젊은 남녀들의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하하하하하! 진짜? 아니, 아무리 그래도 말도 안 돼.”

“정말이라니까? 네가  코주부 녀석이 벌에게 쫓겨서 도망치는 꼴을 직접 봤어야 했는데. 꽥꽥거리는 오리처럼 뒤뚱거리면서 달려가는데 헐렁한 바지가 점점 밀려 내려가면서…”


“어우 야, 그만해! 상상되잖아.”


여성이 휘두르는 손바닥을 남자가 잡았다.


갑작스럽게 분위기를 잡는 남자와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는 여성의 시선이 교차했다.

“알렉스?”

“오리나.”


연인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른 그가  눈을 감으면서 입술을 들이밀어왔다.

동시에 아래쪽으로는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을 움켜잡으려고 시도했지만 삐딱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던 그녀가손등을 세차게 꼬집어 버렸다.

꽈악!

“아얏! 아오, 씨. 이번에는 분위기도 좋았는데  그래?”


“몰라! 아빠가 자기와 이러는 걸 알면 죽여버릴 거란 말이야.”


“아이고. 이런 귀여운 겁쟁이 같으니라고. 걱정하지 마. 내년에는 정식으로 청혼해줄 테니까. 장인어른한테도 정식으로 사이를 인정받자고. 오빠 믿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한번 진도를 나가보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주둥이를 밀어버렸다.

“또 그 소리. 거짓말도 한두 번이지.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진짜라니까? 백수로 지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설마 앵귀스 삼촌이 나를 이렇게 계속 내버려 두겠어? 조만간에 다시 가게로 부를 테니까 두고 보라고. 급료만 받으면 당당하게 독립할 수 있다는 말씀이야. 그러면 너도 같이 나와서 살자. 어서 그 지긋지긋한 집구석에서 벗어나고 싶잖아?”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아예 관심이 없는 눈치는 아니었다.

이것을 알아챈 알렉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하! 드디어 이 년이 빈틈을 보여주는구나? 길었다. 길었어. 어지간하면 벌써 넘어왔을 텐데 빌어먹을 도도한 년.’

속으로는 그렇게 욕하면서도 겉으로는 순정을 바치는 사내처럼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얘가 속고만 살았나? 나 사나이 알렉스. 설령 지금 이 자리에서 아버님과 마주치게 되더라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 따님을 제게 주으아아아아악?!”


“허억! 허억! 허억! 허억! 허억!”

“아, 아빠?”

덤불 속에서 튀어나온 한스가 충혈로 빨개진 눈을 부라려왔다.

씩씩거리면서 들썩거리는 어깨. 나뭇가지며 잎사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몽둥이를  잡고 모습은, 두 사람에게 지옥의 악귀나찰은 아니더라도 저승사자쯤으로는 비추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따님에게는 두 번 다시는 손을 대지 않을 테니까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그냥 한번 해보고 싶어서 접근했을 뿐입니다. 아직 키스도 하지 않았어요. 믿어주십시오!”

“뭐, 이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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