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화 〉 175화 폭군의 끝
* * *
“전하. 피해가 너무 큽니다.”
“알고 있다.”
주변을 에워싼 군대의 비명을 그라고 듣지 못하였을까, 그저 모르는 척, 아닌 척 버티고 있을 뿐이다.
“전하! 보급 부대가 습격받았습니다. 그 많은 식량이 전부 탈취당했습니다!”
“저놈의 목을 베어라. 감히 헛소문을 퍼트려 군기를 어지럽히는 놈이다.”
“저, 전하!!! 전하!!!”
속속들이 들려오는 좋지 못한 소식을 애써 부인했다. 그리고 거짓으로 군사들의 동요를 막았다.
목이 베어지고 또 베어지고 또 베어진다. 그야말로 시산혈해가 따로 없었다. 적과 아군에게 죽은 군사의 시체가 산을 이뤘고 그 시체에서 나온 피가 바다를 이루었다.
그러나 아직도 프레드릭의 명령에 죽어 나갈 생명은 어찌나 많은가, 그저 왕의 명령이라고 따르기만 하는 인간 군세가 불쌍할 뿐이었다.
촤악!
“허억…! 헉…! 헉…!”
허파가 요동칠 정도로 거칠게 몸을 쓴 프레드릭은 마지막 한 놈의 목을 베어낸 뒤에야 찾아온 잠시의 휴식으로, 막혔던 숨을 토해내며 폐부 깊숙한 곳까지 공기를 집어넣었다.
그의 주위에 죽어 나자빠진 존재들, 모두 아군이다. 적이 아닌 아군의 피가 그의 몸을 물들였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모두 쓸모없는 밥버러지들이다. 내가 단죄하지 않으면 군의 사기만 잡아 먹을 놈들이다! 라는 생각이 프레드릭을 지배하고 있었다.
“전하.”
“반돌프 공작.”
“화가 좀 가라앉으셨습니까?”
“그렇소. 그대도 죄가 크오! 이런 머저리들을 아군이라고 기용했단 말인가!”
“송구합니다. 전하.”
“듣기 싫소! 내일 전군에 총공격 명령을 내릴 것이오. 그대도 그대의 정병을 이끌고 함께 하시오!”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 아침 일찍부터 피어오르는 것은 밥 짓는 연기가 아닌 불화살이 타오르고 있는 연기였다.
“공격하라!!!”
“아인들을 모조리 죽여라!”
“인간의 승리로 이 전쟁이 끝날 것이다!!!”
“가라 병사들이여!!!”
기사, 귀족들의 격려와 그들과 함께하는 프레드릭의 웅장한 기개가 병사들에게 없던 용기까지 잡아줄 순 없지만, 뒤로 가도 죽음 앞으로 가도 죽음이라는 사실만은 그들을 강하게 짓눌렀다.
독에 가득 차서, 악을 바락바락 내며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가는 군사들, 그들에게 드리워지는 죽음의 낫이 곧 그들의 생명을 이끌리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남겨진 길이 하나가 아니라면 그들은 과연 무슨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크앗!!!”
“함정이다!”
“피해!”
아주 기본적인 땅이 꺼지는 함정, 아래쪽에 쇠꼬챙이 같은 것을 설치해 둔다면 더욱 위협적인 함정이 되겠지만, 다행히 이 함정에는 여러 명을 떨어트리기만 할 뿔 이렇다 할 위험한 도구는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갑옷을 입고 낙하한 충격은 고스란히 받아야 했기에 운이 나쁘면 팔이나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으며 함정에 빠진 군사 중에서 부상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슥
함정에 빠진 이들에게 겨눠지는 투창과 다수의 활, 어느새 함정 위를 점하고 있던 엘프와 홀스타우로스 등의 아인들이 그들에게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아….”
“어머니….”
“큭, 멜리사.”
“죽기, 싫어.”
사신의 낫이 그들의 못에 겨누어졌다. 이제 이것을 휘두르면 그들의 생명은 그대로 끝난다. 하지만 그들에게 드리워진 낫은 그들의 목 대신 다른 것을 앗아갔다.
“컥!”
아군이지만 아군을 더 많이 죽이는 독전관, 그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 목에 화살히 박혀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크악!!!”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병사들에게 돌격만 외치는 지휘관 기사가 창에 꼬치처럼 궤여 저 멀리 붕! 날아갔다.
“나, 난 귀족이다! 날 죽이면! 커헉!!!”
되지도 않는 방법으로 목숨을 구하고자 했던 비루한 차림이 되어버린 목소리만 큰 귀족이 처참한 몰골이 되어 목이 떨어졌다.
“무기 버리세요.”
“무, 무기를….”
자애로운 목소리, 엘프 전사 중 여성, 그것도 얼굴이 아주 자애로워 보이는 한 여자 엘프의 말이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와 같이 전쟁에 나서서 적의 목을 수없이 베어버린 그녀였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자애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목숨을 건지고 싶다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세요.”
“투, 투항?!”
“사, 살려주시는 겁니까?!”
“저희는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무기를 버리고 이리 올라오세요. 그러면 포로로 대우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선 함정에 빠지지 않았지만, 서슬 퍼런 아인들의 기세에 눌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인간 군세를 향해 말했다.
“당신들 역시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면 포로로 대우하겠습니다.”
“개소리하지 마라! 당장 무기를 들고 저들을 공격!!!”
병사들 틈에 숨어 기회를 노리던 한 기사가 몸을 날리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며 호기롭게 병사들을 독려했다.
하지만, 그는 병사들에게 투항을 권고하던 여성 엘프의 곁에 다가가는 순간
츄악!
“….”
그의 복부에서부터 가로로 그어지는 선과 함께 상반신과 하반신이 서로 나누어지며 그대로 서서히 쓰러졌다.
“어차피 지휘관은 살려둘 생각이 없었는데 알아서 나와주시니 감사하군요.”
자애로운 표정은 어디다 버렸는지 두 눈에 흉흉한 살기를 담은, 도저히 엘프라고 볼 수 없는 무시무시한 표정을 한 그녀, 두 얼굴을 가졌다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두 번의 기회는 없을 겁니다.”
자애로운 표정으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기사를 순식간에 죽인 그녀의 모습에 질려버린 병사들은 모두 무기를 버렸다. 그리고 하나, 둘 아인들의 유도를 따라 스스로 포로의 길로 걸어갔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같다면, 차라리 포로가 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는 것이 차라리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오늘의 전투로 인해 프레드릭의 군세는 절반 이하로 줄어들고 말았다.
“하아….”
생각이 매우 많아진 반돌프 공작은 자기 막사에서 나와 밤의 차가운 공기를 쐬고 있었다. 아침의 전투로 인해 군세가 절반 이하로 줄어 버린 것 때문에 프레드릭이 피를 토하고 말았던 것이다.
“언제부터 잘못되었단 말인가.”
“그걸 아직도 모르시는 건가요.”
“너, 넌!”
이 자리에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 배신자와 같은 그의 딸이 눈앞에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진중으로 숨어들었단 말인가. 도대체 왜 이 자리에 나왔단 말인가.
궁금한 것도 생각할 것도 많았지만, 그는 우선 그녀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막사로 그녀를 거칠게 끌고 들어갔다.
“미친것이냐!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와!”
“아니요. 미치지 않았어요. 저도, 그리고 아버지도요.”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진 몰라도, 들을 생각이 없으니 어서 돌아가라! 내가 길을 열어줄 테니 얼른!”
“제 말을 들어주시지 않으면 여기서 소리를 질러 병사들 손에 죽을 겁니다.”
“그래도 이 녀석이!”
비록 딸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야속하긴 해도 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듯 딸을 사랑하는 아비의 마음은 여전했다.
죽음을 불사하겠다는 딸의 야속한 말에 마음이 너무나 아팠지만, 전쟁 중인 적국에 도움을 주는 딸이다. 마음이 약해져서 그녀의 말에 넘어가는 일은 절대 없어야 했다.
절대로.
“사 왕자님은 이미 글렀어요. 이젠 왕이 아니라 폭군이랍니다.”
“입 다물 거라! 네가 뭘 안다는 말이냐!”
“알건 다 알고 있어요. 오빠가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아 반쯤 날려 버린 일도, 그 때문에 프레드릭 왕자 파에서 입지가 좁아졌다는 것도. 그리고 지금 이 전쟁이 끝나면 아버지 자릴 대체한 인사가 있다는 것도 말이에요.”
“네, 네가 어찌….”
“아버지. 이 전쟁은 절대 프레드릭의 승리로 끝나지 않아요. 렘톤을 공략한다고 했죠? 그런데 이게 뭔가요? 렘톤은커녕 길목에서 길이 막혀 지지부진한데 군세는 초기에 절반 이하죠. 보급도 없어요. 이미 진 거나 다름없다고요.”
“큭.”
진실이라는 거대한 바늘이 가슴을 찔러온다. 촌철살인인 레이나의 말에 반돌프 공작은 할 말이 없었다.
떨리는 손길이 반돌프 공작의 볼에 닿았다. 전쟁에 나선 까슬거리는 남자의 수염과 때구정물이 가득한 얼굴이지만, 그녀에겐 그 무엇보다 소중한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저랑…. 가요…. 아빠.”
“레이나…. 내 딸….”
다음 날 아침, 프레드릭은 완벽히 고립되었다. 아군은 하나도 없이 도망칠 곳도 하나 없이 모든 길목이 아인 연합에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바락바락 악을 쓰다가 또다시 피를 한 움큼 토해내며 졸도한다.
결국, 치열하게 이어지리라 생각한 아인 연합과 프레드릭 국왕의 전투는 싱거운 마지막으로 끝을 맞이했다.
인간 군세 대부분은 포로가 되었고, 반돌프 공작은 귀빈으로 대우 되어 아인 연합에 의해 반 정도 감금되었지만, 레이나가 그를 돌보고 있어서 그 누구보다 편안한 신세를 영위할 수 있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나라를 쪼갠 것도 모자라 남의 것을 탐하던 대 도적은 그 누구보다 처참한 신세가 되어 있었다.
그런 대 도적의 앞에는 그 누구보다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아인들을 다스리며 천년을 넘어 만년을 이뤄나갈 초석을 다진 대 족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실로 오랜만에 밀크와 프레드릭이 한 자리에서 만나고 있었다. 완벽히 정 반대의 길을 걸어간 두 사람이 말이다.
“오랜만에 보는군. 왕자님.”
“흥. 더러운 아인 놈, 그래 나에게 빼앗아 간 미레뉴의 내부는 기분 좋더냐?”
“그녀를 무슨 창녀처럼 이야기하는군. 그런 게 당신이 말하는 사랑인가?”
“닥쳐! 그녀는 내 것이야! 내 것이어야만 했어! 왕좌도 내 것이다! 이 나라도 당연히 내 것이란 말이야!!! 네놈이, 네놈이 모두 망쳤다. 저주한다! 네놈을 저주한다!!!”
악에 받친 프레드릭의 말, 이제는 왕의 위엄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한 필부의 울부짖음이었다.
핏발이 선 눈, 그리고 그간의 연패로 인해 심중에서 자리 잡은 화가 내상을 일으켜 일어난 토혈, 그리고 아득바득 갈아대는 이빨까지, 모든 것이 전부 증오로 변해 눈앞의 밀크를 향한다.
“정상적인 방법이었다면 미레뉴가 당신의 것이 될 수도 있었겠지. 그렇다면 난 그녀와 아무런 관계가 아닐 수도 있었어. 당신은 그녀를 자기 것이라고 선포만 했을뿐 정작 그녀를 얻기 위해뭘 했지? 그녀는 물건이 아니야. 그녀의 마음을 얻으려면 스스로 행동하고 결과로 걸어가야 했어.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지.”
“닥쳐!!!”
“왕좌가 당신의 것이라고 했나? 부정하지 않겠어. 적어도 당신은 왕좌를 차지했었으니까. 하지만 골육상쟁을 일으키고 한 가족을 풍비박산시켰지. 거기에 더해 같은 왕국민이 서로 싸우게 했으니 그 왕좌가 오래갈 리가 없지. 당신의 왕좌는 누군가의 인정을 통해 단단한 반석 위에 세워진 천년 제국의 왕좌가 아니었어. 그 왕좌는 자신의 아집과 용만으로 만들어진 모래성 위에 환영일 뿐이지.”
“크아아아아!!!”
“마지막으로 이 나라는 당신의 나라가 아니야.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는 사람이 정당한 방법으로 왕위에 올라 이 나라를 가져야 해. 적어도 당신은 절대 아니야.”
“이 빌어먹을 아인놈! 감히 국왕인 날 가르치는 게냐!!! 감히, 큭! 감히 나를…. 욱…. 쿨럭! 쿨럭!”
심장을 부여잡고 피를 토하는 프레드릭, 자신이 일구어온 모든 것이 한순간에 부정당하니 참을 수 없는 모멸감에 휩싸였다.
그런 프레드릭에게 회복 마법을 사용해 주는 엘프들, 그는 아직 이 자리에서 죽어서는 안 되었다.
밀크의 손으로 그의 목을 베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그는 이렇게 쉽게 죽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1 왕자와 2 왕자가 모두 참석한 곳에서 죽어야 이 전쟁이 끝났음을 만천하에 공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얼마 후 프레드릭은 밀크와 아인 군세에 철통같은 호위를 받으며 파괴되어 버린 왕도를 향해 이송되기 시작한다.
이 자리에는 두 왕좌와 미레뉴, 그리고 각 정계의 귀족들이 모두 참석하게 되는 공개 처형이 진행된다.
폭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자리로서는 장대하다 할 수 있었다. 그가 저지른 죄가 큰만큼 그 처형식의 크기가 큰 것이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