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128화, 바이올렛의 새로운 꽃
시끄러운 소란이 진정 되고 마이올 상단 지부의 상황은 초상집 분위기와 비슷했다.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고 흉흉한 기운이 가득한 제퍼슨만 씩씩거리며 아직도 분이 덜 풀린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미친놈들! 그래. 우리가 팔고 있는 모든 물건을 그쪽에서도 팔고 있다 이거지? 거기다가 물건의 값은 우리보다 저렴하고?”
“예 행수님. 거기다가 질도 꽤 괜찮습니다. 특히 나무로 만든 식기의 경우는 저희가 흉내도 내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고 저렴합니다. 하여 비싼 값을 내고 저희 물건을 사느니 좀 더 싼 값을 내고 질좋고 저렴한 에스타 상단의 물건을 사겠다는 말이 나돌고 있습니다.”
“하…. 이게 대체 뭐냔 말이야! 같이 죽자 뭐 이런소리인가? 아니 왜 그런 식으로 우릴 공격해서 애꿎은 재산을 갉아먹냐고!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 밀고 당기는 건 기본 아닌가 이 말이야. 에스타 상단의 행수는 정말이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인물이란 말인가….”
“행수님 저희도 뭔가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대로는 도저히 버텨낼 재량이 없습니다. 조금 이익이 적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물건을 팔아서 나누어 먹고 잠적하시죠. 이대로 물건만 썩히다가 덜컥 마이올 자작이 풀려나기라도 하면 그땐 정말 저희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자고. 설마 저 개자식들처럼 가격을 줄여서 경쟁이라도 하자 이거냐? 그래선 서로 공멸…. 아니 에스타 상단에게 말려 죽게 될 거다.”
제퍼슨이 욕심은 많아도 역시 한 상단을 책임지고 있는 만큼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자신들보다 자금력이 넘쳐 나는 에스타 상단이 이러한 방법을 취한 이유는 알아서 힘의 차이를 깨닫고 고개를 숙이란 뜻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만약 싸움에 뛰어든다? 그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완벽한 파멸뿐이다. 에스타는 충분히 그럴만한 힘이 있었고 클레어 마이올 자작의 말을 대필로 받아 적은 2 왕자의 공문서까지 있어 명분도 충분했다.
거기에 가격 경쟁으로 뛰어든다손 치더라도 저들이 파는 물건이 더 뛰어나고 저렴한데 그 누가 마이올 상단의 물건을 사준단 말인가. 피해 보고는 각 상단 지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말 그대로 숨통을 조이기 위해 빠짐없이 공격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방도가 없다…. 방도가…. 하아….”
“행수님….”
“그동안 해 처먹은 게 많으니까 이쯤에서 포기하자. 상단을 에스타에 넘기고 우리가 안전하게 이곳에서 몸을 뺄 수 있도록 확답을 받는 것이 가장 좋은 방도 같다.”
“아….”
제퍼슨은 바보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욕심이 많기에 물러나야 할 때를 잘 아는 편이었다. 처음에 퍼슨과 나눈 뻗대는 대화는 그저 더 큰 보상을 위해 밀고 당기기에 들어가기 위한 포석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상대가 완전히 다른 판을 짜서 들고 왔다. 바로 힘과 힘으로 싸우는 가격 경쟁의 판이었다. 힘센 놈이 힘으로 밀고 들어오는데 거기에 힘 약한 놈이 힘으로 맞서 싸워봐야 힘센 놈이 이긴다는 것은 명확한 일이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마이올 상단은 철저한 힘 약한 놈의 입장이다. 강자에게는 숙이고 들어가야 하며 그래야 일신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그것을 제퍼슨은 잘 알고 있었다.
“이 정도면 객기는 충분히 부렸다. 우리가 올려다볼 수 없는 나무였던 거뿐이야. 역시 에스타는 에스타야. 후우…. 여기서 끝내고 조용히 살자. 괜히 버텨 봐야 아무런 끈도 없는 우리 처지는 귀족들 등쌀에 밀려 이리저리 치이다 죽기밖에 더하겠냐?”
“그, 그건….”
마이올 상단의 모든 인원은 그대로체념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든 일은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얼마 후 에스타 상단의 퍼슨이 맡은 지점에서 만난 두 사람 사이에는 많은 말이 오고 같다.
“상단을 넘기겠습니다. 대신 저희가 가지고 있는 개인 자산에 관해서는 손을 대지 말아주시고 모든 인원의 안전을 보장해 주셔야 합니다.”
“그거야 당연합니다. 어차피 상단은 모두 정리할 셈이었고 지금까지 부려왔던 부정부패는 저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항이니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또 한 왕국 국민의 목숨을 함부로 빼앗을 수 없지요. 그 문제 역시 잘 처리해 드리지요.”
퍼슨은 흔쾌히대답함과 동시에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서류를 찬찬히 확인한 제퍼슨은 마지막 부분에 사인했다. 이로써 마이올 상단의 모든 권리는 이제 제퍼슨의 손에서 퍼슨의 손에 넘어왔다.
상단의 모든 인원을 데리고 잠적해 버린 제퍼슨을 뒤로하고 상단이 정리에 들어간 에스타 상단, 그 소식을 전해 들은 2 왕자는 바로 태도를 바꾸어 클레어 마이올 자작의 구원을 포기하고 그녀를 평민으로 파면시키기로 했다.
의외의 결과가 일어나 1 왕자 측은 어안이벙벙하긴 했지만, 어쨌든 이로써 2 왕자의 힘은 줄어들었고 마이올 자작가는 1 왕자가 흡수하게 되어 전력을 늘리게 되었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자작가를 손에 넣은 1 왕자 파는 바로 뒷머리를 잡아야 했다.
“마이올 상단이 에스타에 넘어갔다고?!”
“예 왕자 전하. 그 때문에 마이올 자작가의 주 수입원이 아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새로이 마이올 자작에 오른 홀리건 마이올이 자금 원조 요청을 해왔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건가? 우리가 자작가를 원조해줄 자금이 어디 있다고 원조를 요청해! 하…. 전력이 될 자작가를 흡수하는 건 고사하고 그냥 혹 하나 달아버린 셈 아닌가!”
“2 왕자가 수면 아래에서 조용히 움직였던 모양입니다. 우리가 클레어 자작, 아니 전 자작을 파면시키고 그 자작가에 우리 사람을 넣으려고 혈안이 되어 다른 쪽에는 신경 쓰지 않고 있을 때 그는 애초에 자작가의 자금력을 정리하고 클레어 전 자작을 파면시킨 뒤 안전하게 보호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던 모양입니다.”
“한 방 먹었군.후후후 아우님은 참 영악하단 말이야. 안 그렇게 보여도 속에 능구렁이 다섯 마리는 키우고 있어…. 에스타 상단이 그것을 도왔다는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왕자님. 이로써 에스타는 완벽히 2 왕자의 끄나풀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겁니다.”
“어렵군. 어려워…. 우린 애물단지 하나 얻었는데 2 왕자는 애물단지는 버리고 그 대신 중요한 알맹이는 모두 독차지하지 않았는가 이 말이야…. 이번 싸움으로 공작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금을 쏟아부었는데 후우….”
“자금을 대줄만한 다른 귀족들을 물색해 보겠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왕자님.”
“응?”
“혼담 말입니다. 아직 결정이 다 안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다시 추진해 보심이 어떠시는지?”
“그건 이미 끝난 이야기야. 저번에 그 혼담이 깨진 것 때문에 내가 그년에게 사실상 보복을 하지 않았던가. 그 때문에 이미 서로 감정이 많이 상했으니 지금 다시 구태여 그 혼담을 추진한다 해도 좋은 소리가 오고 가지 못할 거라고.”
“그 아비인 백작이 중립적인 인물이긴 하나. 이번에 어떻게 잘만 구슬리면 이쪽으로 넘어올 공산이 큽니다.”
“뭐라?”
“아시겠지만, 반돌프 백작은 아인 멸시 사상이 골수까지 미친 인사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에스타가 2 왕자의 편으로 돌아서면서 반돌프 백작과 이런저런 많은 충돌이 있었다고 합니다.”
“왜 그러지?”
“에스타 상단에서 일하는 자들이 대부분 더러운 아인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자들이 일하는 천한 상단을 받아들인 2 왕자에게 실망했다고 공적인 자리에서 크게 성토를 했다더군요.그 때문에 2 왕자 측과 반돌프 백작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오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 그를 우리 쪽으로 데려올 수만 있다면 이미 자금력에서는 반돌프 상회의 원조를 받을 수 있고자연스럽게 레이나 반돌프 역시 아비의 말에 따라 혼담을 추진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레이나 그 여자 역시 상단을 되살렸다고 하더군요. 잘만 하면 두 개의 상단과 함께 첩도 하나 얻을 수 있을 겁니다.”
“후후후…. 역시 이밀 공작은 저 덜떨어진 카프리온 공작과는 다르단 말이야? 감히 이밀 공작을 두고 카프리온이 지낭이라는 위명을 날리다니. 이번 기회에 잘만 되면 그 이명을 빼앗아 올 수도 있겠어.”
“과찬의 말씀입니다. 전 그저 알량한 지식을 조금 가지고 있을 뿐. 모든 것이 전부 왕자 전하의 큰 복입니다.”
“하하하하하 역시 그 입까지 마음에 든단 말이야. 앞으로도 계속 날 도와주게나.”
“예.”
이번 실패를 계기로 잠시 주춤하게 된 1 왕자 측이었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다시금 발돋움하기 위한 바윗덩이를 재건하기 위해 열심히 작전을 구상 중인 그들이었다.
*****
그로부터 또 얼마 후 자줏빛의 바이올렛에서는 새로이 몸을 담고 일하게 된 여성이 밀크의 앞에 가면을 쓰고 나타나 인사를 올렸다.
“클레어입니다….”
원래는 그녀를 상단의 호위로 만들어 조금만 고생하면 그 실력에 따라 직위를 주려고 했었다.
그러나 모종의 사건을 전부 전해 들은 그녀는 은혜는 갚아야 한다며 한사코 바이올렛에 들어오길 바랐다.
비올라와 함께 있는 편이 더 안전할 거라는 것도 이유는 이유였지만, 아무래도 그녀는 어지간히 비올라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불같은 성격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전투가 벌어졌을 때 적들에게 한한 것인지이제부터 섬겨야 할 대상인 밀크에게는 깍듯하기 그지없었다.
바이올렛의 직원들처럼 천 면적이 적은 드레스와 가면을 착용하고 있는 클레어의 모습, 전날 이곳에서 행패를 부릴 때 목소리는 들었지만, 얼굴을 보지 못하여 직접 대면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까무잡잡한 피부가 건강미 넘쳐 보이는 여성이었다. 검술을 단련한 만큼 손에 굳은살이 잔뜩있었지만, 무인으로서는 크나큰 훈장이기에 그것은 흠이 되지 못하였다.
보일 듯 말 듯 적당히 자리 잡은 근육질의 몸매와 그 위를 뒤덮은 여성 특유의 살집이 괜찮게 양립하고 있었으며 가면으로 눈을 가렸기에 이상야릇한 아름다움이 돋보였다.
저 가면 뒤에는 과연 표독스러운 눈동자가 있을지. 아니면 의외로 유약해 보이는 눈동자가 있을지 괜히 기대되기도 하였으며 붉게 타오르는 듯한 짧은 웨이브 머릿결이 그녀의 미모를 좀 더 보완하고 있었다.
인사가 끝났는데도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밀크의 앞에선 이제 얼굴을 당당히 드러내 보이는 비올라가 클레어의 뒤로 다가가 그녀의 엉덩이를 찰싹 소리 나도록 때렸다.
“흣!!!”
“클레어. 이곳에서 일하기로 했을 때 내가 분명 말했죠? 마담인 내 교육을 철저하게 따라와 줄 것과 이 자줏빛 바이올렛의 실질적인 주인이신 밀크님께는 그 어떠한 무례도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말이에요.”
“네, 마담….”
고개만 까닥 숙였던 그녀의 태도가 문제였다. 다시금 밀크의 앞으로 나아간 그녀는 공손하게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렸다.
그에 따라 그녀의 속옷이 적나라하게 보였지만, 클레어는 얼굴을 붉히긴 해도 그만두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자세 그대로 살짝 허리까지 숙이며 고개를 공손하게 숙인 그녀는 다시 밀크에게 인사를 올렸다.
“소녀…. 클레어라고 합니다…. 이후로 밀크님을 성심성의껏 섬기겠나이다….”
“음….”
자신이 구해주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2 왕자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다.은혜를 갚는 것은 상단에서 일해 주는 것으로 충분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돼버린 것인지.
조용히 비올라를 응시하자 그녀는 괜찮다는 듯 싱긋 웃을 뿐이었다. 나중에 이 일로 2 왕자가 문제라도 삼지 않을까 봐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그녀가 괜찮다고 눈짓을 보여주니 조금은 안심이 되는 밀크였다.
“이곳에서 일하기로 한 이상 절대 허투루 할 수 없지요. 이 아이는 제가 단단히 교육했고 앞으로도 계속 관리할 예정이니 후에 제가 자리를 비우거나 가까운 곳에 로크웰이 없으면 이 아이가 밀크님을 보필할 겁니다.”
“예…. 앞으로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세요….”
자기가 하기로 마음은 먹었지만, 너무도 많이 바뀌어 버린 주변 상황에 아직은 힘이 없는지 목소리가 작았다. 그러나 굴욕적인 모습에 반발하거나 귀족으로서 생활해온 과거의 일을 들먹이며자신의 요구를 내세우지 않는 것만으로도 반은 밀크의 마을에 들었다.
“기대하도록 할게. 조금만 고생하면 곧 2 왕자가 널 부를 테니 참고 견뎌주길 바랄게.”
“아닙니다…. 이미 귀족도 아니게 된 몸…. 그분의 미래에 제가 방해될 순 없으니 음지에서나마 그분의 길을 돕는 것이 훨씬 나은 일이 될 겁니다. 전 이곳에서 마담의 곁에서 밀크님이 주신 은혜에 보답하며 일생을 보내겠습니다.”
다시금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해 보인 클레어 2 왕자에게 충성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새로이 은혜를 입은 밀크에게 보답을 하기 위해 그리고 2 왕자의 앞길을 막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이렇게 밀크의 밑에 남기기로 하였다.
그가 가는 길이 결국에는 2 왕자에게 도움이 되는 길이기에. 그리고 그녀의 옆에 있는 비올라를 마음속으로 좋아하기에 말이다….
“그럼 조속히. 시작할까요?”
“응?”
“클레어 벗으렴”
“……. 예…. 마담….”
비올라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마음을 다잡은 클레어는 자신의 목 뒤에 엮여 있는 줄은 풀었다. 그러자 하늘거리는 드레스가 그녀의 몸에서 흘러내려 땅에 떨어졌고 그녀는 사타구니에 하나 걸친 속옷을 제외한 모든 살결을 드러낸 상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