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125화, 왕궁 회의
“카프리온 공작이 택한 1 왕자 파의 결혼 상대라는 자는 어떤 사람이지?”
“1 왕자에게 골수까지 충성을 바치는친한 사이예요.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아니 잘 알고 있지만,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입지를 다시 공고히 하기 위해 이 작전을 고집하고 있는 겁니다. 결혼으로 끈끈하게 묶이게 되면 아무리 충성을 바치는 주군도 점점 멀게 느껴질 거라는 말을 했다 합니다. 아무리 머리 쓰는 일을 잘 하지 않는 클레어 자작이라도 이것이 안 될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답답한 거죠. 왕국에 무부 가문으로서 주군으로 택한 2 왕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니 명에 따라야 함이 옳지만…. 자기 몸을 바쳐서 해결될 일이라면 뭐가 아깝겠느냐마는 안될 일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데 해야 하니 속이 쓰린 겁니다.”
즉 상사가 까라면 까야 하는 처지인데 그 일이 절대 되지도 않을 무리수라 속앓이만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을 풀기 위해 술을 마시러 이 바이올렛에 와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려 했던 것일까….
술에 고주망태가 된 상태에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아양을 떠는 비올라를 보고는 심중에 있는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다 떠벌려 모든 것을 밀크까지 알게 되었다.
마음이 아파 속마음을 털어놓은 것이지만 이 일은 결코 2 왕자파 입장에서는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어찌 되었건 숨을 진탕 마신 그녀의 가벼운 입 때문에 중요한 작전이 새어나간 것이니 말이다.
밀크가 아니고 혹시나 1 왕자 파가 이 새어나간 작전을 알게 되면 어찌 되겠는가. 안 그래도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작전인데 잘못하면 역공을 당할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천만다행이고 그녀가 비올라를 좋아해서 바이올렛으로 왔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큰 곤란에 처했으리라.
“음…. 아직 그녀는 이곳에 있는 건가?”
“네. 적당히 상대해 주고 술도 많이 먹였으니 오늘은 아마 술 조금만 더 마시고 돌아갈 거라….”
{“잠깐만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손님! 방으로 돌아가 주세요!!!”}
{“시끄러워! 바이올렛! 바이올렛을 데려와! 난 아직 기분이 덜 풀렸어! 아아!!! 내 사랑하는 바이올렛! 제발 나와 더 있어 줘! 이대로는 도저히 못 돌아간다고!!!”}
비올라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을 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여성 종업원의 목소리와 함께 그녀와 대치 중인 카랑카랑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부러 목소리를 강하게 내리깔아 여성의 목소리지만 중성적인 느낌이 강했고 목소리에도 힘이 넘친다. 술에 취해 고주망태가 되어 고성방가하는 것 치고는 아직 정신은 또렷한 모양인지 음성의 높낮이가 마구 이탈되지는 않았다.
“휴…. 진정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아무래도 오늘은 이대로 돌아가지 않을 거 같네요. 같은 여자로서 그 기분은 이해하지만 이대로는 영업에 지장이 생길 테니 밀크님은 여기서 잠시 더 기다려 주시겠나요? 제가 물러가게 만들고 오겠습니다.”
“얼굴 보여서 좋을 건 없지. 알았다. 여기서 기다릴게.”
“로크웰. 같이 가자꾸나. 네가 있으면 클레어 자작도 좀 얌전해질 거야.”
“네 마담.”
바이올렛의 단골들은 여기서 일하는 로크웰이 비올라의 양아들에 해당한다는 것을 대부분 알고 있었고 그것은 클레어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비올라를 좋아하는 그녀일지라도 아들과도 같은 로크웰이 함께하고 있는데 어쩔쏘냐.
두 사람이 문을 열고 나가자 잠시 후 카랑카랑하게 복도에서 울리던 클레어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아무래도 원만하게 잘 해결된 모양이다.
“그나저나…. 클레어 자작과 카프리온 공작이라…. 2 왕자 쪽에 폭탄이 터질 거 같은 조짐이로군.”
테이블 위에 올려진 술잔을 들어 목으로 넘기는 밀크, 그렇게 클레어의 소란스러운 행패가 끝나고 자줏빛 바이올렛의 밤이 지나갔다.
*****
첼슨 왕국 2 왕자의 개인 훈련장
“후…. 지치는군.”
목검을 들고 한껏 힘차게 검무를 추던 2 왕자, 잠시 땀을 닦아내며 상쾌하게 운동을 한 몸을 천천히 풀고 있을 때, 그에게 접근하는 병사 복장을 한 남자가 있었다.
“왕자 전하 리그릿 후작님이 찾아뵈웠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가리안이? 들라 해라.”
그의 허락이 있자 병사는 밖으로 나갔고 잠시 후 한 남자와 함께 훈련장으로 들어왔다. 병사가 인사와 함께 밖으로 나가니 같이 들어온 남자가 공손히 인사를 올린 뒤 조용히 그에게 뭔가를 말했다.
가리안 리그릿 후작, 실질적으로 2 왕자 파의 제대로 된 머리 역할을 하는 자로 카프리온 보다는 조심스럽고 확실한 계략을 짜내 2 왕자를 보좌하고 그를 따르는 귀족들을 통제하는 인물이다.
다만, 겉으로 나서지 않고 언제나 어두운 그림자처럼 2 왕자의 중요 명령만 처리하기에 대부분 귀족이 카프리온 공작이 어쩌다가 뒷걸음에 쥐를 잡듯 지금까지 2 왕자 파를 이끌어 온 것으로 알고 있었다.
“전하. 바로 어제 바이올렛에서 큰 소란이 있었습니다.”
“음? 바이올렛에서? 그곳은 우리와 긴밀하게 연결된 곳이니 절대 건들지 말라 이야기했을 텐데”
“우리 측 마이올 자작이 전날 바이올렛을 찾았다고 합니다. 아시겠지만, 마이올 자작은 여자이면서 같은 여성을 밝히기로 소문이 나 있지요. 이 일로 오늘 아침부터 귀족가가 소란스럽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신분을 숨기고 조용히 다녀와야 하는데 마이올 자작은 무슨 이유인지 어젯밤 만취하여 바이올렛에 방문하였고 그가 이동한 경로가 모두 포착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귀족의 명예를 더럽힌 그를 유포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입니다.”
“뭐야? 아니…. 마이올 자작이 성격이 유달리 불같은 건 내 잘 알고 있지만, 그 정도로 앞뒤 안 가릴 사람은 절대 아니거늘….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구원해야 해. 우리 쪽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조부인 전 전대 자작은 내 생명의 은인이야. 그 보답을 하기 위해서라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상황이 급한 것을 전해 들은 2 왕자는 바로 채비를 갖추고 왕국 회의실로 나아갔다. 평소라면 이곳은 그냥 귀족들에게 맡겨두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얼굴을 내미는 식이었지만, 이번 일은 그가 꼭 참석해야 할 일이었다.
시종이 2왕자의 참석을 알리고 대전의 문이 열렸다. 겨우 숨만 붙어서 오늘내일하고 있는 첼슨 국왕의 비어버린 왕좌의 옆으로 왕자들이 앉을 수 있는 의자에 가장 먼저 착석해 있는 1 왕자 루크렌, 화려한 이목구비에 입만 안 열고 있으면 얼굴만으로도 반은 먹고 들어가는 미남자….
그에 비하면 꽃미남이라 할 수는 없지만, 남자답게 생겼다고 할 수 있는 2 왕자가 1 왕자에 전혀 꿀리는 것이 없다는 듯 당당히 대전을 가로질러 왕자들의 의자에 착석하기 전에 가볍게 형인 루크렌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그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아우에게 자리를 권하였고. 그에 따라 톨메오가 자리에 앉았다.
“애석한 일로 이 자리에 모이게 되어 참으로 비통하오. 어젯밤 귀족의 명예도 모르는 자가 함부로 집창촌에 발을 들여 행패를 부렸다고 하오. 이 일의 주범으로 지금 막 체포된 마이올 자작이 오고 있으니 어디 이야기나 들어 봅시다.”
1 왕자는 정말 애석하다는 표정을 하며 좌중에 소리높여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여성이 밧줄에 묶여 대전 안으로 끌려들어 왔으니 그녀가 바로 클레어 마이올 자작이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강직한 얼굴, 그리고 검으로 단련된 군살 없는 몸과 날렵해 보이는 외향 전체적으로 야성적인 구릿빛의 전사가 연상되는 여성이었다. 가슴 부분은 붕대 같은 것으로 동여맨 모양인지 평평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클레어 마이올 자작. 그대는 어제 술에 잔뜩 취하여 집창촌을 배회하다가 자줏빛의 바이올렛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문란하게 놀고 질펀하게 즐긴 귀족으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한 것으로 주변에서 정황 증거가 포착되었다. 이에 변론할 점이 있는가?”
가증스럽게도 1 왕자는 2 왕자 파인 클레어 마이올을 상대로연극과고 같은 조리돌림을 시작했다.
집창촌은 첼슨 왕국의 어두운 부분, 귀족들은 서로에게 알리지 않고 자신의 신분을 숨기며 자주 그곳엘 들락거린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여성이 있으면 품고 술을 즐기며 광란의 시간을 보낸다.
누구나 다 하는 일이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의 신분을 숨긴 뒤에야 가능한 일, 지금의 클레어처럼 자신의 행적을 속속들이 밝히면서 뒤가 켕길 짓을 하고 돌아다닐 경우는 주변의 눈총을 받으며 질책을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신분을 숨기고 집창촌에서 즐겁게 지낸 귀족은 잡아서 문책하기 힘들다. 그를 문책하기 위해 바뀐 신분을 조사하다 보면 신분을 숨기고 놀고 있던 귀족들이 무더기로 줄줄이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귀족 하나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다 태울 수도 있는 일이라 너도나도 그냥 조용히 즐기며 쉬쉬하곤 하지만, 지금처럼 자신의 신분을 노출한 상태로 즐기다가 걸린 경우는 상대방에게 물어뜯을 빌미를 제공한 것이기에 할 말이 없었다.
클레어라는 빌미를 잡은 1 왕자는 안 그래도 2 왕자에게 입지가 점점 밀리는 와중이었는데 기회는 이때라는 심정으로 잔뜩 독을 품고 클레어를 물어뜯고 있었다. 클레어 자작을 구명하기 위해 2 왕자 파가 움직이면 정치적으로 밀리게 되니 자신들에게 추가 기울 것이요 구명하지 않는다면 이대로 클레어 자작을 귀족가에서 축출해 버릴 생각이었다.
어느 쪽이라도 자신에게는 불리함이 전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기회를 잘 사용하여 자신들의 입지를 공고히 할 생각이 가득했다.
“…….”
클레어는 말이 없었다. 고개만 숙이고 묵묵히 1 왕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잘못은 잘못이다. 여기서 구차하게 떠들어 봐야 더 한 빌미를 주게 될 뿐이었다. 술에 취해 실수하여 기억이 안 난다. 같은 변명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무가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클레어 자작! 입을 다물지 말고 말을 좀 하세요!!! 이거야 원…. 다 된 밥에 코를 빠트려도 유분수지 조용히 때를 기다리라는 내 말을 허투루 들은 겁니까 뭡니까!!!”
뱃살이 두툼한 남자 귀족이 앞으로 나서며 클레어 자작을 성토했다. 2 왕자 파 사람들이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고 2 왕자도 짧게 눈인사를 해주었다. 그의 정체는바로 카프리온 공작이었다.
지낭이라는 별명이 어울리지 않는 몽땅한 키에 배불뚝이, 줄여서 말하자면 짧뚱한 남자다. 얼굴에도 볼살이 푸짐했으며 입고 있는 옷 때문에 풍선이 둥둥 떠다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남자였다.
그는 분노로 푸들거리는 볼살을 마구 출렁이며 그녀를 사정없이 몰아붙였지만, 클레어는 묵묵부답, 마치 모든 죄를 그냥 자기가 지고 가겠다는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자 공작은 그만 진정하세요. 이거 아무래도 죄에 대한 증거가 너무 명확하여 변명할 여지도 없는 모양입니다. 그래도 귀족가의 일원이었던 바 모욕은 이쯤에서 충분하다 보니 이제 그녀에게 내릴 벌을 여기서 정하였으면 합니다.”
1 왕자 선언에 따라 모두가 입을 열고 발언을 시작했다. 2 왕자 파는 최소한 축출만큼은 막으려고 애를 썼고 1 왕자 파는 어떻게 해서든 2 왕자 파의 힘을 줄이기 위해 그녀를 축출하려고 했다.
귀족가에서 축출당하면 그녀는 평민이 되고 그 자리는 아이가 있으면 아이에게 넘어가며 만약 아이가 없다면 방계의 남성에게 넘어가게 된다. 당연히 클레어는 남자를 극도로 싫어하는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사생아도 없으니 자작의 자리는 방계 가족 남자에게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정말 우습게도 마이올 자작의 다음 대를 이을 방계 출신 남동생인 홀리건 마이올은 1 왕자 측에서 일하는 하급 관료 출신이다.
즉 이 싸움은 이제 1 왕자 파가 하나 더 늘어나 힘을 늘리느냐. 아니면 2 왕자 파가 그녀를 보호하는 데 성공하여 입지가 조금 좁혀지는 선에서 끝이 나느냐였다. 전자든 후자든 1 왕자 파가 유리한 것은 다름없었다.
갑론을박이 계속 이어지고 카프리온 공작은 어떻게 해서든 마이올 자작의 입을 열어 죄에 대해 사죄를 하게 하려고 하였으나 그녀는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진저리가 난 듯한 표정으로 공작을 쏘아보는 것을 보니 이번 작전에 반대한 그녀가 차라리 이걸로 잘 되었다 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일의 정황을 자세하게 알진 못해도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일이 있긴 하다는 것을 직감한 2 왕자는 리그릿 후작을 조용히 불러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있었는지 조사를 해보라고 바이올렛에 그를 파견했다.
2 왕자도 클레어가 바이올렛에 다니는 것을, 그리고 바이올렛의 마담을 좋아하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술을 마시고 그곳에서 놀았다면 마담이 이 일에 대한 뭔가 정황을 알고 있으리라 추측한 것이다.
갑론을박이 한 참인 귀족 회의는 그대로 끝나지 않고 잠시 보류 상태가 되었다. 죄를 지은 마이올 자작은 감옥으로 갇히고 그녀의 죄가 결정 나는 날 감옥에서 빠져나오게 될 것이다.
한 귀족의 처우를 결정하는 일이기에 평민 나부랭이 다루듯 하루아침에 끝내버릴 문제가 아니었다. 그만큼 2 왕자는 정황 사정을 알아볼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조용히 자신의 집무실에 찾아온 리그릿 후작이 들려준 말을 경청한 2 왕자는 테이블을 내려쳤고 그 단단해 보이는 테이블이 그의 일격에 박살이 났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왕자는 검을 허리춤에 차고 무작정 달려 어딘가로 향했다. 그가 향한 곳은 바로 카프리온 공작이 기거하는 저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