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161화 변화의 바람
편지의 내용에는 인사도 없었고 바로 내용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밀크가 지금 그들에게 얼마나 실망하고 있는지를 나타내고 있는 거 같아 톨메오의 마음이 편치 못했다.
“왕자님…. 어떤 내용입니까?”
시시각각 나빠지는 왕자의 표정을 보며 리그릿이 묻자 왕자는 말 없이 이마를 감싸면서 그 편지를 리그릿에게 내밀었다.
“모두에게 읽어 주게. 난 머리가 아파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겠네.”
“예…. 왕자님.”
리그릿은 인사말도 없이 시작된 편지의 내용에 놀라 편지를 다시 한번 보고는 왜 왕자의 머리가 아픈지 대충 이해했다.
내용 하나하나에 밀크의 지금 실망한 심정이 구구절절 담겨 있었다.
“작슨 자작에게 들은 현시점의 2 왕자 파의 제재 내용은 잘 들었다. 그에 따라 아인 연합 역시 2 왕자 파의행동으로 야기될 일을 이렇게 적어 보낸다. 첫째. 에스타 상단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여할 경우. 그에 따라 2 왕자 세력에 보내던 후원금을 동결시킨다.”
“감히!!!”
“조용하고 들으시오!!!”
머리를 숙인 왕자의 외침에 발끈하려던 카프리온이 깜짝 놀라 왕자를 보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왕자가 조용히 눈동자만 움직여 그를노려보는 것을 확인하고는 주눅 들어 자리에 앉았다.
“흠흠…. 에스타 상단이 유통하는 물품을 함부로 금지 품목으로 지정할 경우 이후 금지 품목으로 지정된 모든 물품은 금지가 풀려도 2 왕자 세력 내부의 에스타 상단 지부에서 유통하지 않는다. 에스타 상단 인원을 함부로 억류하거나 아인이라는 이유로 배척하면 2 왕자 세력이 보내는 그 어떠한 사신도신도시 렘톤에 발을 들일 수 없다. 만약 에스타 상단에 대한 공격적인 행동이 보이면 즉각 상행을 중지하고 모든 에스타 상단 지부를 철거한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경고를 보내는 이유는 아직 2 왕자 파가 우리와 함께할 수 있다는 일말의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경고를 무시한 경우 일어난 그 어떠한 일에도 우리 아인 연합은 책임지지 않을 생각이니 잘 처신하기 바란다.”
좌중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미세하게 움직이는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고요를 깨고 먼저 움직인 것은 카프리온의 옆에 붙은 깔끔한 인상의 남자 바온 백작이었다.
“보셨습니까? 우릴 협박하고 있습니다. 동맹이라는 자가 말입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먼저 배신행위를 한자가 이렇게 당당하게 나오다니 정말이지 어이가 없습니다.”
“어이가 없는 건 밀크 대 족장일 겁니다. 그간 우리를 위해 열심히 노력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는데 고작 이익을 위해 상단 지부를 설치한 것 가지고 이렇게 물어뜯으니 말입니다.”
“말에 뼈가 있군요. 작슨 자작?”
“뼈만 있겠습니까? 속에서 열불이 나는 것을 겨우 참고 있는데 눈치도 참 없으십니다?”
“비꼬는 꼴 하고는…. 역시 반은 아인이라 끼리끼리 노는 겁니까? 밀크 대 족장의 일이 자신 일인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입을 조심하시지! 당신 멱살이라고 내가 못 잡을 거 같나!!!”
“흥 배워먹지 못한 아인 같으니. 이래서 아인에게 호의를 베풀면 안 되는 겁니다. 아인 멸시 사상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것이 예로부터 내려오는 진리죠. 아인은 베풀면 은혜 따위 잊어버리는 종족이니 말입니다.”
“공작”
“와, 왕자님?”
“저 자식 입 다물게 해. 안 그러면 내가 직접 입을 다물게 할 거니까.”
“헉!”
흉흉하기 그지없는 왕자의 표정에 카프리온 공작은 또다시 놀라, 바온 백작은 자제시켰다.
못마땅한 표정을 한 바온은 자리에 앉았고 작슨 자작은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겨우 참으며 리그릿의 옆에 앉았다.
“난 화내는 것을 싫어했지. 그런데 요즘 들어 화를 내지 않으면 상황이 악화만 된다는 것을 깨달았어. 사람 좋게 대해주면 언젠가 그들도 내 뜻을 깨달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니었지.”
“와, 왕자님!”
“그 무슨….”
왕자의 파격적인 발언에 카프리온이나 리그릿 할 거 없이 모든 귀족들이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예의 싸늘한 눈초리를 한 왕자가 검을 뽑아 자신 앞의 탁자 중앙으로 꽂아 넣었다.
쾅!!!
쩌적!!!
큰 소리와 함께 원목으로 된 그 탁자의 중앙에서부터 금이 가더니 자리에 앉은 사람들 앞으로 점점 나아가 한 명의 하나 정도의 금이 이어졌다.
다시 조용해진 좌중으로 톨메오가 탁자 위로 올라갔다.
희미하게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 기분이었다.
프레드릭은 정변을 일으키고 왕자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의품에 야망은 있었지만, 외세의 힘을 끌어들여서 지지기반을 많이 잃어버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인들을 향한 폭거와 왕권이라는 허황한 감투만 믿고 일을 진행하여 대부분의 일이 실패를 하고 있다.
루크렌은 주변 인물들을 믿는 법을 배웠다. 아직 그의 잘난척과 잔인한 성격은 그대로였지만, 주변 인물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그를 통해 행동도 고치는 등 점점 왕의 품격을 갖추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톨메오는 사람 좋던 그의 성격이 이권 싸움으로 가득한 자신의 세력을 보면서 점점 변하였다.
사람을 믿는 성격은 그대로였다. 그리고 밀크와 협력을 했던 과거의 일 덕분에 밀크에 대한 의심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 대신 주변 사람들을 한 번씩 의심해 보는 성격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요즘 톨메오는 자신이 먹는 밥도 시중드는 시녀나 하인이 먹어본 뒤에야 식사할 정도로 조금씩 의심병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울화와 의심이 쌓이고 쌓여 드디어 그는 폭발했다.
“공작.”
“와, 왕자님?!”
“죽고 싶은가?”
“그, 그게 무슨….”
“내가 과거에 뭐라 했지? 한 번만 더 그 공작이라는 허울 좋은 감투를 내 새웠다간 제명에 죽지 못할 거라 하지 않았나?”
“그, 그건….”
마이올 자작의 일을 들먹이는 톨메오의 모습에 카프리온은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리며 벌벌 떨었다.
“바온 백작.”
“예…. 왕자님.”
“후원금으로 부족한가?”
“그,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사람을 마냥 믿기만 해주니까 아예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려 하는가?”
왕자는 탁자 위에서 품에 손을 넣더니 서류를 왕창 꺼내 바온의 얼굴에 집어 던졌다.
치욕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바온은 움직일수 없었다. 분노한 톨메오의 얼굴이 너무나 가까웠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리그릿이 나에게 전해줬던 내용이다. 너희들이 조용히 뒷주머니를 차고 있던 내용이지. 이멍청한 작자들아. 걸리지 않게 하면 그냥 넘어가기라도 하지. 왜 이렇게 증거들은 남겨두는 건가!!! 내가 봐주면 봐줄 때 적당히 하고 그만두리라 믿었다. 그런데 이게 뭐냔 말이야!!! 내가 용서해 줄 수도 없는 상태까지 한도 끝도 없이 해 처먹으면 어쩌라는 말이야 이 멍청한 놈들아!!!”
가장 위에는 바온 남자의 내용이 적혀 있어 떨어진 서류를 보지 않아도 바온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간 해 먹은 것이 많은 사람은 자신이 해먹은 양에 따라 피부색이 형형색색 변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는 톨메오가 낄낄거리며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는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앉아서 주변 귀족들과 흉흉한 눈길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모두가 카프리온을 따라 목을 움츠렸다. 지금 고개를 들었다간 그야말로 제명에 죽지 못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똥 묻은 놈들이 겨 묻은 자에게 뭐라 하는가? 참 재미있군. 카프리온.”
“예! 왕자님!!!”
“다른 사람은 다 눈감아 주지. 하지만, 모든 것을 주관하고 네놈까지 뒤에서 조종한 자식은 이 일에 연루된 모든 자의 죄를 대표로 묻겠다.”
“무, 무슨….”
“작슨”
“예. 왕자님.”
“바온 백작을 배신의 죄를 물어 즉결처형해라. 형장은 이곳이다.”
“왕자님?!”
작슨이 그대로 움직일 기세를 보이자. 리그릿이 그를 만류했고 깜짝 놀란 바온이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왕국 귀족을 이리 함부로 죽이는 일은 없습니다!!!”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그랬겠지. 그런데 지금은 어지러운 형국이야. 너 같은 자식을 계속 곁에 두면 위험한 것은 나와 날 따르는 모든 귀족 전부다. 뭣 하는가 작슨. 시행해라.”
“으아악!!!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다고! 놔라! 이놈 자작 주제에 감….”
촥!
살기 위해 발버둥 치던 바온 백작의 목이 떨어졌다. 화를 참고 있던 작슨은 리그릿의 만류도 듣지 않고 그의 목을 베어 버렸다.
톨메오의 명이 있었으니 작슨에게는 죄가 없다. 피가 흐르는 목 없는 시체를 본 모든 귀족이 얼어 묻고 말았다.
“잘 들어라.”
침을 넘기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가운데 톨메오의 목소리만 좌중에 울렸다.
“앞으로도 난 너희를 믿어줄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말한 그가 탁자에서 내려가 소리를 지르던 그대로 굳어버린 죽은 바온 자작의 목을 들고 다시 탁자에 올라와 그것을 중앙에 두고는 탁자에 박아두었던 검으로 그것을 찍어 내렸다.
“동시에 의심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의심에 걸려 죄가 낱낱이 밝혀지는 자는 이리 죄에 합당한 벌을 즉결처분으로 내릴 것이다.”
“….”
“….”
“….”
“….”
“지금까지 난 너희를 많이 봐주었다. 내 믿음을 아무리 배신해도 다독이고 또 다독이며 데리고 왔지. 그러니 너희는 지금까지 내가 믿음을 주었던 만큼 보상해야 한다. 내 믿음은 이제 봐줌이 없다. 그러니 실수한 뒤에 후회하지 마라. 너희는 지금까지 충분히 실수했고이젠 결과를 보여야 할 때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왕자님!!!”
귀족들은 앞다투어 소리쳤다. 그에게 충성을 다 하기 위한 울림이 회의장에 가득했다.
그들의 충성 경쟁을 본 톨메오는 천천히 탁자에 내려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의 표정은 아까의 그 악귀나찰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편안하고 사람 좋은 미소를 취하고 있었다.
“딱딱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네. 자 다시 힘을 내서 우리의 길을 가보도록 하지. 바온은 비록 죄는 지었으나 장사는 지낼 수 있게 일족에게 보내주도록. 그리고 밀크 대 족장과의 관계는 우리에게 꼭 필요하니 앞으로 그와의 관계를 흔드는 행위는 절대 하지 말도록하게 회의는 이걸로 끝내도록 하지. 작슨 미안하지만 한 번 더 아인 연합의 도시 렘톤에 다녀오도록, 내 뜻을 전달하고 밀크 대 족장의 섭섭함을 대신 달래주고 오게.”
“예 왕자님.”
여기까지 말한 톨메오는 검을 회수했다. 검에서는 아직 피가 흐르고 있었으나 그는 전혀 상관치 않고 그것을 들고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이렇게 어지러운 정국에 불어온 변화의 바람은 지도자들에게 거대한 충격을 선사하며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밀크는 인간들과의 관계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움직여 아인 연합을 위해 움직이는 좀 더 계산적이고 인간적인 성격으로
루크렌은 과거의 적도 아군으로 만들수 있고 적의 적과도 손을 잡을 수 있는 포용을
톨메오는 한없는 믿음이 아닌 휘하를 확실히휘어잡을 수 있는 의심과 냉정함을
마지막으로 프레드릭은 시작은 좋았으나 그 끝은 야망과 욕망만 남아 있는 희대의 암군으로 변화했다.
그 후, 예정대로 에스타 상단은 1 왕자 세력권에 에스타 상단 지부를 설치했고 1 왕자는 자신들의 세력권에 사는 아인 중 이주를 원하는 자, 그리고 프레드릭의 세력권에서 구출한 아인을 모두 렘톤을 향해 안전하게 이송했다.
2 왕자 측은 카프리온과 리그릿의 두 파로 갈라진 것을 봉합하여 모두 한뜻이 되어톨메오를 위해 움직였다.
밀크와의 관계 향상은 리그릿이 담당했고 성국과 중앙 왕도 파의 도발에서 2 왕자 파가 이익을 취할 수 있게 갖은 수법을 동원하여 주변을 흔들기 시작했다.
밀크는 상황을 보면서 아인들을 규합하고 프레드릭이 역류한 아인들의 신변을 보호하거나 새로운 것을 개발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행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밀크의 아인 연합에는 몸이 적갈색에 가까운 피부를 가진 근육질의 종족과 또 다른 늘씬하고 키가 큰 종족이 당도하였다.
릴 산맥을 넘어 밀크에게 합류한 이 세력중 하나는 성국의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서 그들의 맹공에도 꾸준히 버티며 그 위세를 떨치던 오크종족이었다.
마족의 피가 섞인 반 아인임에도 호전적인 성격, 그리고 전투에 이골이 난 그들은 성국과의 전투에서도 명예롭게 전사할지언정 뒤로 물러섬 없이 싸우던 이들이다.
하지만 계속되는 성국의 공격에 부족이 괴멸 직전의 타격을 입은 뒤 하피 퀸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당도한 것이다.
한때 천 명이 넘어가던 대 부족은 이제 겨우 이백이 될까 말까 한 처참하게 적어진 인원으로 철저하게 당한 슬픔을 딛고 겨우겨우 렘톤에 당도했다.
그들의 지도자인…. 아니 죽은 지도자의하나뿐인 전쟁 달 부족의 딸 유클리나는 전투로 파괴된 갑옷도 손보지 못한 상태로 다급하게 밀크의 앞에 처절한 약자의 모습을 보이며 부복했다.
“패장…. 유클리나와 전쟁 달 부족이 위대한 대 족장이신 밀크님께 의탁을 청합니다. 부디 저희를 가엽게 여기시어 받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강함을 명예롭게 그리고 전투를 명예를 드높이는 것이라 여기는 호전적인 오크들이 보일 행동이 절대 아니었지만, 부족이 괴멸적인 피해를 본 지금 그들에게 남은 희망은 이곳이 전부였다.
하피퀸 바토리의 첨언도 있었고 밀크 대족장은 이미 아인들 사이에서 자애롭고 이상적인 지도자이며 잊힌 옛 신의 가호를 받았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유클리나의 그런 모습을 본 밀크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는 부복해 있는 또 한 명의 아인 여성을 향해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