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화 〉154화, 아인 구출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그녀를 보지 못한 세월이 말이다.
프레드릭의 눈에 비친 그녀의 당당한 미소와 눈이 부실듯한 미모는 여전했다.
그러나 뭔가가 달랐다. 프레드릭의 눈이 이질적인 무언가를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점점 떨려오기 시작하는 프레드릭의 몸, 눈에서 마치 피눈물이라도 흘릴듯한 인상을 쓰고는 그녀의 배, 불룩 튀어나온 배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누구 하나 그에게 선뜻 말을 걸 수가 없을 정도로 주변 분위기가 삽시간에 식어버렸고 기운차게 소리치던 병사들의 함성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미레뉴는 그런 분위기에서도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여 성문 아래에 모인 왕도의 반군에게 소리쳤다.
“여긴 위험한 국경이고 내가 책임지는 직할 영지인데 어찌 4 왕자님은 이리 친히 군을 이끌고 오셨는가?”
“이이!!! 네 이년!!!”
그에 화를 참지 못한 남자가 다시 앞으로 나섰다. 렌딜과 드잡이를 하던 코르도프였다.
그는 상대가 후작, 즉 자신보다 높은위치에 있다는 것도 서슴지 않고 강하게 나가기 시작했다.
“감히 이분이 누군 줄 알고 하대를 하는 것이냐! 이젠 네년이 우러러보아야 할 존재인 대 첼슨 왕국의 국왕 전하이신 프레드릭 첼슨 전하시다! 당장 성루에서 내려와 제대로 예를 표하지 못할까!!!”
“아…. 그랬나? 요즘 외부의 일은 아랫것들에게 맡겨 두었더니 소식이 좀 늦었나 보군, 근데 넌 뭐지?”
“뭐, 뭐야?!”
“대 첼슨 왕국의 후작인 나 미레뉴 제니리스에게 소리 높여 이년 저년이라 소리치는 네놈은 뭐냐고 물었다.”
“큭! 작위를 따지자는 이야기가 아니오. 내 흥분해서 말이 좀 심한 감이 있었지만, 국왕 폐하를 대하는 후작의 태도가 이리도 무엄하니 나라도 나서야 하지 않겠소이까!!!”
확실히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자신도 잘못을 저지른 것이니 코르도프는 한발 뒤로 물러나며 후작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후작은 왕국의 모든 검사에게 존경을 받는 왕국 최고의 검사다.
여기서 있던 일이 잘못 와전되어 소문이 나면 프레드릭을 따르는 것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수많은 불이익들이 펼쳐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기세 좋게 나섰지만, 기세를 가져오지 못한 코르도프는 서릿발이 느껴지는 프레드릭의 눈빛을 받고는 비 맞은 개 꼴이 돠어 축 늘어진 채 뒤로 물러나야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미레뉴가 코웃음을 치며 웃으니 존재감을 뒤로하고 그녀의 미모 덕분에 주변이 환기되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나에게 충성이 지나친 나머지 무례를 범했군. 후작이 너그러이 용서하시게.”
“전하의 명령이니 어찌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그리 하지요.”
“날 전하라 불러주다니 영광이군. 그럼 대 첼슨의 왕으로서 명하지. 성문을 열고 날 받아들여 주겠는가?”
“이를 말입니까. 당연히 따라야죠. 하지만, 병력은 모두 무장 해제 그리고 외부에 숙영지를 건설할 것. 전하를 따를 시종과 몇몇 귀족을 데리고 성문으로 입장해 주시면 됩니다.”
“뭣이!!! 감히 폐하의 안전을 위해 같이 온 우리를 배척하는 것인가! 무슨 흉계를 부릴줄 알고 병사들을 밖에 주둔시킨다는 말인가! 당치 않은 말이다!”
“흠…. 이상하군. 지금까지 역대 국왕 전하께서는 모두 이 같은 관문의 요구를 따른 전례가 있는데 어찌 그리 역정을 내는 것인가 코르도프 백작.”
“그, 그건…….”
“한 나라의 국왕이 되었으면서 휘하에 거느리고자 하는 귀족 하나 믿지 못한다는 말인가? 그런 속이 좁은 남자가 이 나라의 왕이 되었다? 이거 참 실망이 큰걸?”
끼이이이!!!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대한 성문이 지금까지 국경을 지켜온 나름의 관록을 보이듯 우렁찬 기지개와 함께 열렸다.
알아서 들어오라 문을 열어준 상황, 그러나 그 누구도 저 열린 성문을 향해 자신 있게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젠 아예 성루에 있는 난간에 걸터앉아 버린 미레뉴, 그녀의 변화를 느낀 건지 열심히 태동 아이들을 진정시키며 다시 프레드릭을 향해 도발했다.
“들어와라. 애송아. 그럴 용기가 있다면 말이다.”
“크읏….”
왕 대우는 그저 그녀의 조롱에 불과했다. 그녀의 안에서 프레드릭은 예전도, 지금도 애송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는 지금 깨달았다.
“이 나를…. 조금만 더 기다려 줄 수 없었는가?”
“난 충분한 기회를 주었다 생각하는데? 물론 왕이 반대했다면 불가능했던 이야기지만, 네 의지만 있었으면 왕이고 뭐고 나에게 달려와 남자다운 사랑을 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의지가 아버지 반대로 꺾여버렸으면서 내 탓을 하면 안 되지. 아니면 내가 널 기다리며 평생 독수공방하라는 뜻인가? 그건 너무 이기적인 생각 아닌가?”
“난 꺽이지 않았어! 그래서 이렇게 왕이 되었고!!! 그리고 이렇게 당당히 당신 앞에 섰는데 왜! 왜!!! 하필 아인이야! 왜 더러운 피란 말이야!!!”
프레드릭의 말에 미레뉴의 눈빛이 사납게 변하였다. 전장을 지배하는 암사자의 풍모가 지금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입 다물어 애송아. 그 이상 내 부군을 욕한다면 나도 용서치 않을 거니까.”
“미레뉴우우우!!!!!!”
한 남자의 절규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열린 성문을 넘어서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코르도프는 안색이 어두운 프레드릭의 뒤로 접근해 그를 부추겼다.
“어찌할까요? 전하. 공격하시겠습니까?”
“공격? 후후후…. 백작. 우리가 온 목적이 뭐였지?”
“그, 그게…. 제니리스 후작을 충성심으로 복종시키는 것과 다른 왕자들에게 우리가 언제든지 후작을 공격해 불칸 왕국이라는 재앙을 불러들일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죠.”
“그래…. 그러니 이쯤이면 되었다. 전열을 정비하고 퇴각 준비를 해라. 오래 있어 봐야 좋은 꼴을 보지 못할 듯하구나.”
“하, 하지만, 아직 제니리스 후작의 충성을 확인하지 않으셨는데….”
“확인은 이미 끝났다.”
쇠로 된 장갑을 벗어 많이 거칠어진 손으로 자신의 더러워진 얼굴을 땀을 닦듯이 닦아낸 뒤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마음은 그 아인 놈에게 기울었다.”
“그렇습니까. 차라리 잘 되었습니다. 아인과 붙어먹은 년을 왕후로 들이는 것은 안 될 말이지요. 예정대로 반돌프 공작님의 여식과 혼인을 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흥. 반돌프 공작의 영예는 뭐 다를 줄 아는가?”
“예?”
“그년도 골치야 골치. 아비의 말을 듣지 않고 아예 아인들의 편으로 돌아 서버렸다고 하더군. 그래서 공작도 홧김에 그녀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다고 한다.”
“이런…. 그놈의 아인, 아인. 정말 지긋지긋합니다. 이곳은 엄연히인간의 왕국이며 인간의 땅인데 어찌 그런 천한 것들이 활개를 치냐 이 말입니다.”
“말 잘했다. 성국의 입김 따위가 아니다. 아인은 모두 천한 노예와 다른 바 없어. 그저 우리 인간들을 위해 착취당하고 노동하고 죽어가면 되는 존재야.”
“역시 전하십니다. 현명한 전하를 따르는 것! 이 코르도프 일평생 영광이 뒤따르리라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탕발림은 그쯤이면 되었다. 군사들을 정비해 돌아갈 준비를 해라. 적어도 두 형님이 이젠 함부로 경거망동할 수 없게 만들어 두었으니 그것으로 되어….”
“전하아!!!”
프레드릭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말을 끊으며 벼락같은 소리가 울린 뒤에 말을 탄 기수 하나가 빠르게 달려 그에게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깃발을 보니 전령이었고 그는 다급하게 말에서 내리자마자 프레드릭을 향해 무릎을 꿇고 부복하더니 품에서 편지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확인한 프레드릭은 편지를 손으로 짓이기며 부복한 기수의 멱살을 잡아끌어 올렸다.
“이것이 사실이냐!!!”
“예, 예 전하!!! 소식을 접하자마자 바로 달려오는 길입니다. 너무도 급한 일이라 전속력을 다하다가 기수 둘이 사망을 했습니다.”
“제길….”
“전하! 무슨일이옵니까!”
“어서 돌아가야 한다. 렘톤 인근에 있는 반돌프 공작 세력권의 영주들이 공격을 당하고 있다.”
“그, 그게 무슨….”
“렘톤의 아인들이 걸어 잠근 성문을 열고 나왔다. 쓰레기들을 구하러!”
*****
“흠….”
먼 거리를 확인할 수 있는 마도구, 마안경을 눈에 가져다 댄 서큐버스 한 무리가 멀리 보이는 도시의 상황을 일거수일투족 살피는 중이다.
그러다가 수비가 약한 곳을 발견한 그녀들은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몸을 감쪽같이 숨기며 이동을 시작했다.
불 가시성을 가진 그녀들의 날개는 공중을 날아 오르는 것 말도고 몸을 감싸서 주변의 시야에서 몸을 숨기는 것이 가능했다.
다만 이런 상태로는 빠른 이동이 불가능하게 되지만, 조용히 잠입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인 능력이었다.
대부분의 서큐버스들은 이 능력을 이용해 사냥감을 찾아 조용히 이동을 한다. 그리고
“헉!”
“오…. 오오….”
“오윽….”
도시의 성문을 지키는 병사 중에 가장 음란한 기운을 발산하는 즉 취약지역에 다가간 그녀들은 그곳에 서 있는 맛좋은 먹이를 향해 물리적인 방법으로 음란한 기운을 취하기 시작했다.
입과 입의 접촉, 성기의 애무나 노골적인 여성적 섹스어필 등등 방법은 다양하고 수만 가지라 딱히 설명하지는 않겠다.
남녀의 성적인 행동으로 흘러나오는 성욕만 있어도 기본적인 생활은 가능한 종족이지만, 음과 성의 종족인 만큼 물리적인 방법으로 쌓인 성욕을 뽑아내 적을 전투 불능으로 만드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이 방법은 극히 위험하여 한동안 정신적인 충격, 그리고 물리적인 충격으로 인한 발기 부전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그것까지 신경 써줄 수는 없다.
성문을 제압하자 꾸물거리는 은색의 인간 형태가 그녀들을 향해 접근했다.
그러자 서큐버스들이 식사를 끝낸 남자들을 그 은색의 인형을 향해 내밀었고 그것들은 눈앞의 존재를 꾸물거리는 얼굴로 몇 번 바라보더니 다음 순간 눈앞에 있는 존재 그 자체로 변모하였다.
이들은 아인이지만, 너무도 흉물스러운 외모와 위험함을 경계 받아 더욱 심하게 배척받은 존재인 셰이프 시프터 종족이다.
평소에는 부글거리는 또는 끈적거리거나 꾸물거리는 움직임을 하고 슬라임의 한 종류로 오해를 받기도 하는 이 종족은 셰이프 시프터가 아닌 다른 종족의 모습을 그대로 모방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물론 모든 능력을 그대로 모방하지는 못하지만, 성격에서부터 그 사람의 말투까지는 확실히 모방할 수 있어 그들이 배척을 받으면서도 인간 세계에 섞여 살아갈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서 작용하였다.
이들은 아무도 모르게 왕국에 숨어 있던 이들이었는데, 이번에 성국이 왕국을 점령하면서 위기감을 느끼고 렘톤을 찾아온 무리였다.
아인들만 모인 이곳에서는 누군가에게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아도 되니 왕국의 셰이프 시프터들은 대부분 밀크의 휘하에 들어온 뒤였다.
“성문 주위를 정리할 테니 경계 잘 부탁해요. 오빠들.”
“저기…. 우린 성별이 따로 없습니다.”
“지금은 남자잖아요.”
“그건 그렇죠.”
의기투합하여 서로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기 시작하는 두 종족의 모습의 뒤로는 또 다른 종족이 끼어들었다.
“퇴각로에 함정 설치해 둘 거니까 표식 잘 보고 이동하세요.”
“오! 역시 위도레빗분들을 빠르십니다. 사람들이 오면 그곳으로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할 테니 부탁합니다.”
그뿐이 아니었다. 숲 안에는 코볼트 일족이 다이어 울프의 등에 타서 경계하고 있었으며 다른 성문의 움직임은 숲의 일족인 엘프들이 그들의 눈과 정령의 힘을 받아 살피는 중이었다.
그리고 돌입 조인 홀스타우로스와 미노타우로스 혼성 부대가 탄 4인의 켄타우로스가 이끄는 강철 전차가 숲 안에서 돌입을 준비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