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화 〉패전(5) (5/429)



〈 5화 〉패전(5)

“설마 인간들도 마스터 코어처럼 자신의 힘을 강화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만약에 다니엘레와 같은 자들이 인간들의 사회에 지천으로 널려있다면 처음부터 더 원에게 승산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인간들이 어떻게 그런 힘을 손에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비밀을 반드시 알아내야만 해. 더 원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그르르르르-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 와이번이 낮은 울음소리를 냈다.

“도와줘서 고맙다. 카루크. 리사엘과 합류하면 원하는 곳으로 떠나도 좋아.”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추격자들은 퍼스트 선이 독을 사용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능력이었다.

블러드 디자이어.

원래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종족과 소통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더 원의 고유한 기술이었지만, 거기에 강력한 의지와 감정이 담겨있으면 조금 더 강렬하게 작동을 한다.

쉽게 말하면 독전파라고 할까.

침략자들을 향한 강렬한 증오와 적의.


오르피아의 죽음과 백성들이 살해당하는 것에 슬퍼하고 분노하는 퍼스트 선의 강렬한 메시지 전달에, 추격대가 환상과 환청에 사로잡히면서 그렇게 심한 발작 증상을 일으켰던 것이다.


‘하지만 이 녀석에게는 그 메시지가 전혀 다르게 작용을 했지.’

카루크가 자신의 편으로 돌아선 것은 예상하지 못한 행운이었다.

인간에게 호감을 품어서 비슷한 멘탈리티를 가지고 있던 말들과는 다르게, 선천적으로 타고난 프라이드와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용족은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오만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것은 자신을 낳아준 부모라고 해도 마찬가지.


알에서 태어날 때부터 임프린팅을 하고 철저한 조교 과정을 거치더라도 사육사를 따르지 않는 야성을 유지했으며, 힘으로 굴복시키려고 해도 죽으면 죽었지 자신보다 위에서 군림하려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괜히 드래곤이 폭군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라고 할까.

그래서 인간들은 이런 와이번을 타고 다니기 위해서 약물과 마법으로 최면 세뇌상태에 빠트려놓고 있었다.

‘설마 블러드 디자이어의 효과로 그것이 풀려버릴 줄은 몰랐을 테지만 말이야.’


카루크는 내면에 잠들어있던 인간을 향한 분노가 일깨워지자 단숨에 족쇄를 벗어버리고 자유의지를 되찾아버렸다.


녀석이 퍼스트 선을 도와준 이유는 일종의 감사 표시.

‘가능하면 더 원의 일원으로 들어와서 계속도와줬으면 좋겠지만 태어나서  번도 자유롭게 날아보지 못한 하늘의 왕자한테 거기까지 바라는 것은 염치가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높은 하늘로 오르자 세상의 시야가 시원하게 트였다.

캄캄한 밤이었지만 밝은 보름달과 반짝이는 별들이 세상을은은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하늘의 경치와는 다르게 지상에서 펼쳐지는 광경은 처참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더 원의 도시와 거리가 불타오르며 사방에서 비명이 들려왔고 동족들은 살아있는 채로 꼬챙이에 꽂혀서 늘어세워지고 있었다.

‘둥지 고래가 죽었어. 아니, 모두가 죽어가고 있어.’

슬픔에 가득한 녀석의 마지막 울음소리가 길고 처연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인간들은 더 원을 포로로 잡지 않았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자들을 줄줄이 세워서 처형해버렸고 사방에서 형용할 수 없는 만행들이 아무렇지도 않게자행되었다.


딸이 어머니를, 어머니가 딸을 때리게 하면서 즐거워했고 자식의 목에 밧줄을 걸고 나무에 매단 후, 아버지에게 목말을 태워 지탱시키도록 한 후에 화살을 쏘며 얼마나 버틸  있을지를 두고 내기를 걸었다.


자신들을 종말의 마수라고 표현하며 괴물 취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의 여성들을 겁탈하는 이상 성욕자, 유충을 발로 차며 공처럼 가지고 놀다가 터트려 죽이는 유아살해자, 살아있는 자들의 팔과 다리를 잘라내어 눈앞에서 구워 먹으며 절규하는 것을 보고 웃음을 터트리는 순수한 악마들.


지옥이 있다면 여기에서 멀지는 않으리라.


“쓰레기 새끼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잔인한 광경에 당장이라도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었지만  원의 지도자로서 오늘의 치욕을 잊어버릴 수는 없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증오가 목덜미까지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닥쳐라! 너희들은 데피리스님의 신탁에서 예언된 종말의 마수들이다. 어둠에 떨어진 더러운 괴물 주제에 감히 명분을 운운하다니 자신의 주제를 알아라!!]


다닐엘레가 했던 말이떠올랐지만 퍼스트 선이 마주하고 있는 실상은 정반대였다.


“어둠에 떨어진 더러운 괴물은 오히려 너희 인간들이 아니냐. 다니엘레? 나야말로 오늘의 수모를 잊지 않으마. 언젠가는 반드시 너희들이 저지른 만행에 걸맞은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반드시!”

차마 떨어지지 않는 손길로 애써 와이번의 기수를 돌리면서 자신의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세차게 깨물어 삼켰다.


“가자. 카루크.”

크오오오오오오!

와이번은 구슬픈 울음소리로 그를 위로해 주었다.


하늘을 날아서 빠르게 일대를 벗어난 퍼스트 선은 적의 대공 감시를 피하려고 구름 아래에 바짝 달라붙었다.

지상을 유심하게 살펴보면서 이동하던 도중에 마침내 애타게 찾아다니던 리사엘의 무리를 발견할  있었다.

“찾았다!”

어쩌면 최악의 사태에 직면했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생각보다많은 생존자를 이끄는 모습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언덕에서 초대받지 않은 자들이 있는 것도 발견하고 말았다.


‘인간들이 저런 장소까지…’

숫자는별로 많지 않았지만 낌새가 어딘가 이상했다.


중앙에 그려져 있는 수수께끼의 거대한 마법진.

검은로브를 입은 수백 명의 마법사가 그곳을 겹겹이둘러싸고 수상하기 이를 데가 없는 의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엘 트베마 르카흐메 흐토, 흐토!]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를 뱉어내며 목소리가 고양되면 고양될수록 정체를  수 없는 소름 끼치는 기운도 점점 농밀해지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싹

‘도대체 저게 뭘 하려는 짓이지?’


마법에 대한지식이 없는 퍼스트 선은 주문 의식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위험을 감지하고 와이번을 재촉했다.

“서두르자. 카루크! 저들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빠르게 아군에게 경고를 해줘야 해! ”

하지만 상대방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언덕 위에서 현장을 지휘하고 있던 대마도사 마르술라는 탐지 마법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하고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비룡 한 마리가 성가시게 하는군. 피아식별로는 테르할 제국에 소속되어 있는 녀석으로 나오는데 어째서 우리의 작전 구역을 어슬렁거리는 거지?”

“연합 사령부에 연락을 취해볼까요? 스승님.”


“아니다. 그 전에 어떤 맹랑한 녀석인지 구경이나 해보자구나. 

허리까지 길게 내려오는 수염을 쓰다듬은 그가 스크롤 한 장을 꺼내서 허공으로 던졌다.


지이이이잉-


[디텍트 타겟]


퍼져나가는 진동과 함께 투명한 비전이 떠올라서 상대의 모습을 비췄다.

회색 피부를 가지고 있는 괴물.


상처투성이로 와이번의 등 위에 매달려 있는 종말의 마수가 마법사들의 눈앞에 정체를 드러냈다.

“이, 이건…”


“하하하하하하!가관이로군. 가관이야! 제국의 자부심이라고 불리는 창공 기사단이 저런 미물에게 비룡을 빼앗기는 날이 오다니. 정말로 오래살고  일이군.”

당황하는 제자들과는 다르게 마르술라는 손뼉을 치면서 즐거워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스승님.”


“글쎄?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살려 보내서 두고두고 웃음거리로 만들어두고 싶은데 말이야. 이대로 보내줬다가는 우리까지 창피를 당할 테니까 놓칠 수도 없겠군. 어떻게 요리를 해볼까?”


“생포해서 제국으로 보내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번 기회에 빚을 만들어두면 장래에 우리 마탑에 도움이  겁니다.”

제자의 조언을 들은 그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도 상대 나름이지. 쥬란 경이라면 모르겠지만 양아치 황제는 그렇게 기특한 녀석이 아니야. 은혜를 베풀어봤자 자신을 업신여겼다면서 화를 내겠지. 어째서 우리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고 뺨을 맞아야 하나?”

“그렇다면…”


“결정했다. 두 마리 모두 죽여라. 사령부에는 저항이 심해서 어쩔  없었다고 말해놓으면 괜찮을 테지. 후후후후.  대단한 창공 기사단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텐데 양아치 황제가 어떻게 나올지 기대가 되는군.”

그렇게 중얼거리는 마르술라의 표정은 마치 설산 꼭대기에서 스노우볼을 굴리는 악동처럼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