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8화 〉158화 협상인가 협박인가. (158/177)



〈 158화 〉158화 협상인가 협박인가.
“친애하는 아인 연합의 수장이자  첼슨 왕국의 후작가의 안주인인 밀크 공에게 전한다. 본인은 대 첼슨 왕국의 국왕으로서 자국 영토의  축을 차지하고 있는 그대에게 왕국 정통한 귀족가의 한 축으로 인정을 하며 준남작에 봉하는 바이다. 하여 앞으로 왕국의 일원이 된바, 자국 번영을 위해 힘써주길 바란다.”

여기까지 읽은 길버트는 등으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그러면서 당장이라도  편지를 찢어발기고 싶은 기분을 겨우겨우 참아냈다.
그야말로 사자에게 목을 두고 오라고 하는 듯한 내용만이 이어지고 있으니 오죽할까.
아직 편지의 내용이 4분의 3이나 남아 있어서 더 미칠 지경이었다.

“계속하시죠 자작님. 괜찮습니다.”

“아….  그, 그리 하지요. 에…. 아울러 얼마 전에 있던 에멜튼에서 일어난 작은 소동은 불문에 부치며 밀크 준 남작은 앞으로 아래와 같은 내용을 지켜주길 바란다. 첫째, 왕국의 일에 솔선수범 나서며 절대 거스르지 않는다. 둘째, 아인들의 관리를 밀크 준 남작에게 일임하니 대신 아인들이 생산하는 모든 부산물의 50%를 왕도에 납품한다. 셋째, 제니리스 후작가와 왕가의 사이를 중간에서 조율한다. 넷째 공식적으로 프레드릭 첼슨을 주군으로 인정한다. 다섯째 제니리스 후작의 데릴사위 겸 남편으로 프레드릭 첼슨을 추천한다.”

부들부들

이 공간에서 떨고 있는 것은 글을 읽고 있는 길버트 뿐이었다.

‘이건 미친 짓이야. 왕가는 미친 짓을 하고 있어. 당장 이따위 글은 찢어버려야 해!’

 내용은 그나마 읽어줄 만했는데 아래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믿을 수 없는 내용이 이어졌다.
데릴사위는 그 권력은 없지만, 후작의 사위라는 보이지 않는 권력이 존재한다.
당당한 왕국의 귀족으로 인정되는 준 남작의 작위는 있으나 마나 한 작위지만, 일단 후작가데릴사위가 준 남작이라도 되면 보이지 않는 권력을 사용하기 훨씬 쉬워진다.
그래서 밀크에게 준 남작에 봉한 것은 길버트로서도 왕국이 적당히 생색을 냈다 생각하며 조용히 넘어갔다.
하지만…. 고통받고 핍박을 받던 아인들을 구출한 아인 연합을 향해 마치 너그럽게 용서해 준다는 듯 말하는 본새나 점점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야욕이 보이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급기야 마지막에 와서 조율, 인정, 그리고 추천  구절을 읽은 뒤에는 당장이라도 목이 떨어질지 몰라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계속, 계속해도 좋아요.”

“하…. 하하….”

웃고 있다. 하지만 전혀 웃는 거 같지 않았다.
사자로 온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왜 계속 읽다가 중단하냐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이스텐의 눈초리도 문제였다.
하는 수 없이 그는 글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여섯째…. 왕가의 명예와 후작가의 명예를 생각하여 밀크 준 남작은 프레드릭 국왕의 동생, 즉 후작가의 두 번째 데릴사위로 항렬을 내리고 첫 번째 위치에 프레드릭 국왕을 올린다. 일곱째, 첫 번째 데릴사위가 되는 프레드릭 국왕의 허락 없이는 제니리스 후작과의 동침을 불허한다. 그리고 여덟 번째 2 왕자와의 관계를 정리한다. 마지막으로 협상안에 동의하면 밀크 준 남작을 따르는 아인에 한하여 5등급 시민으로 인정하고 밀크 준 남작은 4등급 시민으로 인정하여 나라에서 혜택을 주고 필요한 물품을 최대한 지원한다.”

마지막 내용까지 다 읽은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었던 일들을 하나씩 회상해 나아갔다.
그가 어린 시절 사랑하던 여인과 달밤의 밀회를 즐기는 것까지 회상했을 때 밀크가 그를 불렀다.

“끝인가요?”

“그, 그렇습니다….”

“네 잘 들었습니다. 나가는 길은 아시죠?”

“네?”

“왔던 길로 그대로 나가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 방을 나가는 즉시 사신단을 다시 이끌고 왕도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사, 살려 주시는 겁니까?!”

“편지를 전달한 사자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아무튼, 이 내용에 단 하나도 동의할 수 없으니 이대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국왕 전하께는 이 밀크가 자세히 검토하고 나중에 대답하겠다고 답을 했다 전달해 주시지요.”

십년감수 한 길버트는 그 자리에 주르륵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길버트는  족장의 관저에서 빠져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딱 봐도 다른 이유로 부들부들하고 있는 이스텐 백작의 모습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감히  첼슨 왕국의 국왕 전하께서 보낸 친선 협약을 무시하는 겁니까!”

“일단 나는 왕국 국민은 아니지만, 그쪽이 국왕이라 자칭하니 국왕으로 예의 갖춰서 대해 주었고 협약인지 협박인지 모를 내용도 참고 다 들어 주었는데 무시라고 하면 좀 섭섭합니다. 백작.”

“왕국의 영토를 차지하고 이렇게 개발을 했으며 후작가의 데릴사위인데 어찌 왕국 국민이 아니란 말이오! 그렇다면 이 렘톤을 당장 반납하고 다시 산으로 돌아가시구려! 그렇게 하시면 당신이 왕국 국민이 아니라  말을 내 전하께 전달하겠소.”

“이 영토는 과거 1 왕자의 잘못된 선택으로 철저히 파괴된 것을 2 왕자 파가 나에게 저지른 잘못(에스타 상단의 물품을 강제로 거둬 드린 것.)을 사죄하기 위해 할양해준 정당한 나의 영토입니다. 그러니 불만이 있으면 2 왕자와 상의 하시고,  한 후작가의 데릴사위라 하여도 나에겐  어떠한 권력이 없고 있다 해도 그걸 휘두를 생각도 없으니 왕국 국민이라는 울타리를 나에게 치지 말아 주십시오.”

“하, 하지만 2 왕자 측은반란 세력입니다. 감히 지금 반란의 세력이 할양한 영토를 자기 것이라 인정하는 것이오!”

“반란인지 뭔지 난 그런 것은  모릅니다. 인간들의 일은 인간들의 일이지요. 무식한 아인에게 인간들 권력 다툼까지 계산해서 행동하라는 수준 높은 기대는 하지 마시길.”

“이익!!! 이 일에 대한 대가가 따를 것이오! 그래도 좋습니까!!!”

“대가…. 대가라…. 후방이 근질근질하고 싶으면 뭔 일을 못 할까.”

“무엇이!!!”

“1 왕자, 2 왕자, 그리고 제니리스 후작가, 적어도  아내는 현명하니까 외세의 침공이 있을지도 모를 상황은 만들지 않을 테지만, 1 왕자와 2 왕자는 다르지. 프레드릭 첼슨 국왕이 렘톤을 공격하려고 온다면 빈 곳을옳다구나 공격해 들어올 사람이 둘이나 되는데 생각대로 움직일 수 있을까? 궁금하긴 하군.”

“크…. 읏….”

“사자를 죽이지 않고 온전히 되돌려 보내는 것으로  인내심과 아량은 보여 준거라 판단하겠어. 자 돌아가도록 해. 제아무리 내가 착하다 해도 대놓고 아내를 빼앗아 가겠다는 수괴를 따르는 수하들에게까지  아량을 보여주긴 힘드니까 오늘 당장 떠나도록 해.”

사신이 오면 하루, 또는 이틀 정도는 극진히 대접하고 떠나 보내는 것인 예의였다.
당장 떠나라고 하는 밀크의 행동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긴 했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사자의 목숨은 파리목숨보다 못하다. 큰 나라에서 작은 나라로 보내는 사자라면 그 목숨을 거두기 힘들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과는 몹시 달랐다.
상대는 인간들의 권력과 권위가 통하지 않는 아인들이었다.
그런 아인들의 지배자를 욕보이는 문서를 읽었는데 사신을 살려준 것이다.
지금은  아량에  둘 바를 모를 고마움을 느끼고 조용히 돌아가야 할 상황이다.
길버트는 살  있는 동아줄이 내려옴을 느끼고는 바로 이스텐의 옆으로 달라붙었다.

“그만 돌아가야 합니다.”

“아니 되네! 이 일을 성사시켜야 해!”

“우리가 저들에게 제시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이 이렇게 구구절절 바라는 것만 적어 보낸 협상안으로 무슨 친선 협의를 한단 말입니까.”

“이런 경우 아인이 인간에게 조금 굽히고 들어오는 것이 인지상정이지. 아무리 후작 가의 데릴사위라도 그가 아인인 것은 변하지 않아.”

“아예  단추부터 틀려먹었습니다. 상대가 아인이라 쉽게 여긴 것도 문제고 왕국의 사정으로 이들에게 지원이 가능한 물품이 없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우린 지금 협상을 이어나갈 패가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대로는 계속하면 펼쳐질 일은 추하게 끌려나가거나 눈앞의 대 족장을 자극해 목이 달아나는 것밖에 없습니다.”

“헉…. 그 그렇게 되면 이 아인놈들은 무도한 죄를 물어 왕국의 공격을 받을 것이라네!”

국왕인 프레드릭을 믿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 전에 지금의 상황을 잘 이해해야 했다.
길버트가 아무리 뇌를 굴려 보아도 작금의 상황상 밀크의 말마따나 프레드릭이 군을 움직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죽어 나가도 전하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것을 이용해 아인들의 잔인함을 선전하는 용도로 쓰긴 하겠죠. 그렇게 되면 개죽음당하는 우리의 노력은 누가 뭐로 보상을 해준답니까?”

“그, 그럴 리가….”

“정 계속하시려거든 죄송한 말씀이지만, 혼자 하시지요.”

“자네! 자작 주제에 지금 백작인 내 말을 거역하겠다는 건가?!”

“여기서 죽을 것이 뻔한데 지금 백작님의 말을 거역  하게 생겼습니까? 지금까지는 내가 참고 넘어가면별 충돌 없이 원만하게 해결되니 참았던 겁니다. 하지만 지금 목숨이 풍전등화인데 제가 참으리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 이 일은 내 왕도에 도착하면….”

“하…. 국왕 폐하께 고하든 제 직속 상관이신 반돌프 공작님께 고하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일이 하극상으로 고해져 경질당하는 한이 있어도 일단 살고 봐야겠습니다.”

귀족 간의 상하 관계도 이승에 살아 있어야 이루어지는 것이지 않은가.
현실적인 길버트의 말에 이스텐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여기에 쐐기를 박는 기사 버크의 말이 이어졌다.

“백작님, 다른 수행원들과 사신단 귀족들의 생명이 백작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들의 목숨까지 걸고 도박을 하시려는 겁니까?”

“끄응….”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아니 개처럼 소리를 낸 이스텐, 평소라면 당연히 그러리라 대답하였겠지만, 아쉽게도 사신단에는 프레드릭을 따라 혁명을 성공시킨 공신들이 있었다.
그들의 목숨을 걸고서까지 자존심을 세울 수는 없는 일이라 그는 하는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상의는 다 끝났습니까?”

“아! 예  족장님…. 이런 서신을 전달하게 되어 유감입니다. 다소 오해의 소지가 많이 있는 거 같으니 나중에 다시 찾아뵙고  일에 대해 해명토록 하겠습니다.”

“오해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순박한 아인이라도  번이나 같은 모욕을 당하면 아량을 베풀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전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돌아들 가시죠.”

“예…. 다시 한번 목숨을 보전해 주신 점 감사 인사드리지요.”

인사를 마친 길버트는 버크와 합세하여 멍하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스텐을 잡아끌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쉬고 있던 사신단 일행을 다독여 출발 준비를 끝낸  바로 왕도를 향해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렘톤의 성문을 넘는  순간까지 그들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묘한 살기 때문에 식은땀을 흘려야 했으며 마치 쫓겨나듯 그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밀크가 아량을 베풀지라도  아래에 그를 따르는 아인들의 아량까지는 기대하기 어려웠으니 빠르게 빠져나가는 것이 정답이었다.

“굴욕이군…. 첼슨 왕국의 굴욕이야! 아인 따위에게 이런 굴욕을 당하다니!!!”

신도시 렘톤을 빠져나온 뒤부터 이스텐의 입이 열리더니 점점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버크, 그리고 길버트는 그가 소리를 지르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앞으로의 혼란스러울 정세를 미리 예감한 듯한 숨을 길게 늘어 쉴 뿐이었다.
혼자 분노의 고함을 지르던 이스텐이 얼마  가 마차 안에서 잠들자 길버트는 조용히 버크를 불렀다.
그리고는 가슴속에 숨겨둔 은밀한 이야기를 그와 나누었다.

“혹시 날 따라 중립 귀족으로 전향할 생각 없는가?”

“마침 저와 의견이 맞으셨습니다. 돌아가면 분명 경질될 테니 어딘가 중립 귀족 집안에 몸을 의탁할생각이었는데 자작님이라면 저야 영광이죠.”

“보통 아인들이 아니었어. 내가 문헌으로 접하던,또 눈으로 보아오던 그저 그런 아인들이 아니야, 인간의 문명을 자연스레 흡수함은 물론 인간보다 나은 것으로 만들었어. 아인 따위라고 무시하는 이런 자들과 함께 하는 것은 정말 위험한 선택이야.”

“모르긴 몰라도 군사력만큼은 저희가 압도당할 수준입니다. 성국의 동맹세력이 없으면 저들을 상대할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드는군요.”

“성국의 성기사들은 마족의 피가 흐르는 반 아인에겐 큰 힘을 발휘하지만, 아까 본 홀스타우로스나 미노타우로스 같은 아인에게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없네. 아군의 힘이나 속도를 올리는 신성 마법으로 보조를 해  수는 있지만, 그들의 신성 마법의 힘은 반절 이하로 떨어지니 결국 힘의 차이가 좁혀지지 않을 걸세.”

“더더욱 왕도 귀족 세력과 프레드릭 전하와는 반대 노선을 타야 한다는 것이 확실시되는군요.”

그렇게 한 명의 귀족과 한 명의 기사는 이번 일로 인해 벌어질 경질을 대비하여 미리 미래의 일을 의논하였다.
얼마 후 왕도에서는 기사 한 명과 귀족 한 명이 경질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경질된 두 사람의 표정은 꽤 후련해 보였다.
왕도를 빠져나온  사람이 말을 타고 향한 곳은 왕도의 북쪽 최전선인 제니리스 후작령이었다.
적어도 아인을 차별하지 않고 왕도군을 적대하고 있다면 분명 자신들을 받아 주리라, 중립 귀족, 그리고 그런 귀족을 따르는 기사가 된다면 앞으로 일어날 불안한 정세 속에서 목숨을 구하고 가문을 보존하리라.
결과적으로 길버트와 버크의 선택은 그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둘 정도로 중요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성공적이라 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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