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163화 그린 스킨 연합.
성문을 통과한 이들 중 파파도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은 안내하러 나온 위도레빗들을 따라 손님용 여관으로 향했다.
파파도는 따로 밀크가 기다리고 있는 족장의 관저로 향하였다.
자신들과는 다른 아인 연합이라는 말에 렘톤의 아인들은 환영하는 눈치를 보였으나 밀크는 마냥 환영할 수만은 없었다.
밀크의 아인 연합이 인간의 문명을 받아들이고 인간과 친화 정책을 펼치고 있으니 저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볼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린스킨 연합이 인간과 공존을 바라고 있다는 것은 루가 알려준 내용일 뿐이다. 그녀도 분명 확실하지는 않다고 말했으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아인들이 모인 연합이라고 해서 무조건 잘 굴러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금 아인들을 다스리고 있는 자신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린스킨 연합이 얼마나 오래 유지된 아인 연합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들도 분명 서로 약간의 반목을 하는 인원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과 친하게 지내는 아인을 못마땅하게 보는 자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지금 이 방 안에 자신과 같이 있는 저 파파도라 불리는 고블린이 그런 부류일 수도 있는 것이다.
“밖에서 들으니 밀크님을 대 족장님이라 부르더군요. 저 역시 그 호칭으로 밀크님을 불러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야. 그러는 자네는 파파도라고 했던가?”
“성문에서 저희끼리 떠드는 소리를 보고 받으신 모양입니다. 하늘에 떠 있는 눈들도 있고 이곳은 정말 많은 아인들이 모여 있군요.”
“그걸 느낀 모양이네. 서큐버스들이 도시의 자경단 같은 역할을 하고 있지. 불가시의 날개 안에 숨어서 치안을 지켜주면서 겸사겸사 식사도 해결하도록 높은 자율성도 부여해 놨어. 딱히 불만들도 없고 도시를 위해 열심히 일해주는 고마운 종족이야.”
“한눈에 봐도 대단해 보입니다. 이렇게 개성이 강한 아인들을 한곳에 모은 대 족장님의 수완이 가장 대단하지만요.”
“아부는 됐어. 찾아온 용건을 말해 주겠어? 이미 느꼈겠지만, 이 도시에는 인간들도 있고 난 인간과 아주 긴밀한 연계를 하고 있어. 내가 이렇게 먼저 밝힌 이유 너라면 알 수 있겠지?”
파파도가 매우 똑똑한 고블린이라는 것을 꿰뚫어 본 밀크는 숨김없이 먼저 자신의 패를 공개했다.
어차피 숨긴다 하여도 알아내려고 하면 나중에는 다 밝혀질 내용이다. 차라리 먼저 밝혀 버리고 이들과 뜻을 함께하기 힘들면 가차 없이 손을 빼는 것이 나았다.
그리고 그런 밀크의 말을 이해한 파파도는 희미하게 웃으며 정중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오! 저희는 대 족장님이 인간과 교역을 하거나 친밀한 관계인 것은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점을 배워서 돌아가고 싶은 지경이니까요.”
“적어도 내가 들은대로 그린 스킨 연합은 인간과 화해를 원하고 있다. 이렇게 받아들여도 되는 거겠지?”
“이 파파도 비록 고블린으로 태어나긴 했지만, 비열하게 모략을 꾸며 남을 속인 일은 없습니다. 과거 저희 고블린이 인간을 상대로 함정을 파고 독을 사용해 비열한 전투를 한 것은 사실이나, 마족의 피가 옅어진 뒤로는 과거를 참회하고 악독한 술수에 죽어간 자들을 기리고 있습니다.”
진지한 그의 표정과 어투, 이것만으로 그를 믿는 것은 힘들지만, 적어도 거짓말을 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밀크는 아까까지 짖고 있던 다소 굳어졌던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는 파파도에게 자리를 권하고 그에게 차와 쿠키를 대접했다.
“호오! 맛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홀스타우로스들의 젖과 각종 곡물을 혼합해서 만든 거라는 말이군요.”
“그래. 갈 때 조금 나누어 줄 테니까 가져가도록 해. 너희 부족이 모두 먹을 순 없겠지만, 우두머리가 나누어 먹을 정도는 줄 수 있어.”
“그 정도만 해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럼 서로 긴장도 풀렸고 하니 저희가 사자로 온 내용을 전달하겠습니다.”
“경청하지.”
“친애하는 첼슨의 아인을 하나로 모은 아인들의 왕에게 라온 왕국의 아인들을 하나로 모은 그린 스킨의 왕이 이렇게 편지를 전한다. 죄송합니다. 아직 저희 왕은 밀크님의 존함을 모릅니다.”
“괜찮아. 나 역시 그쪽 왕의 이름을 모르는걸. 차라리 이참에 이름을 좀 알려 주겠어?”
“당연한 일입니다. 숨길 이유가 없지요. 제가 모시는 분의 존함은 벨가나님이며 종족은 다크엘프입니다.”
“다크 엘프가 그린스킨의 왕이라고?”
“놀라실 줄 알았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연합의 이름이 그린스킨이 아니었으나 어쩌다 보니 녹색들이 우글거리게 되는 바름에 저희의 지도자이신 벨가나님이 이름을 그린스킨으로 지어주신 겁니다. 다크 엘프, 엘프, 그리고 와일드 엘프도 연합에 속해 있습니다. 다만 모두 녹색 숲을 지키는 이들이니 연합 이름에 그린이 들어간다는 것 자체를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할 수 있지요.”
“뭐…. 엘프들이라면 그럴 수 있지. 있고말고.”
“그럼 계속하겠습니다. 벨가나님은 정식으로 밀크님의 아인 연합과 앞으로의 운명을 함께 할 공동체로서 인정하고 대등한 관계의 동맹을 맡고자 하십니다. 첼슨에서 인간들과 사귀어 영향력을 높여 종극에는 저희가 속한 라온 왕국까지 포함해 아인과 인간이 공존하는 세상을 만들어 서로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 저희 그린 스킨 연합의 최종 목표입니다.”
사실 그린 스킨 연합에 소속된 이들이 대부분 마족의 피가 강하게 발현된 녹색 피부를 가진 이들뿐이라 걱정하고 있었다.
호전적인 성격으로 인간들과 모든 거래를 끊고 자신들 밑으로 들어와 복종하라 뭐 이런 말을 지껄이리라 조금 지레짐작한 경향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제법 신사적이었다. 그리고 인간과의 공존까지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 역시 인간과 공존을 꿈꾸며 이렇게 조금씩 인간을 아인들에게 가르치는 중이지 않은가.
교활하고 자기중심적이지만, 위험할 때는 하나로 뭉쳐 시련을 이겨내는 것이 인간이라는 신비한 생물이었다.
아인을 핍박한다는 이유로 색안경 끼고 바라보는 연합이 아니라 밀크는 안심했다.
다만 이것은 질문하고 싶었다.
“나야 벨가나님과 이런 좋은 뜻의 동맹을 체결한다면 더할 나위 없지 좋지. 그런데 그린 스킨 전체가 이 뜻에 동의하고 있는 거야? 나 역시 내 밑에 있는 모든 아인들이 인간과의 공생을 바란다고 다짐하기 힘들다고. 물론 그런 이들은 내가 설득해 나갈 생각이지만, 그쪽에도 분명 인간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아예 없다고 장담하긴 힘들 거라 보는데?”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솔직히 저 역시 인간하고 순수하게 공존을 하는 것이 어렵다고 봅니다.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전 단지 인간들이 저희를 배척할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공존이 어렵다고 판단한 겁니다. 제 쪽에서 인간을 거부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약간 색안경을 끼고 있다는 느낌은 있지만, 적어도 인간 중에는 비열한 자가 다소 존재하니 그렇게 의심을 하는 것은 나쁘지 않아.”
“대 족장님은 인간에 대하여 잘 알고 계시는군요.”
“아…. 그거야 내가 손을 잡은 건 이 나라의 왕자거든, 그와 함께하다 보니 여러 인간 군상들을 다 만나 보았어. 정말 그렇게 생각 없이 행동하는 자들이 또 있을까 싶었다고.”
“그런 군요. 좋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대 족장님도 이 일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고 전달하면 되겠습니까?”
“그래. 그리고 기회가 되면 한번 만나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다행히 지금 나와 2 왕자, 그리고 1 왕자는 첼슨 왕국을 매국으로 차지한 자칭 중앙 왕당파를 상대로 3자 동맹을 맺고 있어. 프레드릭이 죽기 전까지는 이 동맹이 유지될 테니 가까운 시기에 내가 이밀 공작령을 지나 국경 가까운 곳으로 찾아가겠다고 말을 좀 전해 주겠나?”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건 좀 위험합니다.”
“뭐라고?”
“제가 전달해 드릴 중요한 정보가 하나 더 있습니다. 라온 왕국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라온 왕국은 첼슨 왕국과 동맹 상대고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믿어서는 안 된다고?”
“정확히 말씀드리면 라온 왕국에 신성 왕국 헤베나의 첩자가 숨어 있습니다. 이들이 교묘하게 인간들을 선동하여 아인들을 향한 분노를 일깨워가고 있습니다.”
“라온 왕국도 시끄러운 모양이군.”
“그뿐만 아니라, 같은 사상을 공유하는 프레드릭 첼슨의 요청만 있으면 당장 1 왕자 파의 영지를 공격하겠다는 의사까지 밝히는 중입니다. 물론 모든 귀족이 이에 동참하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점점 1 왕자를 공격하자는 쪽에 사람들이 몰리는 추세입니다.”
“위험하군. 지금까지는 우리가 프레드릭을 중앙으로 몰아 압박하는 형국이었는데 2 왕자 쪽을 신성 왕국이 견제하고 1 왕자 쪽을 라온 왕국이 견제하면 프레드릭이 한숨을 돌리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이 어지러운 정국이 더 길게 이어질 거고 심하면 이대로 첼슨이 세 개로 쪼개져서 합쳐질 때까지 더더욱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될 거야!”
“하여 대 족장님이 1 왕자와 의견을 타진해 라온 왕국을 틈틈이 살피는 것이 좋을 거라 생각됩니다. 당장 그들이 움직임을 보인다면 저희도 한쪽 팔 거들고 지원을 할 의향도 있습니다.”
“인간과 화해하고 싶다 하지 않았나?”
“그 화해와 공존의 대상이 꼭 라온일 필요는 없지요. 저희도 첼슨과 한 배를 탈 수 있게 되면 굳이 라온과 함께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긴. 괜히 문제가 생길 곳과는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좋지. 그런데 어찌 이리 라온 왕국의 일을 소상하게 알고 있는 거지? 거기에 첼슨 왕국의 사정도 소상히 알고 있군.”
“다크엘프들은 내로라하는 첩자입니다. 잠입 후에 신속하고 민첩한 움직임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서큐버스 분들도 그분들의 은밀하고 재빠른 기동력에는 한 수 접어줘야 할 테죠.”
“다크엘프들이 그렇게 유능하단 말이로군. 알아서 궁금한 것은 모두 풀었군. 혹시 자네도 나에게 궁금한 건 없어?”
“실은…. 아까부터 느껴지는 이 신성하고 맑은 기운이 궁금하던 차였습니다.”
“다른 아인들은 크게 느끼지 못하는데 넌 특별한 점이 참 많은 거 같아. 이건 잊힌 옛 여신 베라밀프님의 성스러운 기운이 도시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현상이야.”
“아아! 그렇군요. 어쩐지 정순하고 저희 아인들을 위해 자애로운 기운이 퍼지고 있다 했습니다. 옛 고대의 여신님이라니, 밀크님은 그저 아인들만 하나로 모은 대 족장이 아니시군요.”
“혹시 그쪽도?”
“아닙니다…. 저희는 옛 고대의 신을 깨우거나 그에 비등한 무언가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희 마족의 피가 강한 반 아인들의 신들은 모두 마계의 신들입니다. 이름을 안다고, 모습을 안다고, 또 기리고 싶다고 함부로 동상을 지을 수 없죠. 그분들은 인간계를 침공한 어찌보면 악의 무리입니다. 그런 분들을 함부로 모셨다간 다시 마족의 피가 충동질하여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갈지도 모를 일입니다.”
“음…. 그런 문제가 있었군.”
파파도와 밀크는 그 이후에도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파파도는 고블린이지만, 절대 무시할 수 없는 특수한 존재인 현자 고블린이다.
그는 현자라는 특수한 칭호를 가진 만큼 아는 것이 참 많았다.
현자는 과거에서부터 세습되어 오는 도서관과 같은 능력이다.
선조가 정리한 것이 모두 후대에 계승되어 가는 이른바 말 그대로 과거의 유산이 모두 담긴 도서관이다.
대대로 지혜로운 자에게 종족을 따지지 않고 계승이 되는데 이번 대의 현자가 바로 파파도였다.
“현자의 지식은 분명 위대하고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합니다. 하지만 너무 과거의 유산에만 집착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지요. 하여 중요한 일이 아니면 과거의 기억들이 유실되지 않게 보호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잘 들여다보진 않습니다.”
밀크와 말이 잘 통하는 것이 기쁜 것인지 그는 자신의 현자라는 특수한 직업에 대한 것을 밀크에게 많이 알려주었다.
그리고 과거의 지식 일부를 꺼내 밀크에게 공유도 해주었으니 그것은 잊힌 옛 신들에 대한 정보였다.
“홀스타우로스와 미노타우로스의 신이 있듯이 다른 아인들에게도 신이 있습니다. 고요한 숲을 다스리는 엘프들의 어머니가 하나요. 산의 아인들을 다스리는 하피와 버드맨의 아버지가 또 하나입니다. 대지를 다스리는 코볼트와 켄타우로스의 아버지가 또 하나입니다. 다만 이름이 소실되어 저 역시 그분들의 진명을 알 수 없고 모습도 아주 적은 자료만이 남아 있습니다.”
“옛 신들이 더 있다는 정보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걸 알려줬다고. 베라밀프님과 연결이 된다면 내가 그 신들에 관한 내용을 한 번 물어볼게.”
“다른 건 몰라도 엘프들을 다스리는 어머니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모시고 싶습니다. 물론 제 뜻도 있지만, 제가 모시는 분을 위한 일이기도 하니까요.”
“다크엘프이며 그린 스킨의 왕. 벨가도를 위해 말이지?”
“예. 부디 베라밀프님과 연결이 된다면 꼭 부탁 드리겠습니다.”
자신이 섬기는 존재를 위하는 그의 모습은 밀크의 마음에 쏙 들었다.
첫인상이 날카로웠던 고블린은 이제 없었다. 지혜로운 현명한 현자 파파도만이 앞에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