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149화, 잿더미의 나라와 찬란한 도시
밀크와 일행이 2 왕자들과 만나 왕도를 벗어난 그 시각
불타오르고 있는 왕성을 바라보는 한 남성의 눈에는 공허함이 가득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과거의 일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하나씩 떠오르고 사라져 갔다.
(“왕자님은 왕권에서 너무 떨어져 있습니다. 그냥 조용히 살다가 왕자님의 일생을 보장해 줄 수 있는 곳에 몸을 의탁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입니다.”)
(“우리 아들…. 어미의 마지막 유언이란다…. 목숨을 소중히 하려무나.”)
(“무례한 놈 같으니. 아무리 왕자라 해도 지금은 내 휘하의 부장으로 온 이상 이런 무례함은 앞으로 네 평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후 행동을 조심하도록.”)
(“넌 왕가의 넷째다. 다음 왕권에서 밀려나 있는 네게 후작 가라는 날개를 달아 준다면 그 뒤는 왕권 다툼이 더 극심하게 이루어질 터!”)
(“다음 대 왕의 자리를 드리지요. 저희와 한 거래만 충실히 이행해 주신다면 말이지요.”)
우르르르!
그의 마지막 기억을 끝으로 왕성은 화염에 휩쌓이며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 남자의 뒤로 가까이 다가오는 또 다른 남성, 필립 백작이 눈 앞의 남자를 불렀다.
“왕자님…. 아니 전하. 가시지요. 앞으로 할 일이 많습니다. 파괴된 과거의 왕성 잔해를 치우고 새로이 시작하는 신생 첼슨 왕국의 왕성을 다시 건조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산재한 일들이 산더미 같습니다. 왕성이 건조되는 동안 잠시 제 별장에서 기거하시지요.”
“알았다. 놈들은 어떻게 되었지?”
“1 왕자야 워낙 약삭빠른 작자가 옆에 붙어 있어서 놓쳤지만, 3 왕자는 생포하였습니다. 아울러 1 왕자, 2 왕자를 따르는 무리 대부분은 왕성 화제에 휘말려 죽거나 생포를 완료했….”
“그 더러운 아인돠 후작은 어찌 되었지?”
지금까지 필립이 나열한 자들은 프레드릭에게 그다지 중요한 것들이 아니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사랑하는 미레뉴와 그런 미레뉴의 옆을 꿰찬 더러운 아인 밀크의 생사가 더욱 중요 하였다.
“2 왕자 측과 함께 북문을 통해 왕도를 빠져나갔습니다. 그 아인 놈이 주인으로 있는 에스타 상단이 복병이었습니다. 그냥 상단으로 생각했는데 놈들은 훈련받은 아인 집단을 호위로 데리고 있더군요. 놈들이 팔던 무구가 그대로 그들의 무장으로 변하였고 내부에 귀중품은 그대로 두고 식량과 무기만 들고 그대로 도주했다 합니다.”
“흥. 약아 빠진 것들 역시 아인 놈들은 뒤에서 날카로운 칼을 갈고 있던 것이 확실해졌군, 놈들이 두고 간 모든 귀중품을 압수한다. 왕국 국고에 환원해 요긴하게 써야겠다.”
“지당하신 판단입니다. 전하.”
“둘째 형님도 그들과 함께 있다?”
“예. 아무래도 2 왕자의 지지기반이니 그들과 함께 한 모양입니다. 참고로 왕비…. 아니 폐 왕비도 함께입니다.”
“좋다. 아버님의 시신은 불에 타서 뼈만 남았을 테지만, 왕의 어전은 화제 따위로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게지어져 있으니 주무시던 모습 그대로 건재하실 거다. 어머님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와 아버님의 뼈와 함께 다시 묻어 드려라. 이후로 내 어머님이 진정한 왕비로 추대하겠다.”
“원하시는 대로 하시옵소서. 전하.”
“성국 놈들은 뭘 하고 있지?”
“적어도 아국 백성들, 인간에게는 그 어떠한 적대 행위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벌써 아인들의 학살이 시작되었더군요.”
“그 일은 조금 제재가 필요하겠어. 더러운 것들이지만, 가축을 함부로 죽여서야 쓰나. 요긴하게 사용될 일꾼, 또는 생산품들인데 앞으로 우리 왕국의 국고를 채워야 하니 적당히 죽이고 가축으로 만들라 지시하게.”
“예 전하. 그럼 저희는 이만 전후 처리를 위해 이동하겠습니다.”
“수고들 하게. 그리고 후작과 아인 놈의 정보는 들어오는 대로 모조리 나에게 가져오도록.”
“예 그리 하겠습니다.”
필립과 그를 따르는 귀족들이 사라지자 프레드릭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아야 할 하늘은 검은 연기로 가득했다.
저 검은 연기가 앞으로의 첼슨의 앞길이 아니길 바라며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제 다 타서 재만 가득한 왕성의 모습을 보는 그의 눈빛에는 강한 힘이 서려 있었다.
*****
“대족장님이 오셨다! 성문을 열어라!”
밀크의 부족이 위치한 산 아래쪽에 있는 작은 마을 렘톤
과거에는 왕국의 작은 마을로만 통하는 약 90에서 100세대 정도가 사는 정말 작은 마을에 불과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일이었다. 성국에 의해 한 번 철저하게 파괴당한 후 그곳을 2 왕자와 거래를 통해 밀크의 소유로 한 뒤로는 발전의 발전을 거듭하여 소규모 도시라 불러도 좋을 엄청난 성장을 이루어 냈다.
렘톤의 주변에는 농지로 사용하지 못하지만, 지반이 튼튼해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공간이 충분히 있었다.
인력도 없고 이미 100가구로도 충분했던 작은 마을이라 부지를 늘릴 필요성도 없었던 렘톤은 밀크와 그를 따르는 아인들의 손이 닿아 엄청나게 넓은 부지를 새로이 개간하게 되었다.
주변의 마수들을 밀어내어 안전한 지역을 만들고 그곳에 새로이 성벽이 올라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일전에 합류한 드워프들의 실력이었다. 밀크 부족이 살고 있던 산에는 광맥이 풍부했는데 그것을 파내면서 같이 파낸 돌과 바위들을 이용해 성벽을 쌓은 것이다.
왕성의 일로 바빠 직접 손을 댈 수 없던 밀크는 드워프들에게 철근과 타이거 호넷의 분비물로 만든 점착 아교를 시멘트 대신으로 사용한 그의 건축 기술을 전수해주었다.
그리고 자리를 떠나 있던 시간 동안 드워프들은 좋다고 새로운 지식을 사용해 이렇게 멋들어진 성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한눈에 봐도 그냥 대충 쌓기만 한 성이 아니었다.
오밀조밀하게 쌓인 바위들은 모두 장인들의 손을 거쳐 깎여 있었고 그들을 끈끈하게 엮은 타이거 호넷의 아교는 여간한 방법으론 떨어지지 않는 엄청난 점착력을 자랑하는 물건이다.
깎인 바위에 가려 눈에 보이진 않아도 내부에는 철근으로 만들어진 뼈대가 구축되어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성벽에는 밀크가 알고 있는 현대의 기술이 녹아 있다. 그야말로 이 세계에 없는 건축 기술로 만들어진 철옹성이나 마찬가지였다.
“오…. 대단하다. 역시 드워프의 기술력은 알아줘야 하는군.”
“드워프인가….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군. 여기가 정말 그 렘톤이 맞는 건가?”
밀크가 놀랄 정도인데 2 왕자 톨메오의 놀라움은 얼마나 대단했을까….
성벽을 지키고 있던 엘프와 와일드 엘프들의 환대를 받으며 마을로 들어선 뒤에는 그 놀라움들이 배가 되었다.
나무 양식은 전혀 보이지 않고 도로까지 돌로 포장된 깔끔하고 멋진 도시의 풍경 때문이다.
그뿐인가? 건물 대부분이 2층 양식으로 지어져 있어서 웅장해 보이기까지 했고 성벽과 같이 철근 뼈대와 바위 아교로 지어진 모습들은 단단하지만, 매우 질서정연하여 지저분하지 않았다.
지금은 불타 없어진 왕도와 견주어 보아도 아직 넓은 부지를 전부 채우지 못해 빈 곳이 많이 보일 뿐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은 절대로 지지 않을 거 같았다.
산에서 내려와 렘톤에 완벽하게 자리 잡은 홀스타우로스들이 전부 나와 대족장을 맞이하였고 그녀들을 따라 미노타우로스, 켄타우로스를 비롯한 밀크의 휘하에 들어온 각 종족의 장들이 그를 맞이하러 나와 있었다.
“돌아오셨군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고생 많으셨습니다. 대족장님.”
“추적의 기미는 없으니 어서 쉬시지요. 손님들이 쉴 곳도 이미 마련해 두었습니다.”
“저희는 바로 왕도 주변으로 정찰을 나가 정보를 모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저마다 한마디씩을 하며밀크의 귀환을 환영하였다.
렘톤 마을 중앙에는 원래 밀크의 부족 마을에 설치되어 있어야 할 베라밀프의 황금상이 옮겨와 있었다.
덕분에 밀크는 베라밀프의 기운을 충분히 받아 여신과 연결된 기운을 회복했다.
지금 홀스타우로스들의 원래 보금자리에는 드워프들의 광산 작업장이 설치되어 있다고한다.
대족장의 집으로 만들어진 가장 높은 5층짜리 건물 1층과 5층을 빼고는각층에 거주 가능한 인원은 100명 남짓이다.
1층은 손님 접대와 식당, 대욕실 등등의 방이 설치되어 있고 5층은 특별하게 밀크의 공간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지하에는 다른 전날 쥴라가 잡혀 있던 구조와 비슷한 느낌의 감옥이 설치되어 있는데 당장은 그곳에 들어간 인물은 아무도 없다.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그들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오거 메이드와 그런 오거의 옆으로 같이 고개를 숙이는 여성이 보인다.
“오셨습니까 대족장님.”
“오, 오셨습니까 주인님.”
밀크에게 주인이라 칭하는 존재, 과거 신성 왕국 헤베나의 성기사였던 기가 센 여인 쥴라였다.
누군가에 의해 철저한 교육을 받아 사상 자체가 바뀌어 버린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풍기면서 메이드 복이 잘 어울리는 한 명의 일꾼으로 전락해 있었다.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녀의 배는 불룩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그가 떠나 있던 동안 칸젤라가 무던히도 그녀를 보살펴 준 모양이다.
물론 그녀의 몸에 남겨진 훈련과 전투의 상처, 그리고 검술 실력이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지만, 주인에게 위협이 없는 한 그녀는 앞으로도 계속 하녀로서 살아갈 것이다.
“테곤. 그리고 쥴라. 이젠 이곳에 적응한 모양이네?”
“예…. 과거의 제 잘못 뼈저리게 이해하였고…. 그 죄를 갚기 위해 이리 열심히 주인님의 보금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그렇군...”
사상이 바뀌어도 너무 바뀌어 버린 모습에 밀크가 다 난감할 지경이었다.
“쥴라 오늘은 나 혼자 충분하니까 가서 쉬어. 몸도 무거우면서 대족장님얼굴을 꼭 봐야 한다고 이렇게 나온 거랍니다. 정말 대견하죠?”
“아, 아니요! 저도 일 할 수 있습니다!”
“아서, 아서. 하녀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가서 쉬고 있어. 그러고 보니 얼굴을 못 본 거 같은데 칸젤라는 어디 있어?”
“언니라면 도시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냥을 나가 있습니다. 아직은 농작물들이 잘 자라지 않아서 개간이 더 필요한 실정입니다. 단단한 부지는 많지만, 농작물을 키울 공간이 부족한 현실이거든요.”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방법을 구상해 보자고. 그나마 산에 설치한 농장은 잘 유지되고 있잖아?”
“예. 하지만지금도 부족의 일원들은 계속 늘어나는 실정이라 그걸로는 매우 부족합니다. 이런! 손님들을 너무 세워두고 있었네요. 자세한 이야기는 밀리님과 루피카님이 밤에 설명해 주실 겁니다. 그러니 일단 저를 따라서 오십시오 시장하실 거 같아 요깃거리를 준비해두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가요 왕자님. 그리고 왕비님. 리그릿 후작도 따라서 오세요. 다음 목적지가 정해질 때까지는 이곳에서 충분히 쉬고 움직이도록 하죠.”
“정말 고맙소 대족장. 내 이 은혜는 꼭, 꼭 갚도록 하지.”
“어려울 때 친구가 참된 친구죠. 또 다른 왕자들과 다르게 2 왕자님은 아인을 배척하지 않았으니 이렇게 보답을 받는 겁니다.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저 역시 감사합니다. 대족장. 약속하건대 우리 아들이 은혜를 저버린다면 이 어미가 나서서라도 은혜에 보답하도록 할 겁니다. 그럴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만, 이 힘 없는 여인의 말을 믿어줘요.”
“당연한 말입니다. 왕비님. 믿습니다. 왕자님의 어머니이기에 앞서 저에게는이모님이 되십니다. 가족끼리 믿지 못하면 누굴 믿을 수 있겠나요.”
“가족…. 그렇죠. 가족.”
그렇게 다시 끈끈하게 동맹을 결성하는 밀크와 톨메오, 그들은 다시 테곤의 안내를 받아 잘 꾸며진 입구로부터 이동해 크고 깔끔한 식당에 도착했다.
그 안에는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던 두 여인이 있었으니 밀리와 루피카다.
일행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밀크의 어머니인 밀리는 왕비 류드밀라와 새로이 아내가 된 미레뉴등과 더 친밀한 인사를 나누었다.
밀크의 엄마이자, 첫 번째 아내인 밀리 처음에는 친근한 모습에 아들과 엄마의 사랑이 큰가? 하고 생각하던 미레뉴가 엄마이면서 아내라는 말에 놀랐고 다른 인원 역시 놀라워했지만, 홀스타우로스의 세계에서는 너무도 흔한 일이었기에 이내 이해하고 넘어갔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귀족들의 세상에서도 자신들의 정통성인 귀족가의 피를 더 진하게 만들기 위해 근친혼을 하는 예도 있었고 그에 따라 문제가 발생하거나. 또는 운이 좋아 천재가 탄생하거나 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는 있었다.
다들 많이 지쳐 있었기에 허겁지겁 식사들을 끝냈고 각자가 관심이 가는 대상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톨메오는 뒤늦게 합류한 미노타우로스 형제인 도칸과 트루칸 두 사람과 제법 죽이 맞아 대화를 나누었고 류드밀라, 미레뉴, 루피카 밀리 네 여인이 뭔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다음으로 비올라와 클레어, 리그릿, 퍼슨이 앞으로의 일을 상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밀크는 그동안의 피로가 누적된 모양인지 네 여인의 대화 자리에 낀 밀리의 무릎을 베고는 새근새근 잠에 빠져 있었다.
역시나 어머니의 품은 이길 수 없는 건가…. 라는 부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와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아 잠든 밀크의 뺨을 어루만지는 미레뉴의 행동은 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