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whos your papa(5)
상황은 이미 외통수였다.
“제, 제가 어떻게 하면 용서를해주시겠습니까?”
“구하는 자에게 어째서 길이 없겠는가? 정말로 간절하다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시켜만 주십시오!”
“아들을 위해서 자결해라.”
“…”
‘올 것이 왔군.’
처음부터 예상하지 못했던 요구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것뿐만이라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여기에 올 때부터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도 순교자로서 죽을 수 있다면 동지들이 유지를 이어줄 거야.’
파르텔로의 머릿속에서 자신을 믿고 따르던 사제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하나같이 나무랄 데가 없는 훌륭한 동지들이다.
지금은 타락할 대로 타락해버린 데피리스 교단이지만 한때는 정말로 빛의 자손들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활약을 보여줬던 시절이 있었다.
민중을 위해서 부패한 권력에 맞서고 병자를 치료하며 약자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 불렸던 시절.
그들이라면 자신이 사라진다고 해도 언젠가 반드시 눈앞에 폭군을 쓰러트리고 교단을 그때 그 시절로 회귀시킬 수 있으리라.
이런 생각이 들자 어떤 최후가 찾아온다고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후후. 보아하니 뭔가를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군. 죽을 때는 죽더라도 네놈이 싸지른 찌꺼기들은 모조리 처리하고 떠나셔야지.”
루크레스 3세가 그의 양쪽 어깨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우드득.
“크윽! 그, 그게 무슨…”
뼈가 으스러지는 아픔에 눈이 부릎떠졌다.
“세상 사람들이 말이야. 이상하게도 나를 손가락질하면서 자네를 추앙하고 있더군. 교단이 이렇게 성세를 누리는 것이 전부 누구의 덕분인지도 알고 있으면서 말이야. 어처구니가 없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평가는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당연한 업보를!’
파르텔로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탐욕에 눈이 먼 루크레스 3세의 행보는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바람직한 성직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교황에 즉위하기 전부터 신도들에게 받은 기부금을 착복하고 교구 재산을 사유화했으며, 자신을 따르는 측근들을 폭력배처럼 동원해서 반대 세력을 숙청하는 등, 온갖 종류의 검은 의혹과 부정한 추문들이 끝없이 흘러나왔다.
이 중에서 사실로 밝혀진 내용만으로도 진작 사제 자격을 박탈당하고 쫓겨났어야 마땅했지만, 제대로 된 청문회 한 번 열리지 않는 이유는 그가 교단의 주요 인사들을 모조리 매수해버렸기 때문이었다.
대주교였던 아버지의 후광과 학연과 지연, 혈연, 그리고 돈과 여자까지 동원하면서 만들어낸 죄악의 카르텔.
고위 사제들이이렇게 썩어빠졌으니 교단의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이런 루크레스 3세에 대한 불만이 쌓이고 쌓여서 독립하고 새로운 개혁 교단을 세우자는 말이 나왔고, 거의 70%에 이르는 사제들이 여기에 동참 의사를 밝혔다.
계획이 성공했다면 아무리 그가 견고한 성을 쌓아올렸다고 해도 응보를 치룰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종말의 마수에 대한 신탁이 내려오면서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순수하게 위기에 빠진 인류를 위해서 사소한 입장의 차이는 잠시 접어두자는 취지로 개혁 교단의 창설을 잠시 미루게 되었다.
그것이 조금 더 길어지게 된 이유도 연합이 압도적으로 승리하면서 대중들에 대한 루크레스 3세의 인기가 상승해버렸기 때문. 여론이 그에게 지지를 보내는 동안에는 일을 진행하는 것이 불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누구도 계획이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잠시 잠깐이면 새로운 사고를 터트려서 추악한 본색을 드러낼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기회가 올 거라고 판단했던 것이 최악의 실책이었다.
“저에게 무엇을 요구하실 생각입니까?”
“아주 쉽지. 죽을 때는 죽더라도 네놈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면 돼. 성직자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잠시 인간으로 돌아가면 되는 일이야. 계집을 탐하고, 약자를 짓밟고, 가난한 자들의 삶과 재산을 빼앗는 순수한 인간 말이야. 그래서 천사들이 너를 경멸하고 동지들이 침을 뱉으며 저주를 퍼부을 정도로 추락한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허락해주지.”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한 요구에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교황이 아니라 악마의 머릿속에서 나왔다고 해도 믿어질 만한 끔찍한 발상.
“말도 안 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과신념 전부를 부정하라니. 당신은 양심도 없습니까? 아무리 저와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다고 해도 같은 성직자에게 어떻게 이런 요구를 할 수가 있으십니까?”
“후후후. 선택은 언제나 자신의 몫이지.”
웃음을 터트리면서 그렇게 말한 루크레스 3세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파르텔로에게 덮어주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기억하는 게 좋을 거야. 만약에네가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대가는 네놈의 자식이 치르게 될거다. 장담하는데 살아서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과 죄악을 경험할 거야.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원히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부르르르-
끔찍한 소리에 세차게 몸이 떨렸다.
“다, 당신은 데피리스님의 심판이 두렵지 않은 겁니까?”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하는군. 당연히 두렵지. 그러니까이렇게 처절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대답하는 루크레스의 왼쪽 약지에는 교황의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살아있는 동안에 저지르는 모든 죄를 사해준다는 면책 특권.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면서 때로는 성직자의 신념에 반하는 선택을 내리기도 해야 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언제부터인가 그런 미신 같은 징크스가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게 되어버린 기묘한 상징물이었다.
어깨를 놓아준 그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서 화롯불을 지폈다.
“추운 날에 무리하지 말고 이만 돌아가시오. 푹 쉬고 맑은 정신으로 어떠한 선택을 내릴지 숙고해보기를 바라오. 자신의 손을 더럽히겠느냐, 아니면 아들이 타락하는것을 지켜보느냐?아이러니하지만 신의 시험이라는 게 원래 다 이런 것이 아니겠소?”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들어 올리자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파르텔로의 몸을 감싸는 따듯한 치유의 기적.
얼어붙은 몸이 녹아내리면서 상처가 아물어갔지만 어째서인지 그 속에서는 신의 영광과 은혜를 느낄 수가 없었다.
훗날. 성인이라고 불렀던 자는 매음굴에서 음독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로써 교황은 자신에게 맞서는 모든 정적을 제거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하게 하는데 성공했지만, 정말로 성공을 만끽한 세력은 따로 있었다.
테르할 제국은 영토 중재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 무능한 황제를 몰아내고 카시우스 16세를 새로운 황제로 선출했다.
귀족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으면서 능력도 출중하다고 알려져 있었던 그는, 전임 황제의 전횡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체제와 위계질서를 바로잡고 다양한 개혁으로 나라를 빠르게 변화시켜 나갔다.
카시우스 16세가 대표적으로 중용한 인물은 창공 기사단의 단장이었던 쥬란 신.
20대 후반이라는 나이에 삼군통합대원수라는 유례없이 막강한 군사 전권을 손에 넣게 된 그는 대대적인 군부 혁신을 통해서 제국군을 세계 최강의 정예군으로 성장시켰다.
그리고 이번 국면에서 수완을 인정받은 로티나는 제국의 모든 정보기관을 통괄하는 수장의 지위에 올랐으며, 자신의 부대를 창공 기사단에서 분리해서 새롭게 은요호 기관이라는 조직으로 독립시켰다.
그로부터3년 후.
황무지에서 이제는 평야로 지명을 바꾼 테세트 지역은 세계 각국에서 파견한 식민지 총독들이 자국이 이익을 위해서 영지 전쟁을 펼치는 각축장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복잡한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군웅할거의 난장판 속에서 가장 먼저두각을 드러낸 인물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테르할 제국이 파견한 킬리안 총독.
하지만 이 싸움에서 어느 세력이 최후의 승리를 거머쥘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만 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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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서력 771년. 5월.
오팔 왕국령 아레스터.
“포고문. 아슈킬 백작가에서 실종된 후계자 리한을 찾고 있다. 실종 당시의 나이는 16세이며 3년 전에 테세트 평야에서 종말의 마수를 토벌하기 위해서 참전한 것을 마지막으로 모습을 감춰버리고 말았다. 용모파기를 보고 짐작 가는 사람이 있다면 가까운 관청에 신고해주기를 바란다. 후계자를 찾아낸다면 1만 대륙은화의 포상금을 하사하겠다. 주의, 음, 주의 사항. 상금에 눈이 멀어서 거짓을 고할 경우에는 엄하게 다스리겠다. 이미 28명의 사기꾼이 목이 잘려나갔음을 명심하라.”
웅성웅성
글을 아는 노인이 게시판에 적힌 내용을 더듬거리면서 읽어내려가자 주변이 시끄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