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패전(3)
휘두르는 가시검에 육중한 갑옷들이 부드러운 과일처럼 잘려나가서 허공에흩뿌려진다.
푸슉!
마침내 도달한 종착지.
차가운 검신이 리더의 목을 꿰뚫어서 튀어져 나왔다.
턱을 으깨버리는 주먹의 감촉과 비릿하게 뿜어져 나오는 죽음의 냄새.
뜨끈한 피와 골수가 뽑혀 나오는 순간에 마침내 멈춰있던 세계의 시곗바늘이 다시 움직였다.
촤아아아아아악!
폭발하듯이 쏟아져 내리는 피와 살점들.
하아, 하아, 하아.
뜨거운 수증기를 뿜어내면서 거칠세 숨을 몰아쉬는 퍼스트 선이 살기를 머금은 눈으로 남아있는 스틸 도그들을 노려보았다.
“다음 차례는 누구냐?”
깨개개개갱!
순식간에 꼬리를 말고 줄행랑을 쳐버렸다.
동시에 간신히버티고 있던 그의 몸이 휘청거렸다.
“허억, 허억! 젠장. 설마 이렇게까지 많은 체력을 잡아먹어 버리다니…”
덜덜덜덜
사지의 근육이 고장이 나버린 것처럼 경련을 일으켰다.
과부하.
자신의 몸에 융합되고 난 후에 처음으로 사용하는 마스터 코어의 출력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해서 완전히 탈진해버리고 말았다.
나머지 무리가 도망치지 않고 공격해왔다면 꼼짝없이 당해버렸을 것이다.
“여왕 폐하였다면 자유자재로 사용하셨을 텐데…”
스스로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더 원에 전해 내려오는 가장 오래된 유물이면서도 여전히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는 미지의 마스터 코어.
오르피아조차 이것의 기원이 무엇이며 얼마나 거대한 잠재력이 잠들어 있는지 모른다고 말했을 정도다.
작게는 세포 하나의 단위부터 크게는 주변의 생태계조차 자유자재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궁극의 바이오 테크놀로지.
하지만 만능에 가까운 힘이라고 해도 사용자의 역량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할 뿐이었다.
‘겨우 1초 남짓한 시간을 폭주했을 뿐인데도 이런 반동이라면…휴우. 갈 길이 멀군.’
퍼스트 선은앞으로 닥쳐올 위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마스터 코어는 당분간 사용하지 말아야겠어. 출력을 조절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우니…’
다행스럽게도 스틸 도그와 추격전을 펼치면서 뒤따라오던 기병대와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려놓았기 때문에 잠시 휴식을 취해서 체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좋아. 어느 정도 쉬었으니 아군이 있는 곳까지 단숨에…”
사아아아악-
휴식을 마치고 이동하려는 찰나에 스산한 바람이 달빛을 가르며 지나쳐 갔다.
“큭!”
요란하게 날아드는 흙먼지를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리며 막아내었다.
“여기에 있었군.”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포식자의 날카로운 눈동자.
크오오오오오!
생태계 먹이사슬에 정점에 있는 용족, 와이번이 커다란 날개를 펼치면서 사나운 포효를 뱉어내었다.
창공을 지배하는 포식자에게서 달아날 방법은 없다.
생물학적으로 도저히 메울 수 없는 차이를 실감하며 절망에 빠진 사냥감을 가소롭다는 듯이 오시하며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와서 자리를 잡았다.
“감히 우리 번스타인 가문이 자랑하는 스틸도그를 쫓아버리다니 예사로운 녀석은 아니야.”
와이번의 등 위에 안장을 걸치고 서 있는 남자가 자신의 덩치만큼이나 커다란 할버드를 겨냥해오면서 말했다.
‘위험해!’
본능과 이성이 요란하게 경고성을 발했다.
“너, 너는 누구냐?”
꿈틀!
“감히 괴물 주제에 사람의 말을 지껄이다니 분수를 알아라!!”
크아아아아아아!
노호성을 터트리면서 돌진해 왔다.
주인의 분노를 대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커다란 아가리를 드러내며 퍼스트 선을 단숨에 집어삼키려고 하는 와이번.
“큭!”
화들짝 놀란 그가 다급하게 뛰어올라서 피해내었지만, 허공에서 무방비하게 노출되어버린 것을 내버려 두지 않고 할버드가 추격해 왔다.
후우우우웅!
‘제기랄!’
파지지지직!
몸이 두 조각으로 잘려나갈 판이었기에 퍼스트 선은 어쩔 수 없이 마스터 코어의 힘을 끌어올렸다.
사용 출력을 최대한 억제하여 신체 능력을 향상.
날아오는 할버드를 몸을 비틀어서 아슬아슬하게 비껴가게 했지만, 사각에서 또 다른 그림자가 엄습해오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쿵!!
“크아아아아아악!”
거대한 꼬리에 얻어맞아서 지면으로 처박혀버렸다.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어버려서 세상이 꺼졌다가 켜져 버린 것처럼 시야가 돌아왔지만, 잠시 숨돌릴 여유도없이 이어져 들어오는 공격에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며 일어서야만 했다.
“그랜드 크로스!!”
콰콰콰쾅!
대지를 할퀴고 지나가는 충격파가 거대한 십자 크레이터를 만들어냈다.
가만히 누워있었다면 그대로 무덤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파지지지직! 파지지지지직!
신체에서 요란한 스파크가 튀어 오르면서 융합 상태가 불안정해져 갔다.
‘젠장. 터무니없는 괴물이야. 마스터 코어를 사용하지 않으면따라잡을 수도 없는 움직임이라니…’
“허억, 허억, 허억!”
체력의 소모가 너무나 극심했다.
원래대로라면 마스터 코어의 회복능력과 생명 유지기능이 발동되어서 소모하는 만큼 상쇄해야 했지만, 융합 상태가 완전하지 못해서인지 스테미나를 일방적으로 갉아 먹어버리고 있었다.
최악의 연비.
“다람쥐처럼 쫄래쫄래 도망치는 솜씨하나만은 일품이구나. 그렇다면 어디 한 번 이것도 피해 보거라!”
후우우우웅!
할버드를 들어 올려서 풍차처럼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천재지변.
그야말로 태풍의 눈이나 다름없는 구심력이 주변 일대를 초토화하며 뒤집어 엎어버렸다.
쿵!
“으으으윽!”
퍼스트 선은 땅속으로 가시검을 박아넣었다.
하지만 휩쓸리지 않으려고 버티는 것이 고작이다.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이것이 단순한 준비 동작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쾅!!
터져 나오는 굉음과 함께 천지를 집어 삼켜버리는 충격파가 해일처럼 퍼스트선을 덮쳐왔다.
‘피할 수 없어.’
파지지지지지직!
쿵!
“커헉!!”
쩌저저저적-
정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통증과 함께 피부가 거미줄처럼 갈라져 버렸다.
마스터 코어의 출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서 자신의 신체를 다이아몬드처럼 경화. 충격파에 휘말려서 흔적도 없이 소멸해버리는 결과는 피할 수 있었지만 대가는 혹독했다.
투두두두둑-
살점들이 돌조각처럼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쿵쾅쿵쾅쿵쾅!!
촤아아아악!
심장이 폭주하는 용광로처럼 미칠 듯한 용두질을 치더니 급기야는 전신의 모공으로 새빨간 피가 뿜어져 나왔다.
“커헉!”
한계.
마지막까지 마스터 코어에 의존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그리고 눈앞에서 아지랑이처럼 사라져버린 사신이 등 뒤에서 속삭여 왔다.
“잡았다.”
쿵!
“커허어어억!”
마치 벌레처럼 내려 찍혀버린 퍼스트 선.
떨리는 손을 필사적으로 들어 올렸지만 상대는 이제 전투태세를 취할 필요도 없다는 것처럼 태평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훗. 괴물은 괴물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치는군. 이제는 손가락 하나도 꼼짝할 여력이 없는 주제에 끈질기구나.”
“크으윽!”
푸슉!
순간적으로 몸을 돌려 눕혀서 기습적으로 가시검을 발사했지만 맨손으로 잡아채고는 유리처럼 가볍게 부숴버렸다.
뱀처럼 꾸물거리면서 기어오는와이번의 꼬리.
퍼스트 선의 다리를 휘감아버리고는 거꾸로 들어 올려서 다시 안장에 오른 그의 앞으로 데리고 왔다.
“나쁘지 않은 사냥이었다. 괴물아. 지옥에 떨어져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거라. 혹시 아느냐? 데피리스님께서 너희 종족의 그 추하고도 가련한 처지를 동정해서 다음 생에는 인간으로 태어나게 해줄지 말이야.”
마지막까지 조롱을 멈추지 않는 상대에게 퍼스트 선은 힘없이 실소를 터트렸다.
“크흐흐흐.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군.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괴물이라고 하는지 모르겠구나.”
꿈틀!
심기를 건드렸는지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뭐라?”
“쿨럭. 너희가 아니면 도대체 누구를괴물이라고 하겠느냐? 인간. 우리는 지금까지 이 땅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다른 종족에게 피해를 준 적도없었고 다른 세력의 경계선을 침범하지도 않았지.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쳐들어와서 우리를 짓밟아버리고는 괴물이라고? 하하하하! 잠꼬대는 자면서 해라. 더러운 침략자 놈아!!”
서걱!
“크아아아아악!!”
퍼스트 선의 왼쪽 팔이 잘려져 나갔다.
바닥으로 쏟아져 내리는 새빨간 피와 몰려오는 화끈한통증.
마치 몸속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닥쳐라! 너희들은 데피리스님의 신탁에서 예언된 종말의 마수들이다. 어둠에 떨어진 더러운 괴물 주제에 감히 명분을 운운하다니 자신의 주제를 알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