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147화, 선을 넘다.
“만찬장에서 이게 무슨 소란이더냐!”
한 나라의 왕비라는 직책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왕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안전하게 보호한다면 왕비는 내부의 의협으로부터 나라를 안전하게 보호한다.
왕자들의 반목이나 집사, 하녀들의 반목을 조율하고 내조에 힘써 왕이 심적으로 힘들지 않게 조용히 힘쓰는 것이 왕비의 일이었다.
하지만, 제니리스의 피를 이어받은 류드밀라는 미레뉴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이 범접하지 못할 강한 지도력을 가진 여성이었다.
물론 자신의 남편이자 이 첼슨 왕국의 국왕인 버밀리온 첼슨이 있기에 그것을 직접 드러내지 않았으나 거동을 하지 못하는 남편을 대신하기 위해 한 꺼풀 모습을 드러내었다.
왕자들도 요즘 들어 확연히 달라진 그녀의 공기를 모를 리가 없었다. 제니리스 후작가의 피는 여자라 해도 사라지지 않으니까.
“윽….”
강렬한 기운을 정면으로 받은 프레데릭은 잠시 주춤하는가 싶었지만, 다시 균형을 찾으며 왕비인 류드밀라에게 정면으로 마주 섰다.
그에 놀란 3 왕자가 그를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고 상황을 살피다가 개입하려던 1 왕자와 잠시 자리를 비운 2 왕자 대신 리그릿 후작이 소동의 중심지로 다가왔다.
류드밀라는 인사도 없이 당당히 고개를 들고 자신을 마주하는 프레데릭의 모습에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프레데릭! 피가 이어진 친어미는 아니지만, 항렬 상 네 어미의 위이니 나도 네 어머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무례한 행동이더냐”
“죄송합니다. 왕비님”
“왕비님-?”
“예. 죄송하지만, 지금 이 일은 여기 있는 더러운 아인과 제 사이에 일이니 저희 둘에게 맡겨 주시기 바랍니다. 별일도 아닌데 현 국가의 대리인이신 왕비님이 직접 개입하시는 건 보기 좋지 않습니다.”
어머니 정도의 호칭을 기다린 류드밀라의 귀로 들어온 왕비님이라는 호칭에 류드밀라고 이성의 끈이 끊어지고 말았다.
자신을 어미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을 돌려서 표현한 것이리라.
1 왕자가 이마를 손으로 감싸는 행동과 동시에 화가 치민 류드밀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 프레데릭. 지금까지는 내가 네 방자함을 그냥 참아 주었는데 지금은 도저히 묵과할 수가 없구나. 뭣들 하느냐! 만찬장에서 소란을 피운 4 왕자를 당장 잡아 4 왕자 궁으로 끌고 가라! 만찬이 끝날 때까지 엄중히 감시해야 할 것이다!”
그녀의 명령에 만찬장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력이 움직여 4 왕자의 팔을 잡았지만, 프레데릭은 그것을 강하게 뿌리친 뒤 경비병을 오히려 꾸짖었다.
“놓아라! 감히 첼슨 왕국의 4 왕자의 몸에 손을 대다니 무례한 놈들! 왕비님! 이번 일이 끝나면 제가 알아서 갈 겁니다. 이딴 만찬장 따위 어차피 제게 맞지도 않으니까요!”
“프레데릭!!!”
“흥…. 또 형님입니까?!”
그의 행동을 보다 못한 1 왕자가 앞으로 나섰다. 두 눈에 안광이 보일 정도로 강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루크렌 첼슨의 모습, 파지만 프레데릭도 이번에는 지지 않고 그의 눈빛에 강한 눈빛으로 응수했다.
“그만하고 네 방에 가 있어라.”
“그럴 수 없습니다. 이 더러운 아인 놈과 결판을 내야겠습니다.”
“어리석은 놈. 네놈이 모든 것을 다 망치도록 내가 내버려 둘 것 같으냐?”
“내버려 두지 않으면 어쩌시렵니까?”
“뭐가 어째? 진정으로 이 형과 맞서겠다는 뜻이냐!”
“애초에 당신 밑에 들어간 것은 그 밑에서 힘을 키우기 위함이었지 당신에게 충성을 다 바치기 위함이 아니었어. 이제부터 난 1 왕자 파에서 빠져나올 것이니 나에게 더는 왈가왈부 하지 마시오.”
“감히!!!”
만찬장의 분위기가 더없이 흉흉하게 변하였다.
시종들이 연주하던 악기의 소리도 끊어지고 화기애애한 담화도, 그리고 춤추는 사람들의 모습도 모두 시간이 멈춘 듯 그 자리에 꼿꼿하게 멈추었다.
적잖이 충격을 받은 류드밀라를 옆에서 단단히부축한 미레뉴가 밀크와 벨, 그리고 톰과 유크를 자신의 옆으로 불러드렸다.
그러자 프레데릭이 또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이 썩을 아인 자식아! 어딜 함부로 그분의 곁으로 가는 것이냐! 네놈 따위가 설 곳이 아니란 말이다! 당장 꺼지라고! 꺼져!”
“내 남편에게 얼마나 더 무례하게 굴어야 속이 풀리겠느냐!”
“남편이라뇨! 이 자식은 더러운 아인입니다. 어째서 당신 같은 분이! 당신 같은 분이 이런 더러운 자를 남편으로 받들어 보신단 말입니까!!! 왕국의 체면을 뭉갤 생각이 아니라면 당장 파혼을 하십시오!”
“네놈이 대체 뭐길래 후작가의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이냐? 네가 이 대 첼슨 왕궁의 국왕이라도 되느냐? 만약 그렇다 해도 결혼의 일까지 나라가 왈가왈부하는 것은 명백한 후작 가의 명예를 뭉개는 행위임을 모르는 것이야?”
“첼슨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어야 후작이고 명예도 있다는 것을 왜 모르십니까! 그런 명예를 준 나라인데 정작 당신은 그 나라의 명예를 뭉개고 있습니다! 아인 따위는 천박하고 더러운 가축입니다! 가축과 인간이 결혼하다니!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입 닥쳐라! 내 남편에게 지금 가축이라 한 것이냐!”
“몇 번이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놈은 가축입니다! 저놈뿐 아니라 저년! 또 저년도 모두 가축입니다! 모두 들으시오! 아인 따위와 결혼을 하다니 이것은 왕국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중차대한 일입니다! 저 가축들을 왕국에서 몰아내고 목줄을 채워 모두 우리에 처넣어야 합니다!!!”
“닥치….”
“옳은 말입니다.”
미레뉴의 말을 끊으며 앞으로 나서는 자가 있었다. 그는 프레데릭의 말에 동조하였다.
수수한 외모지만 잘 기른 턱수염 덕분에 기품이 있어 보이는 귀족이었다.
흰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고 중후한 목소리로 좌중을 압도하는 기백을 가진 귀족
그는 바로 레이나 반돌프의 아버지인 필립 반돌프 백작이었다.
정중하게 프레드릭을 향해 인사를 한 필립은 프레드릭을 두둔하며 기타 자신을 따르는 귀족들은 자신의 주위로 불러드렸다.
1 왕자파에 몸담기 전부터 그를 따라오던 귀족과 필립 백작을 주축으로 한 중립 귀족이 모여들자 그들의 수가 제법 볼만했다.
이곳에 모인 자들 대부분은 아인을 배척하는 사상이 강하게 깔린 인간 우월주의 사상의 귀족들이었다.
“후작님. 여기 계시는 프레데릭 왕자님께서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왕도 회의에서는 민감한 주제라 미처 다루지 않았지만, 이 자리를 빌려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첼슨 왕국은 인간들의 나라이며 인간이 주를 이루는 인간을 위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인간의 나라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 바로 후작님의 행동입니다.”
“내가 첼슨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
“아인 따위는 저희 인간들의 아래에서 가축처럼 보살핌을 받으며 자신들의 부산물이나 생산하는 대화가 통하는 가축일 뿐입니다. 그런 가축과 결혼을 한다는 것은 마치 푸줏간에서 죽을 위기에 처한 돼지를 데려다가 결혼한 것과 같은 겁니다.”
“입 다물어! 내 남편을 모욕하는 것이냐!!!”
“후작님. 모욕이 아니라 사실을 말한 거뿐입니다. 없는 사실을 가지고 사람을 음해하는 것을 사람들은 모욕으로 받아들입니다. 한데 전 지금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근거로 아인에 대한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이건 모욕이 아니라 진실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그리고 아인에게 모욕이라니 사람도 아닌데 뭐가 모욕이란 말입니까?”
“닥쳐라! 궤변을 지껄이는 그 입, 그 목이 필요치 않다면 어디 더 떠들어 보아라!!!”
“힘으로 해결하려 한다고 해보시지요. 그러나 힘만으로 이 문제가 끝날 거 같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아인 따위와 결혼을 한다는 것은 앞으로도 후작님을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당신을 괴롭히겠죠. 당신의 자손, 그리고 그 자손의 자손과 자손의 자손까지 손가락질을 받을 겁니다. 더러운 아인의 피를 받아 태어난 저주받은 생명이라고!”
“그만!!!”
발끈한 미레뉴가 검을 뽑으려는 순간 만찬장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지만 미레뉴보다 작은 체구를 가진 존재이며 지금까지 꾹 입을 다물고 있던 존재였다.
그는 분노로 머리가 차가워져 있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아인의 존재를 오늘 확실히 알게 된 순간이었다.
“가자. 우리가 있을 곳이 아니구나. 2 왕자님과의 관계도 있으니 대응하지 말고 조용히 가자. 여기서 더 나아가 보았자 우리만 고립된다.”
“대족장님….”
“족장님….”
“안주인님.”
“밀크….”
“괜찮아. 미레뉴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어. 그만 가자. 우린 불청객인 듯하니까.”
“자, 잠깐! 대족장!!!”
자리를 비웠던 2 왕자 톨메오가 급하게 달려왔다.
리그릿의 조언에 따라 자신을 따르는, 그리고 새롭게 합류 가능성이 있는 자들과 함께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만찬장의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지 못한 듯했다.
그는 달려오자마자 밀크의 손을 붙잡았다. 밀크는 그 행동을 피하지 않았다.
“미안하네! 내가 대신 사과하지. 귀족들 모두가 저따위 사상에 물들어 있는 것은 아니라네.”
“저따위 사상이라뇨!!!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2 왕자님!”
“당신이야말로 말이 지나쳤소. 백작”
“리그릿 후작?”
“무슨 이야기를 하나 궁금해서 참고 기다리고 있으니 도를 넘어섰군요. 그리고 후작님이라 부르도록 하세요. 내가 당신보다 상급자입니다.”
“가…. 감히 2 왕자의 끄나풀이라 높은 자리를 차지한 주제에!”
“하. 상단을 하나 잘 운영해서 왕국의 백작이 된 주제에 감히 정통 코스를 밟고 올라간 나에게 그런 지적을 하는 겁니까?”
“이놈!!!”
“시끄럽습니다. 웬만하면 나서지 않으려 했는데 이건 도를 넘어도 너무 넘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한낱 아인 따위라고 지칭하고 있지만, 왕국 법상 지금 밀크 대족장은 제니리스 후작님의 남편입니다. 두 사람의 뜻이 맞아 파혼한다면 모를까 아직은 후작가의 데릴사위라 이 말입니다. 백작 당신은 지금 우리 왕국의 든든한 변경의 수호자인 후작님을 아인과 결혼했다는 이유를 들어 적대시하고 노골적인 공격을 한 것이오.”
“흥! 사실을 사실대로 말했을 뿐인데 뭐가 잘못되었다는 말이요? 아인들은 모두 천박하고 더러운 족속들이오. 인간 같은 우월함과 우아함이 없소 모두 다 외양간에서 생활하는 더러운 가축과 하등 다른 바가 없지 않소! 그리고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아인들은 모두 인간들의 자리를 넘보는 잠정적인 범죄자들일 뿐이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천천히 우리의 목을 노리는 적이라 이 말입니다! 제대로 길을 들이지 않으면 언제고 목덜미를 물어 뜯기게 될 것이오!”
“뭐 백작님의 그 사상은 이해하겠습니다만, 그걸 저에게 강요하듯이 받아들이라고 하진 마십시오. 솔직히 구역질이 납니다. 당신이 그 사상을 따르고 좋아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자유지만, 저도 그것을 배척할 자유가 있지 않습니까?”
“이건 진리이지 사상이 아닙니다! 당신은 진리를 따르지 않겠다는 이단에 불과합니다!”
“어쩌다가 제가 이단인가 아닌가를 토론하게 되었지요? 당신이 후작가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는 사실이 더 큰 문제인 거 같은데 말입니다”
“흥! 빠져나가지 말고 제대로 대답을 하시오! 당신은 이단인 겁니까!!!”
“시끄러운 작자들 같으니. 우리 왕국에 이리 많은 아인 멸시 사상을 가진 자들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1 왕자님? 왕자님은 어떠신가요? 당신도 아인이라면 치를 떨지 않으십니까?”
“흠흠…. 후작. 내가 아인을 싫어하는 건 맞지만, 멸시하는 건 아니라오. 그냥 성격상 아인이랑 맞지 않는 거뿐이지. 왕국에 도움이 된다면 나 역시 아인을 그냥 두고 보자는 주의라오.”
사실 루크렌도 적잖이 아인 멸시 사상이 있긴 하지만, 그리 심한 편은 아니었고 여기서 대놓고 아인 멸시 사상을 드러내 보았자 좋을 것이 하등 없어서 잠자코 있는 것이었다.
그보다는 프레데릭이 저리 심한 아인 멸시, 그리고 인간 우월주의에 빠져 있는지 몰랐었다.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드리려 했던 필립 백작의 행동도 정말이지 의외였다.
정황상 프레데릭과 저들의 사상이 만나서 더 심해졌다고 생각이 되지만, 어디까지나 심증상의 정황이었다.
“당신들이 지금 4 왕자를 필두로 해서 왕권 다툼에 끼어들고자 하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럴 거면 주변에 적은 만들지 말아야지요. 당신들은 지금 샤벨타이거의 입 앞에 있는 겁니다.”
“뭐라?!”
“주변이나 한번 보시겠습니까?”
“음?!”
“헉?”
“으음….”
프레데릭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 모여 있는 귀족들, 모두 아인 멸시 사상으로, 또 인간 우월주의 사상으로 똘똘 뭉친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주위로 몰려든 사람들은 마치 병균을 바라보는 듯한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한 명 건장한 체구를 한 한 명의 귀족이 앞으로 나서며 성이나 벌게진 얼굴을 하며 필립의 멱살을 쥐어 들어 올렸다.
“우욱!”
마치 곰과 같은 거대한 체구의 남자였다. 그는 으르렁거리면서 거친 손길로 얼굴을 자신의 얼굴 앞으로 가져왔다.
“우리 어머니가 가축이다? 네놈은 살기 싫은가 보구나.”
“우…. 욱! 작슨 자작! 무례하다! 이거 놓아라!”
“무례는 영감이 먼저 저질렀고! 내 어머니를 가축이라 욕보이고 살아 돌아갈 생각은 아니겠지?”
필모어 작슨 자작, 얼마 전 열린 왕국 검술 대회에서 압도적인 무력으로 우승을 한 중립 귀족이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아인종의 하나인 곰의 형태로 변할 수 있는 워 베어 일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