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99화, 아인 연합.
어느 저택의 접대실
“흠….”
탁!
귀티가 잘잘 흘러넘치는 남자, 천박한 행동거지와 말투만 아니면 능히 한 나라의 왕자로서 존경을 모두 받아야 마땅한 인물이지만, 입만 열면 겉으로 드러난 모든 것이 다 깨져버리는 첼슨 왕국의 1 왕자 루크렌. 고민의 고민을 하다가 말판 위에 있던 작은 보석으로 만들어진 붉은빛의 말을 조종해 푸른빛의 말을 잡아낸다.
“후- 한번 한번이 살얼음판 같구려. 이거 파달로크님의 실력이 보통이 아닙니다. 하하하”
경박하게 웃어넘기면서 자신이 잡아낸 파란 말을 흔들어 보이는 왕자. 파달로크는 그런 모습에도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내 파달로크는 그의 웃음소리가 줄어드는 동시에 자신의 말을 움직여 왕자의 가장 중요한 말을 잡아냈다.
“끝이군요.”
“헉?!”
완벽한 한 수, 이 세계의 체스라고 할 수 있는 적청전쟁이라는 이 고상한 귀족들의 게임은 과거 두 제국의 싸움을 나름대로 고증과 내용을 살려 만들어낸 고위층의 놀이였다.
지금 막 파달로크의 말은 루크렌의 중요한 말을 잡아냄과 동시에 루크렌의 중추인 황제의 앞에 다가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루크렌이 아무리 머릴 짜내고 말판을 살펴봐도 빠져나갈 구멍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인상을 쓰며 그 특유의 아름다운 얼굴을 마구 찌푸린 왕자는 하는 수 없이 두 손을 들면서 항복을 선언, 게임은 그렇게 파달로크의 승리가 되었다.
“이거 참…. 약속대로 아인 노예들은 그쪽에 넘기도록 하지요. 이렇게 숨은 한 수가 있었다니 다시 봐야겠소 파달로크경.”
“왕자님의 실력도 대단하십니다. 이번에는 제게 운이 따랐을 뿐….”
“그래 수색은 좀 어떻소? 그 오거와 서큐버스들의 행방은 찾은 거요? 우리도 최대한 도움을 주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 알다시피 우리 왕국이 지금 좀 시끄러워서 말이오.”
왕자들끼리 내분이 일어나서 다음 왕권을 노리고 싸우는 중이라는 것을 돌려서 말한 것이었다.
“덕분에 점점 윤곽이 잡혀가는 중입니다. 지원은 지금 이 정도도 충분하니. 남은 건 저희가 알아서 하지요.”
우리 일이니 참견하지 말라는 뜻이었으나 왕자는 그 뜻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도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말씀하시오. 내 왕국 사정이 허락하는 한 도움을 줄 터이니.”
“알겠습니다. 왕자님.”
그렇게 게임을한 번 끝낸 왕자는 옆에서 기다리는 시종에게 명하여 끌고 온 아인 포로들을 두고 저택에서 떠났다. 떠난 왕자의 뒤로는 위도레빗, 미노타우로스를 비롯한 수많은 아인들 포로가 무릎이 꿇려져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본국으로 끌고 가서 모두 노예 사역장에 넣는다. 반항하는 것들은 단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예 단장님!”
“쥴라”
“예…. 여기 있습니다.”
흰색 로브를 걸친 냉혹한 표정의 여자가 자신을 부르는 파달로크 앞에 나타나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인사에 대충 손을 휘휘 저어 인사를 대신한 파달로크는 그녀에게 현재까지의 상황을 질문하였다.
“어디까지 수색했지?”
“왕국 중앙부터 조금 떨어진 지역까지는 모두 수색이 끝났습니다. 이제 외각의 벽촌들만 남아 있습니다.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걸 보아하니 이 벽촌의, 그것도 산지나 숲속에숨어들어 갔을 공산이 매우 큽니다.”
“그랬겠지. 천한 아인들이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인들 못 하겠어. 웬만한 녀석들이면 찾아다니지도 않았을 테지만, 놈들은 이 오거와 서큐버스를 지배하는 우두머리다. 찾아서 죽이거나 확실하게 통제가 가능한 상태를 만들어야 해. 안 그러면 토벌한 의미가 없어.”
“잘 알고 있습니다. 본국 최고의 아인 수색자를 동행시켰으니 얼마 안 있어 소식이 들려올 겁니다.”
“파달로크님!”
그때 여자의 뒤에서 달려 들어오는 한 남자 성기사, 파발로크와 줄라의 순서로 인사를 끝낸 그는 조용한 어조로 두 사람에게 달려온 이유를 밝혔다.
“찾았습니다.”
“그래?”
“예…. 그런데…. 수색자가 사망했습니다.”
“음?”
“전투능력이 뛰어난 수색자다. 무슨 허보를 받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주의해라.”
남자의 말에 파달로크는 의아함을, 그리고 줄라는 그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하며 으르렁 그렸다. 그러나 남자는 당황하지 않고 평정을 유지하며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수색자와 같이 간 저희 신도가 통신의 은혜로 전해온 위치와 내용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내용을 전하자마자 신도와의 통신은 끊겨버렸습니다. 누군가의 공격을 받았다는 걸 뜻합니다. 높은 확률로 도망친 오거와 서큐버스의 공격이 있었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 두 년이라면 가능한 이야기로군, 신관이 아닌 신도는 그 두 놈의 마기를 잠재울 수 없을 테니까. 제아무리 전투에 능한 수색자라도 마기를 잠재우지 못한 아인을 상대하는 건 힘들었을 테지. 잘 알았다. 가서 대기해라.”
“예!!!”
남자가 물러나자 줄은 파발로크이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땅에 박았다. 그리고는 죄를 청하면서 투기를 불태웠다.
“이 실책은 저의 죄입니다. 부디 그 아인 년들은 제 손으로 죽일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됐다. 나도 같이 가겠다. 신관의 수가 부족하니 놈들의 마기를 잠재우려면 나 역시 같이 가야 할 것이다.”
“하, 하지만.”
“그만!”
파달로크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저택에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에서는 황금빛의 물결과도 같은 신성력이라 칭한 마력이 뿜어져 나와 저택 내부의 모든 사람의 몸을 억눌렀다.
“큭!”
“윽!”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는다른 성기사들, 줄라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할 정도로 엄청난 마력의 파동이었다.
“이견은 받지 않는다. 두 년을 놓친 것은 다름 아닌 내 실책, 내가 해결해야 마땅하다. 출발 준비를 서둘러라. 가는 김에 이 오거와 서큐버스들도 모조리 끌고 간다.”
“단장님?”
“포로에 대한 대우는 우리 인간들에게나 해당하는 것이지. 아인들 따위에 대우는 무슨. 다 끌고 가서 두 년의 저항이 만만치 않으면 포로들의 목숨으로 놈들을 사로잡을 것이다.”
“과연…. 알겠습니다. 단장님.”
그렇게 첼슨 왕국에서 조용히 수색하고 있던 헤베나의 성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움직이도록 만든 곳은 지금 죽이거나 사로잡은 인간들을 대동하여 밀크의 부족으로 향하고 있었다.
얼마 후 밀크의 부족에서는 여러 부족의 수장들이 모여 대책 회의를 벌이고 있었다. 켄타우로스, 하피, 위도레빗, 미노타우로스, 엘프와 오거, 그리고 서큐버스와 처음 보는 아인, 마지막으로 이 마을의 주인인 홀스타우로스 밀크
밀크의 넓은 저택이 좁다고 느껴질 정도로 모인 면면들이 다양했는데 그중에서도 처음 보는 여성의 존재에 밀크가 그녀를 데리고 온 위도레빗의 지도자 라파니를 바라보니 그녀가 그 여성을 밀크에게 소개해 주었다.
“이쪽은 워 타이거 부족을 이끄는 타니아, 아무래도 이번 일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니까 내가 불렀어. 타니아. 이쪽이 밀크 족장이야. 내가 자주 말한 적 있지?”
“귀에 딱지 앉을 정도로…. 뭐 이런 딱딱한 자리 말고 따로 만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 아무튼, 잘 부탁해 밀크 족장. 워타이거 부족을 이끄는 타니아야.”
“잘 부탁해 타니아. 라파니와 친구라면 나에게도 친구지.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후후후. 성격이 시원해서 좋은데? 그보다 회의 시작하기 전에 먼저 알아두어야 할 내용이 있어. 위도레빗들과 함께 이리로 이동하다가 밀크의 마을 주변에서 수상한 인간들을 사로잡았다. 그중 몇은 격렬하게 저항하다가 우리 손에 죽었고 세 명은 목숨을 살려 데려왔어. 아무래도 이번 일과 전혀 연관이 없진 않을 거 같으니까 나중에 심문을 해봐야 할 거 같아.”
“잘했어. 타니아. 그 문제는 나중에 살펴보도록 하고 지금은 이렇게 모두 모여준부족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죠. 모두 내용은 서신으로 전해서 알고 있다시피오거와 서큐버스 일족이 신성왕국 헤베나의 공격으로 부족이 거의 전멸할 정도의 피해를 받았습니다. 하피퀸 바토리님의 인도로 우리 홀스타우로스가 두 분을 보호하는 중이고 얼마 전 두 사람은 정식으로 저희 부족에 망명을 요청하여 이젠 내 부족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잠시 설명을 끝낸 밀크는 옆에 있는 차를 한 모금 마셔 입을 축이고는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문제는 헤베나 왕국이 오거와 서큐버스를 끝으로 그들의 야욕이 잠재워지지 않을 거란 것이지요. 지금 헤베나의 첨병으로 와 있는 파달로크라는 성기사 단장이 이끄는 무리가 첼슨 왕국에 들어와 있습니다. 왕국에 연이 닿아 있는 상단이 알리기로는 인간외 무리, 즉 아인들에 대한 탄압이 매우 심하다고 합니다. 이는 헤베나 왕국의 야욕이 이미 두 종족을 넘어 모든아인들에게 닿아 있다는 뜻입니다. 하여 이 일을 모든 아인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뭉쳐야 한다고 생각해 이런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모여든 사람들의 면면, 부족의 일은 제사장과 최고 전사에게 맡겨두고 온 위도레빗 라파니와 부족의 중요한 일이 있기에 자리하지 못한 족장의 대리인 켄타우로스 크리스티아과 엘프 윈디아. 먼 거리지만 위기를 느껴 바로 달려 와준 미노타우로스 도칸, 부족의 일은 동생인 트루칸에게 맡겨둔 모양이다.
밀크의 휘하로 들어온 서큐버스 릴리핀과 오거 칸젤라, 그리고 하피들의 여왕인 바토리와 마지막으로 라파니의 요청으로 자리에 나온 워 타이거 타니아. 총 아홉의 부족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밀크의 말이 끝나자 칸젤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릴리핀과 함께 신성 왕국 헤베나의 만행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그녀의 이야기는 모두의 가슴에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헤베나 놈들은 아인들을 인간 이하로 보는 인간 우월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다. 우릴 상대로 그 어떠한 더러운 짓거리도 서슴지 않아. 어린아이도 나중에는 큰다는 이유로 무참히 학살하는 놈들이다. 물론…. 인간의 기준에서는 이미 성인 남자와 비슷한 키를 가졌을지라도…. 아이들이었는데 무참히 죽이고 짓밟았다. 무기를 들지도 않고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항복한 이들의 손목을 베고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범해졌다. 항복은 그야말로 노예가 된다는 뜻…. 그들은 우릴 철저하게 짓밟고 병탄해 버릴 생각뿐이야.”
부족이 헤베나에 의해 전멸의 위기를 겪은 그녀의 이야기였기에 더욱이 생생하게 와 닿는 느낌, 모든 부족의 족장과 그 대리로 온 이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칸젤라의 이야기가 끝나자 바로 다시 밀크가 이어받았다.
“일단 가장 급한 것은 여기 있는 분 중 대부분이 헤베나, 또는 첼슨 왕국의 국경과 가까운 곳에 있다는 점이죠. 홀스타우로스, 위도레빗, 엘프와 켄타우로스는 첼슨에 가깝고 나머지 분들이 헤베나와 가까울 겁니다. 놈들의 공격에서 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가까운 부족과의 연계가 필연적이죠. 놈들이 노리는 서큐버스와 오거의 생존자분들이 모두 여기 있으니 1차 공격지는 제가 다스리는 이 홀스타우로스 부족이 될 겁니다. 그 이후의 공격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일단 이 첫 충돌을 피해없이 이겨내는 것이 중요한 과제입니다.”
밀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미노타우로스를 다스리는 족장 도칸이 큰소리로 외치며 그의 말에 동조했다.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어서 동생에게 부족을 맡기고 최고의 전사들만 추려서 데려왔지. 마을 방어에 힘을 보탤 테니 말만 하라고 밀크. 어차피 헤베나가 우리 부족까지 오기 위해서는 거대한 산악지대를 넘어야 하는데 그곳에는 여기 계시는 하피 퀸께서 철통같이 지켜주고 계시니 난 이곳에서 널 도와주겠어.”
“저희 켄타우로스 역시 족장님께 부탁하여 이곳으로 전사들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어요. 이미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제가 따로 보낸 서신으로 알고 있는바. 저희도 도움을 드릴 겁니다.”
“저희 엘프 역시마찬가지예요. 켄타우로스가 도착하는 날 그들과 함께 도착할 겁니다.”
그 이후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전사를 파견하는 식으로 도움을 주진 못하지만, 그 외적인 부분으로 도움을 주는 이들의 말이 이어졌다.
“헤베나 왕궁의 정탐병들이 호시탐탐 우리의 터전을 노리고 있어. 하피 전사들을 보내주기 어렵지만, 정기적으로 버드맨을 보내 유용한 물품을 지원해 주지. 같이 이 위기를 헤쳐나가자꾸나.”
“저희 위도레빗은 빠른 발을 이용하여 이 상황을 전파하는 연락책의 역할을 하겠습니다. 마을을 지킬 전사들을 빼긴 어렵지만,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아인들과 이 주변의 모든 아인 부족을 찾아 소식을 전하고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모든 아인분들을 밀크 족장에게 합류시키죠.”
“우리 워 타이거는 소수 부족이야. 부족의 수는 많지 않지만 하나같이 강인한 이들뿐이지. 부족의 일은 내 휘하의 부하들이 알아서 처리할 테니 여긴 내가 남아서 도움을 주도록 하지.”
그렇게 밀크를 중심으로 한 아인 연합과 헤베나 왕국에서 오거와 서큐버스를 토벌하기 위해 첼슨 왕국으로 온 파달로크의 성기사단의 전투가 막이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