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93화, 신성 왕국 헤베나.
“밀크-! 너무 오랜만이구나. 그동안 잘 지냈느냐?”
족장의 방, 이른바 밀크의 집무실이라 할 수 있는곳으로 들어온 바토리는 하피 특유의 팔죽지 부분 날개를 예의 화려한 분위기의 드레스로 바꾸며 밀크에게 다가왔다.반가운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난 밀크는 인사를 하려다가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의 품에 거의 반 강제로 안기고 말았다.
“으풉!”
몰캉한 느낌과 함께 느껴지는 바토리의 가슴 감촉에 밀크는 잠시 몽롱하게정신을 놓았다가 이내 화들짝 놀라면서 그녀의 품에서 빠져 나왔다. 주변에 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의식한 모양이다.
“바토리! 반가운 건 알겠지만, 뒤에 손님분들도 계시는데 너무 예의 없어 보이잖아요.”
“후후후- 매정하게 굴기는, 괜찮단다. 여기 있는 두 사람은 내 오랜 친구 사이고 이미 너와 내가 끈끈한 사이라는 것도 내 미리 말해두었기 때문에다 알고 온 거란다.”
확실히 바토리가 돌발행동을 하였음에도 두 사람은 딱히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담담히 서 있을 뿐이었다. 아니 오히려 악마의 날개를 달고 있는 육감적인 몸의 여인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음흉한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오호- 네가 밀크의 아내로구나 만나는 건 처음이지? 정말 반갑구나. 그리고 또 네 남편을 함부로 취한 점 내 사과하마.”
“아닙니다. 여왕님, 처음 뵙겠습니다. 족장님의 첫 번째 부인인 밀리입니다. 옆으로는 두 번째 부인인 뷰렌과 부족 최고 전사인 린다, 그리고 부족의 제사장인 루피카라 하옵니다.”
아무리 아인들이 종족의 번영을 위해 성에 대한 인식이 개방적이라 해도 남편을 함부로 취한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이에 바토리가 먼저 사과함으로 분위기는 딱딱해지지 않고 화기애애하게 넘어가게 되었다.
“음- 그럼 이번에는 이쪽에서 소개할 차례로군, 자 밀크 이쪽부터 소개하마. 내가 다스리는 하피 부족과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고 있는 서큐버스 부족의 퀸인 릴리핀이다. 릴리핀, 이쪽이 바로 내가 그렇게 자랑하던 그 밀크야.”
릴리핀이라 소개받은 여성은 사람을 홀릴 정도로 아름다운 분홍빛을 발하는 부드러운 웨이브가 살아 있는 곱슬머리를 찰랑거리면서 고혹적인 자태로 밀크를 쳐다보고 있었다. 워낙 입술이 도톰해서 그런지 딱히 내밀고 있지도 않은데 키스를 부르는 듯한 느낌으로 튀어나와 있어서 더욱 뇌쇄적이었다.
여기에 더해지는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나온 완벽한 몸매에 꿀이라도 바른 건지 손대면 미끄러질 거 같은 몸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남자의 감각을 자극하도록 생긴 여성이다.
“후훗- 만나서 반가워요. 족장님. 바토리가 거창하게 소개했지만, 지금은 얼마 남지 않은 서큐버스를 겨우 이끄는 처지니까 그냥 편하게 불러도 좋아요.”
릴리핀의 소개가 끝나자 이번에는 그 옆에 있는 다른 여성에게 다가가는 바토리, 이어서 그녀의 소개가 시작되었다.
갈색 피부에 오른쪽 귀 위에 하나만 솟아올라 있는 거대한 뿔, 그리고 입술 사이로 튀어나와 있는 약간 무서워 보이면서도 뭔가 포인트가 잘 살아 있는 뾰족한 송곳니가 참 인상적인 여성이었다.
갑옷이 필요 없을 정도로 온몸을 철갑과도 같은 근육으로 무장하였으며 역동적으로 꿈틀거리는 근육은 갈색의 피부를 만나서 그야말로 여전사를 표현한다면 이런 여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흉하지 않고 오히려 색다른 매력이 돋보였다.
다만 여성의 상징인 가슴이 남자보다 약간 더 튀어나온 정도였으며 엉덩이는 분명 순산형이긴한데 살집과는 무관하게 순산형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키도 엄청나게 커서 부족 최고 전사이자 풍채가 남다른 린다가 오히려 왜소하게 보일 정도였으니 그녀의 위압감이 어느 정도일지는 따로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쪽은 오거 부족을 지배하는 거룩한 오거족 용사 여왕인 칸젤라란다.”
왠지 낮이 뜨거워지는 소개에 칸젤라라 소개된 여성이 쿵! 하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바토리를 흘겨보며 으르렁거렸다.
“그런 거창한 소개 좀 하지 말랬지? 그냥 용사면 충분하다.”
“어머- 그럴 수는 없지, 위대하고 거룩한 우리 오거 용사 여왕님을 그리 하찮게 소개하면 쓰나? 호호홋-”
다분히 장난기 가득한 바토리의 행동에 칸젤라는 계속 으르렁거리면서 양쪽 송곳니를 크게 부각했다. 그러나 바토리가 웃음기를 지우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 역시 으르렁거리던 것을 그만두고 밀크를 바라보며 스스로 소개를 시작했다.
“이 녀석이 한 말은 그냥 잊어라. 오거 용사 칸젤라다. 녀석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다. 앞으로 잘 부탁하마.”
“저도 잘 부탁해요. 칸젤라. 그런데…. 용사 여왕은 무슨 뜻인가요?”
“별 뜻 없다. 설명이복잡하니 나중에 알려주지. 그보다 오늘 우리가 찾아온 것은 중요한 이유가 있어서다. 자리를 좀 마련해 줄 수 있을까? 내용이 길어질 거 같으니 앉아서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군.”
칸젤라의 말에 그녀의 뒤에 있던 릴리핀과 바토리의 안색에 어두운 기운이 감돌았다. 분명 무거운 이야기가 이루어지리라 판단한 밀크는, 이후의 일은 밀리에게 일임하고 자신의 저택으로 향하였다.
석재로 지어진 아름다운 벽돌 건물을 본 세 사람은 다른 사람들처럼 탄성을 지르긴 했지만, 당장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런지 크게 와 닿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렇게 밀크의 저택으로 들어간 네 사람은 테이블을 중앙에 두고 앉아 시녀들이 가져다준 차와 다과를 나누며 찾아온 연유를 밝혔다.
“여기 있는 칸젤라와 릴리핀은 각기 종족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었지, 나와 비슷할 정도로 거대한 부족을 여럿 거느린 그야말로 여왕의 칭호가 아깝지 않은 이들이었는데 얼마 전 좋지 못한 일 때문에 부족이 괴멸 직전의 타격을 입게 되었지.”
“그런 일이 있었어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거죠?”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각기 밀크도 익히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종족들인데 그런 종족이 괴멸 직전까지 몰렸다니 어안이벙벙한 사태였다.
얼굴에 어두움이 가득해 보이는 칸젤라가 몸집에 비해 작아 보이는 테이블 위에 양팔을 올리면서 바토리의 말을 이어받았다.
“이곳 인간들의 나라인 첼슨 왕국과 좀 떨어져 있지만, 아슬아슬하게 국경이 닿아 있는 또 하나의 나라인 신성 왕국 헤베나가 있다. 이곳은 아인들을 무차별로 사냥하고 배척하는 나라로 우리 아인들의 공통된 적이나 다름없는 곳이지. 이번에 헤베나에서 새로운 교황 놈이 등극하면서 더욱 확실한 인간들의 세상을 만들겠다는 선포하에 대대적인 아인 몰살령이 내려졌다고 하더군. 녀석들과 가까운 곳에 둥지를 틀고 있던 여기 릴리핀의 부족과 내 부족은 그 녀석들의 첫 번째 목표가 되었고 일반 급한 대로 바토리에게 지원 요청을 보낸 뒤 방어가 쉬운 릴리핀의 부족의 협곡 지대로 피신하여 요격을 준비했는데…. 놈들의 공격이 너무 거센 나머지 바토리의 지원군이 오기도 전에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보고 이렇게 쫓겨오게 되었다.”
말을 끝낸 칸젤라는 아직도 분을 참을 수가 없는지 끓어 오르는 듯한 열기가 느껴지는 살기를 사방으로 퍼트리며 분노를 표출하였다.
그런 칸젤라의 어깨를 릴리핀의 부드러운 손이 다정하게 쓰다듬자 차츰 안정되는 모양인지 살기는 점점 줄어들었다. 가까운 곳에 부족의 보금자리가 있었다고 하니 여러모로 친한 사이인 듯했다.
“음…. 헤베나 왕국은 어떤 곳인가요? 저희 홀스타우로스 부족이 사실상 너무 단절된 생활을 하느라 세상과 제대로 된 소통을 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아 주변 정세에 좀 어둡습니다. 여러분의 정보를 공유해 주시면 감사히 경청하겠습니다.”
아직은 자신이 나서서 뭐라고 할 단계가 아니라 판단된 밀크는 우선 이 사태의 원흉인 나라 헤베나의 대한 정보를 원하였다. 그리고 그가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서큐버스 퀸인 릴리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헤베나 신성 왕국, 1000년 전 과거에는 제국이었지만, 종교적 파벌의 심각한 대립으로 인하여 국력이 심하게 소모되는 바람에 왕국으로 전락한 나라예요. 왕국으로 전락한 뒤에는 파벌 전쟁이 끝나 한 개의 파벌이 모든 권한을 부여잡았는데 이 종파는 인간에서 신이 된 존재이자 인간들의 자랑스러운 신 파빌로를 섬기는 종파예요. 이 파빌로를 섬기는 종파는 인간 우월주의의 시초가 되는 종파이며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에 포교 활동을 하여 인간 우월 아인 배척 사상을 주입하고 있는 더러운 자식들입니다…. 우리가 뭘 얼마나 잘못했다고 내 불쌍한 아이들을 그렇게 무참하게…. 흑….”
인간들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스러져간 안타까운 면면이 눈앞에 스르르 지나가지는 그녀의 눈에서는 슬픔을 담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 볼을 타고 내려가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감정이 북받친 것은 바토리도 마찬가지였고 칸젤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눈물을 참고 속으로 화를 다스리고 있었다.
과거 인간이었지만, 지금은 홀스타우로스로 그리고 한 부족의 대소사를 책임지는 족장으로서 완벽하게 자리 잡은 밀크는 아무리 인간일지라도 아인들을 그리 학살하다니 절대 좋은 감정으로 대할 수 없을 거 같았다.
지금은 그역시 아인이라는 것을 받아들였고 그렇기에 같은 아인들이 인간에게 학살을 당했다는 말에 속에서 열불이 올라와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에스타 상단의 부행수였다가, 현재는 밀크에게 감화된(자지에 사로잡혀) 상단의 행수 발렌만 하더라도 처음에는 밀크에게 적잖이 불쾌감을 드러내며 아인을 멸시하지 않았던가.
그런아인 멸시 사상을 최초로 만들어 내어 전 세계에 퍼트린 것이 바로 저 신성 왕국 헤베나라는 것이었다. 아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퍼트린 이 사상들은 마치 질병과도 같은 것이었다.
과거의 삶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하여튼 어딜 가든지 간에 광신적인 종교가 문제라고 속으로 욕을 한 밀크는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위로의 말을 전했다.
“마음고생들 많으셨습니다. 바토리와 제가 친구인 만큼 여러분 역시 친우로 대하겠습니다. 모쪼록 집이라 생각하고 편히 쉬세요. 혹시 이곳에 부족원들을 데려오신 건가요?”
“미안하다 밀크 족장. 바토리의 부족도 호시탐탐 공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녀석들이라 괴멸된 우리가 도움이 되지 못하고 발목을 잡을 거 같아서 차라리 멀리 떨어진 자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자 이렇게 찾아온 거야. 염치 불고하지만, 부디 우리 부족을 좀 살려줘….”
“저도 부탁드릴게요. 부디 저희 부족을 살려 주세요.”
전쟁에서 패한 부족의 망명 요청이었다. 과거의 밀크 부족이었으면 부족원들만 있으면 몰라도 다른 사람들까지 수용하기에는 빠듯한 식량 사정과 좁은 부족 마을이 크기 때문에 골머리를 좀 앓아야 했겠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인간들의 작물들을 구하여 농지도 건설하여 안정적인 식량의 수급도 가능해졌고 마을의 부지도 넓게 넓혔으며 아직 사용하지 않은 빈 공터도 얼마든지 있었다. 부족 하나둘 정도는 충분히 수용하고도 남을 공간이라 어떻게 사용할지 고민 중이었는데 차라리 놀리지 않고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거와 서큐버스는 각각의 위치에서 활약할 수 있었는데 오거의 경우는 부족 전부가 전사로 이루어진 힘이 좋은 부족으로전투 말고도 단순 노동에서도 충분한 힘을 발위하는 좋은 일꾼들이었다.
여기에 서큐버스는 밤눈이 좋아 야간 경비부터 잠입과 침투에 일가견이 있으며, 여러 가지 상태 이상을 부과하는 마법 능력을 다수 가진 다재다능한 종족이다.
살 터전을 내어주는 대신 이들의 협조를 받아 부족을 꾸려 나가면 아무래도 이득이 훨씬 많았기에 밀크로서도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다만 그 수가 얼마나 되느냐가 관건인데. 서큐버스 종족이야 기본적으로 몸집들이 고만고만해서 상관없지만, 오거의 경우는 가장 작은 키가 2M가 되는지라 그 수에 따라 부지를 더 확보해야 할 가능성도 있었다.
당장 민감한 주제이긴 했으나, 이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꼭 알아 두어야 할 내용이라 마음을 다잡은 밀크는 두 사람에게 질문들 던졌다.
“부족원의 수는 얼마나 되는 겁니까?”
“…….”
“…….”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왠지 용의 역린을 건드린 기분이 들어 밀크는 뻘쭘하게 두 사람의 이야기만 기다리고 있었고 상황을보고 있던 바토리는 한숨을 푹 내쉰뒤 두 사람을 대신해서 밀크에게 알려주었다.
“말하기 힘들 거야. 오거 부족은 칸젤라를 포함해 겨우 여섯 명만 살아남았고 서큐버스 부족은 목숨을 희생한 오거들 덕분에 릴리핀을 포함해서 스물이 살아남았어.”
쿵!
이것은 릴리핀이 테이블을 내려치는 소리도 아니고 칸젤라가 발을 구르는 소리도 아니었다. 밀크의 가슴에 거대한 바위가 하나가 올려지는 환상 속의 소리였다.
두 사람이 아까부터 말한 부족의 전멸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드디어 알 거 같았다. 말 그대로 이들은 소수만 남고 모조리 학살당한 것이다. 아인 멸시 주위에 빠질 대로 빠진 간악한 인간들의 손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