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103화, 아인 연합의 투지
“퍼슨 릭스를 부축해줘.”
“예 대족장님.”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진 릭스를 부축하는 퍼슨, 그가 퍼슨의 부축을 받고 일어나자 밀크의 질문이 이어졌다.
“이단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 헤베나 성국의 추악한 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파빌로 신을 유일신이라 믿는 광신적 종파가 다른 헤베나의 종파를 무력으로 통합할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 결과적으로 헤베나의 국력이 많이 소요된 사건이었지만, 이 사건으로 파빌로 종파는 헤베나의 중추로 우뚝 서게 되었고 살아남은 다른 종파는 파빌로가 이끄는 휘하 신이라는 명목으로 살아남게 되었지요.”
“흠….유일신이랄 때는 언제고 나중에는 말을 바꿔 하위 신이란 건가?”
“광신적 효과를 이용해 헤베나를 장악한 것은 좋았으나 정작 모든 종파를 다 죽여버리면,지배하는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리하여 헤베나는 고위신 파빌로를중심으로 한 12명의 하위 신으로 이루어진 종파가 자리를 잡아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그 당시 여러 신을 믿고 있던 40개 이상의 종파가 사라졌으며 죽은 자의 수는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였으니 그들이 흘린 피가 강을 이루었다는 설화까지 있을 정도로 끔찍한 학살의 과거입니다. 그리고 그런 학살의 현장에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정당하게 바꿔준 것이 바로 이단입니다.”
“음….”
이곳 인간들은 같은 동족을 의미없이 죽이곤 한다. 귀족들이, 그리고 왕족들이 자신의 길을 막아섰다는 이유로 평민을 죽이고 딸이 어여쁘다는 이유로 왕족이 부모를 죽이고 딸을 겁탈한다. 그리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딸마저 죽이는 세상이지 않은가.
그렇게 인간들의 생명이 파리 목숨보다 못한 이곳에서조차 끔찍한 학살의 과거라고 명명했을 정도이니 당시에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과거 이 세상에 처음 깨어났을 때 자신이 인간이 아닌 아인이라는 이유로 잠시 절망을 했던 그였다. 그러나 지금의 이야기를 들으니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참으로 감사한 마음마저 들었다.
뭐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이고 설명도 다 들었으니 이제는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야 할 때였다.
“그럼 지금 렘톤 마을은 쑥대밭이 되어 있겠군….”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살인귀들이 따로 없었습니다. 아이 노인 할 거 없이 닥치는 대로…. 생명이라고는 단 하나도 살려두지 않을 생각인 거 같았습니다. 상단 전투원들의 희생이 아니었으면 저희도 그 자리에서 모두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
“큭…. 죄송합니다. 상단주님…. 상단의 물품들이 모조리 타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상단원들의 말에 릭스는 불같이 화를 내며 그들을 꾸짖었다.
“재물은 다시 모으면 돼 이 어리석은 놈들아! 너희라도 살아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아느냐! 그런 객쩍은 소리 하지 말고 상처나 치료하거라!”
그의 말에 울상을 한 상단원들이 모두 감사의 인사를 올리며 여전사들의 안내를 받아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그나저나 큰일입니다. 설마 저들이 이렇게빨리 올 줄이야…. 식량과 무기를 대거 구해 왔었는데 그것이 전부 저들 배만 채워주게 생겼군요…. 일이 이리되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퍼슨 자네 잘못이 아니야.차라리 모두 데려오라고 할 것을 아무 말도 안 해서 날 배려해 준거 아닌가. 나도 미안하지. 그런데 저들이 왜 이단이다. 뭐다. 미쳐서 발광하는 거지? 렘톤에 무슨 문제라도 있던 건가?”
“아마…. 방금 대족장님이 여신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것 때문에 마을을 몰살한다고?”
밀크는 설마 그렇겠나? 하는 표정이었지만 퍼슨은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진 표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가설을 밀크에게 설명했다.
“놈들은 아직 이곳에 홀스타으로스 마을이 있는 것을 모릅니다. 저희 상단에서 정보를 최대한 막은 것도 한몫하고 렘톤 마을은 왕국에서 먼 벽촌이기 때문에 사람의 왕래도 거의 없고 다들 가난한 농노들 뿐이기에 이곳으로 이주하는 사람도 없죠. 그러므로 놈들은 방금 일어난 현상이 렘톤마을에서 일어난 것으로 생각할 확률이 높습니다.”
“황금 여신상에서 눈부신 황금빛이 뿜어져 나온 것은 사실이야. 그러나 산 아래쪽에 있는 마을에서도 이 빛을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지. 이곳으로 오는 도중이었다면 도저히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를 텐데?”
“그건 아니지.”
“도칸?”
퍼슨과 밀크의 대화에 도칸이 끼어들었다.
“대족장이 축복을 받는 순간 조금이라도 마력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피부가 간질거릴 정도로 정순한 마력이 주위로 뻗어져 나갔어. 이곳으로 오고 있는 행렬에 성기사단장이 함께 한다면 그 기운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지. 아마도 녀석들은 그 기운을 느낀 모양이다. 자기들이 섬기는 신이 유일신이라면서 다른 종파를 다 죽인 미친 광신도들인데 이 정도로 정순한 신의 마력을 느끼고 가만히 있을 리가 있을까? 렘톤마을의 일은 안되었지만, 이로써 놈들은 칸젤라와 릴리핀 이외에도 널 노리고 무조건 죽이려 들 거야.”
“즉…. 렘톤 마을을 학살한 이유가 그 같잖은 신을 우상 숭배하기 위함이란 말이야! 녀석들에게는 일말의 자비심도 없다는 거야?!”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니까요. 과거의 일을 최악의 학살로 칭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 일을 신께 바치는 최고의 성전이었다고 칭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운이 나쁘게도 파달로크는 후자에 가까운 인물이란 결론입니다.”
“내가 하나 묻지.”
주변을 돌아본 밀크는 아인들을 떠나 인간인 레이나와 퍼슨, 그리고 릭스를 한 번씩 바라보고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내가 지금부터 이곳으로 오는 인간들에게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려 한다. 대가를 치르면 이 아래에 있는 목숨은 모두 사라질 거야. 만약 이 결정에 따르지 못하겠다면 지금이 기회니까 이곳을 떠나. 아마 이곳에 남게 되면 너희는 아인편에 붙은 인간 배신자들이 될 테니까.”
밀크의 질문에 레이나는 고개를 저었다.
“전 이곳에 남을 거예요. 그리고 가족들을 죽인 놈들이 죽는 모습을 볼 겁니다. 가족들의 복수를 부탁드려요. 대족장님.”
핏발이 선 눈으로 밀크를 바라보는 레이나, 그녀의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슬픔과 분노 그리고 억울한 기분을 밀크도 느낄 수 있었다.
“저와 상단주님도 여기 남을 겁니다.”
“이미 이곳에 왔습니다. 다른 곳에 가봐야 길이 막막할 뿐이지요. 그리고 꼭 저희 상단원들의 복수도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말을 다 들어준 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뒤를 돌아 보며 도칸에게 말했다.
“미안하군. 바로 전투 준비를 해주겠어? 놈들이 그렇게 광신적인 모습을 보였다면 내일 온다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기다릴 수는 없겠어. 미리 선수를 쳐서 주요 지점을 정찰하고 놈들을 격퇴할 준비에 들어가자.”
“알았어 대족장. 바로 준비하지.”
“라파니.”
“예. 대족장.”
위도레빗 족장 라파니가 밀크의 부름에 대답하며 앞으로 나왔다.
“위도레빗들을 움직여 적진을 정찰해줘. 위험한 곳까지 갈 필요는 없어. 혹 적들이 이동하고 있으면 경로를 확인하고 바로 이리로 와서 보고해주면 돼.”
“알겠습니다. 대족장. 너희들 날 따라와라!”
라파니는 뒤에 거느린 위도레빗들을 이끌고 바로 마을을 나서서 출발했다. 그에 그치지 않고 밀크는 바로 다음 명령을 내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들을 안전한 곳으로 모셔라. 그리고 마을 사람들과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는 자들을 뒤로 물리고 마을 방어태세로 전환한다. 린다는 날 따라 최전선에 서고 유크와 벨은 일단의 전사들과 함께 마을 최후방을 방어한다.”
“대족장님! 저희도 싸울 수 있습니다!”
“부디 저희도 최전선으로 보내주세요!”
벨과 유크가 반발을 하고 나왔지만, 밀크는 고개를 흔들면서 두 사람의 어깨를 두드렸다.
“부탁한다. 믿을 수 있는 너희가 내 가족들을 지켜주었으면 해. 인간끼리의 전투에서도 명예 따위 집어치우고 비겁함으로 무장하는 인간들이야. 아인과의 전투인데 더하면 더 했지 덜할 수는 없을 테지. 안전한 후방이라고 절대 안심할 수는 없어. 그러니 가족들의 안위를 너희에게 맡기는 거야.”
“대족장님….”
“족장님….”
밀크가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니 더는 거부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무기를 들고 사람들을 이끌어 안전한 후방으로 이동하였다.
“우리도 참가하지.”
“칸젤라. 너희 부족의 인원은 너무 적어. 여기서 만약 더 죽는다면 정말 부족이 멸망할 수도 있다고.”
“아니. 여기서 물러나면 오거가 아니지. 죽어간 내 부족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도 난 싸워야 한다. 그러니 허락해 주기 바란다 대족장.”
결의에 찬 그녀의 눈빛을 본 미르, 유크와 벨이 밀크의 지시를 거부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그녀의 눈을 본 밀크는 그 결의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절대 위험한 행동은 하지 말고 몸을 사려. 칸젤라 네가 쓰러지면 이 일대의 오거는 정말 끝장이니까.”
“걱정해줘서 고맙군. 후후후”
왠지 기뻐 보이는 그녀의 모습, 밀크는 그녀의 뒤에서 두려운 표정이지만 뭔가 결단을 내린듯한 릴리핀을 바라보았다. 밀크의 시선이 닿자 릴리핀은 흠칫 놀랐지만, 이내 그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저도 함께하겠어요!”
“그래. 칸젤라를 허락한 이상 릴리핀만 따돌릴 수는 없지. 마찬가지로 너무 위험한 행동은 하지 말라고”
“가, 감사합니다!”
그렇게 밀크의 부족은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전투에 나서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은 후방으로 물러났고 밀크를 돕기 위해 온 아인들은 모두 마을을 끼고 방어구역을 점검하거나 함정을 파는 등 다가오는 헤베나를 막기 위한 준비를 했다.
그러던 와중 적들을 정찰하고 돌아온 라파니는 진두지휘를 하는 밀크에게 다가와 보고 듣고 온 것을 모두 소상히 보고했다.
“적들의 수야 이미 알고 계신 대로 일천입니다. 첼슨 왕국의 병사들은 하나도 없고 모두 헤베나의 병사들입니다.”
“그렇겠지.첼슨의 병사들을 그들에게 내어준다면 1 왕자의 입지와 힘이 모두 줄어드니까. 아무리 멍청해도 그걸 허락할 리가 없지.”
“이어서 다행히 놈들은 렘톤 마을을 조금 벗어난 지점에 천막을 펼치고 하루를 보낼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가까운 곳에서 지휘관급이 하는 말을 엿들어보니 내일 아침 일찍 산을 포위하여 말살 작전을 시작한다는군요.”
“얼마나 가까이 갔다가 온 거야? 위험한 일은 하지 말라고 했지 않았나.”
“호호~ 저희 귀는 아주 좋답니다.”
그리 말하며 자신의 긴 토끼귀를 만지작거리는 라파니, 가까이 가기는 했지만, 적들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렘톤도 보고 왔어?”
“예…. 그러나 안 듣는 편이 좋을 거 같아요.”
뒷말을 흐리는 그녀의 모습에 밀크는 고개를 흔들면서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아니야 듣지.”
“그럼….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어 있습니다. 같은 인간끼리 어떻게 그리 심한 짓을 할 수 있는지 제가 인간이 아닌데도 죽은 자들이불쌍하더군요. 인간들은 모두 죽어서 무덤조차 없이 바닥을 굴러다녔고 살아남은 동물도 없었습니다. 한뿌리의 식물조차 마을에 있는걸 허락지 않겠다는 건지 불까지 질러서 놓아서 지금은 집도 모두 타들어 가서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심하군….”
렘톤 마을에는 딱 한 번 가보았다. 레이나와 만나기 위한 여행길이었다. 그것 말고는 렘톤과 인연이 없지만, 이웃 마을이었다는 점에 마음이 아팠다. 그들을 마음속으로 애도해준 밀크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놈들을 죽이는 것에 일말의 자비심도 없어졌다. 아인들을 무시하면 어떻게 되는지 오늘 세상에 똑똑히 보여주도록 하지.”
“예 대족장님!”
“정찰에 다녀온 위도레빗들을 쉬게 해주고 라파니는 나와 함께 전방에 서도록 하자고.”
“그럴게요. 그럼 아이들을 쉬게 하고 다시 오겠습니다.”
라파니가 위도레빗들과 함께 마을로 들어갔다. 그때 울타리 작업이 한창이었던 도칸이 밀크에게 다가왔다.
“울타리 준비는 모두 끝났어. 그런데 울타리를 왜 이렇게 미로처럼 배치하는 거지?”
“낮은 울타리가 아닌 높은 울타리라 적들이 뛰어서 넘을 수가 없거든, 결국 마을로 다가오기 위해서는 이미로 같은 울타리를 넘어와야 하지. 적들의 발을 묶고 안전하게 공격하기 위한 장치라고나 할까? 거기에 울타리 사이사이로 화살이 들어온다고 해도 다음 울타리에 걸려서 소용이 없어져 버리거든.”
“화공에 당하면 다 타버리는 거 아냐?”
“그래서 열심히 물을 뿌렸잖아.”
“아! 그렇군. 젖은 나무니까 불에 타지 않겠어.”
“울타리 주변은 빽빽한 나무 때문에 진입할 수 없고 거기에도 물을 잔뜩 뿌려두었기 때문에 불은 이제 우리 위협이 안 돼. 나머지는”
훙!
밀크가 집어 던진 투창이 울타리를 뚫고 들어가 관통하였다. 화살의 힘으로는 울타리를 뚫지 못했지만, 투창은 달랐다.
“사냥뿐이지.”
“곡소리가 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