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82화, 전염을 막아라.
부족의 일원은 아니지만, 밀크에게 충성을 다 하는 여자가 그리되었다는 소식에 아연실색한 그는 바로 에스타 상단원들의 숙소로 달려갔다.
먼저 와 있던 루피카가 그녀의 상태를 살폈는데 다행히 초기에 병을 잡아 전염은 되지 않을 거리고 전해 왔다.
그녀가 토해낸 것들은 모두 한곳에 모은 후 땅에 깊이 묻어 이후에 일어날 전염 사태까지 모두 차단한 뒤 골골거리고 있지만, 조금씩 회복되는 기미가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밀크는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혹시 전염된 사람은 없어?”
“예, 다른 상단원들은 모두 괜찮아 보입니다. 다만 언제 발병할지 모르니 이미 병에 걸린 발렌 행수를 제외한 나머지 분들은 격리가 필요합니다.”
“하는 수 없지.”
밀크는 그 즉시 에스타 상단원들을 불러 모아 2일에서 3일간 각자의 집에서 쉴 것을 명했다. 어차피 행수인 발렌이 저 모양이라 그들이 할 일은 거의 없을 터, 그리고 상단과 거래한 물품은 이미 퍼슨이 가져갔으니 한동안은 괜찮을 것이다.
가뜩이나 의료 기술도 현저하게 적은 이 세계에서 전염병이 생긴다면, 그야말로 지옥이 펼쳐질 것이다. 잘못하면 자신들 때문에 렘톤 마을에 전염병이 번질 수도 있는 큰 사건이다.
“발렌의 주위에 약초를 태워 향을 피우고 앞으로 입맛이 없다고 해도 세끼 모두 먹여야 한다. 하나 더 주변 온도를 높여 몸의 땀을 내야 회복이 빠를 거야. 그리고 식료품 관리에도 더 신경을 써야 해. 자칫 상한 음식이라도 먹이는 날에는 증상이 악화할 수도 있어.”
“알겠습니다. 족장님.”
지시를 내리고 족장의 집으로 돌아온 밀크, 더위를 먹어 움직이기도 힘들던 몸이 전염병이라는 소식에 벌떡 일어났다.
하루, 이틀 삼 일이 지나도록 병을 떨쳐내지 못했던 발랜은 나흘째 되는 날 드디어 병세가 호전되어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아직 혈색이 나쁘고 볼이 홀쭉하여 힘들어 보이긴 했지만, 움직이는 것에는 전혀 지장이 없어 보였다.
다만 그녀가 일어나자마자 혹시나 했던 다른 인간들이 발작을 일으켰다. 다들 묽은 흰색 토사물을 토해내며 쓰러진 것이다.
다행히 발 빠른 대처를 통하여 전염은 이른 시간에 잡혔다. 그 이후로는 병세를 보이는 인간이 없었고 전염병에 걸린 이들도 모두 건강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초기에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밀크가 속해 있는 첼슨 왕국 이곳저곳에서 이미 전염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백성 25%가 전염되기에 이르렀다.
에스타 상단이 열심히뛰어다니긴 했지만, 그것으로는 왕국 전체를 구호할 수 없었다. 전염병을 무시한 첼슨 왕국은 그 업보를 톡톡히 치르는 중이었다.
“전염이 그렇게 심각하단 말이야?!”
“예 족장님.”
얼마 뒤 퍼슨은 다시 밀크의 부족을 찾았다. 받아간 젖을 모두 사용하여 추가분을 받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흰색 천을 입과 코에 감고 있었다. 마법적인 처리가 된 이 천은 밀크의 과거 지구에 있던 마스크와 비슷한 역할을 해주는 물건이었다.
다만 역시나 조잡하게 만들어져 있기에 통풍이 나쁘고 마법적인 처리를 했다곤 하지만 밖에서 들어오는 공기를 확실하게 정화해주진 못했다. 그야 이런 물건은 대량으로 생산을 해야 하니 1서클 이상의 정화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아니 첼슨 왕국의 왕은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초반에 잘만 대처하면 그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전염병을 손 놓고 있다가 이렇게 걷잡을 수 없게 만들어 버려?!”
“뭐….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까요.”
퍼슨의 말인즉슨 첼슨 왕국의 현 국왕인 버밀리온 첼슨이 오늘내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왕의 건강이 좋지 않으니 승냥이 같은 귀족들이 너도나도 들고일어나 각자의 수장을 내세워 다음 대 왕권을 노리고 전쟁에 들어가 그야말로 왕성은 아비규환이나 다름없어 민생을 돌보는 것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1 왕자 파와 2 왕 자파가 극렬하게 맞서 싸우는 중이었으며 여기에 꼴에 왕자라고 3 왕자와4 왕자까지 자신의 작은 세력을 이끌고 각축전에 뛰어들어 다음 대 왕권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왕자의 권한으로 자신을 전적으로 따르는 누나와 동생 공주를 유력 귀족에게 시집을 보내 정략결혼으로 자신의 힘을키우는 1 왕자와 이에 질세라 슬하의 딸이 많다는 것을 무기로 자신 역시 정략결혼에 뛰어드는 2 왕자
뛰어난 식견을 가지고 믿음직한 신료들을 끌어모으는 3 왕자와 어려서부터 무예가 뛰어나 군부의 지지를 한 몸에 받는 4 왕자 등 작금의 첼슨 왕국은 그야말로 혼란의 혼란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미치겠군. 버밀리인온가 하는 그 현 국왕은 쓰러지기 전에 다음 국왕 후보도 정해두지 않은 거야?”
“딴에는 자신이 그렇게 갑자기 자리에 누울지 몰랐을 겁니다. 버밀리온 국왕의 현 나이가 겨우 마흔다섯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 정말 젊잖아? 아니 뭐가 문제가 돼서 그렇게 쓰러진 거래?”
“그것이…. 이번에 새로 첩을 들이셨는데 밤중에…. 그게 잘못되어서….”
“어휴….”
결국, 밤에 힘 잘못 줬다가 이 사달이 났다는 것이다. 하여튼 그렇게 되어서 왕은 병상에 누워 골골거리고 있고 왕자들은 각축전을 벌이고 민생을 돌보는 일이 일개 상단에 일임되었다는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현 국왕이 얼마나 대단한 정치를 펼쳐 백성들의 지지도가 높은지는 알 바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 왕자들이 하는 짓거리가 그 아비가 이룬 것을 갉아먹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전염병의 확진 상태는 어때?”
“말도 마십시오. 심각합니다. 저희 상단원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감염되어 목숨까지 잃을 사람이 나올 정도입니다.”
“그리 심각하다고?! 아니 관리랑 예방이라는 걸 안 하는 거야?”
“그, 그것이…. 격리와 함께 시체 소각을 확실하게….”
“그거 말고!”
“그거 말고 또 뭐가 있습니까?”
퍼슨은 밀크가 하는 말이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행동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병에 걸리면 신관이나 마법사가 아닌 이상 바로 해결이 가능한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 첼슨 왕국은 마법사와 신관이 모두 존재하고 있다. 다만 그렇다 보니 의사라는 직업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나라였다.
회복마법은 마법사와 신관의 밥줄이다. 마법사가 전투 마법과 함께 외상 치료에 탁월한 마법을 알고 있다면 신관은 외상과 더불어 내상을 비롯하여 각종 저주와 질병을 회복하는 능력에 좀 더 심화하여 있다.
그렇다 보니 약초를 이용하거나 이외 모든 치료 행위는 마법사와 신관을 통해야만 가능하며 자발적인 치료 행위가 적발될 시에는 사술로 몰려 조리돌림을 당하고 그 즉시 즉결처분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 이 치료 행위가 또 비싸다. 그것도 입이 벌어질 정도로 비싸다. 한 가정이 평균적으로 두 달을 마음고생 없이 풍족하게 먹고 살 수 있는 돈이 1골드라고 했었는데 크건 작건 일단 치료를 받는 가격이 바로 이 1골드가 필요하다.
여기에 상처가 크면 클수록 추가 비용이 필요하고 약에도 비용이 있으며 만약 신관에게 내상 치료를 받게 되면 그야말로 억 소리가 절로 나오게 된다.
이렇다 보니 상처를 입거나 병에 걸려도 돈이 없는 백성들은 집에서 붕대를 묶거나 몰래 상비하고 있는 약을 아무 지식도 없이 처분하여 운이 좋아 완쾌되거나 운이 나빠 상처가 도져 죽거나 하곤 했다.
특히나 상처가 도져 생기는 파상풍에 걸려 죽는 일이 허다했고 돈이 있는 귀족의 경우가 아니고서야 신관 마법사의 치료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비싸게 값을 먹이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방금 말했던 귀족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기 몸 건강에 비싼 돈 쓰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기에 조금의 상처도 왕진비까지 시원하게 투척하여 치료를 받곤 했다.
“해서 백성들이 할 수 있는 대처라고는 끓인 물을 먹고 음식을 충분히 데워 따듯하게 먹는 것뿐입니다. 물론 여기에 청결도 충분히 신경을 쓰게 하고는 있지만, 첼슨 왕국은 수질이 좋지 않은 나라입니다. 산속에서 약수를 발견하지 않는 이상 물은 무조건 끓여서 먹어야 합니다.”
“아니…. 간단한 처방도 사술로 몰린단 말이야?”
“몰래 행하는 정도라면 모르지만, 대놓고 의료 행위를 하면 마법사와 신관의 견제를 받습니다. 물론 저희 같은 대상단이야 조용히 피해갈 수는 있지만, 일반 백성들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걸리는 그 순간 사술로 몰려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거 참…. 나라 꼴이 말이 아니군, 신관과 마법사가 판을 치고 귀족과 왕실은 민생 돌보기에 관심조차 없다니…. 왜 안 망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갈 정도인데?”
“하하하 특정 한 나라만 이렇다면 분명 망하겠지만, 조금의 차이만 있을 뿐 다들 거기서거기입니다. 이 나라 저 나라 할 거 없이 좋은 점이 있다면 또 나쁜 점이 같이 존재하지요. 어차피 이 난리는 가을이 되면 끝납니다. 그리고 왕권 다툼이야 국왕이 정신을 차리거나 왕자들의 싸움이 끝나면 자연히 해소되겠지요. 지금의 이 고통을 줄이고자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것 자체가 아둔하다는 것을 백성들이 다 알고 있으니 알고 참는 것입니다.”
“이래서 대가리가 썩으면 안 되는 건데….”
“어찌하겠습니까…. 하아….”
퍼슨은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그도 역시 지금의 나라 상태가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밀크는 잠시 고민에 잠겨 있었다. 그런 뒤 루피카를 불러 그녀에게서 약초를하나 받은 뒤 그것을 퍼슨에게 내밀었다.
“이것은 포푸리풀이 아닙니까?”
“퍼슨. 이 전염병이 왜 생기는지 알아?”
“그, 그거야 더운 날씨로 인하여 몸이 고단한 백성들이 병에 걸리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 더, 더운 날씨에 상한 음식을 먹어 속이 상해서 걸리게 되는 거야. 이른바 식중독이지.”
“시, 식중독이라고요? 식중독이 이렇게 강력한 전염병으로 탈바꿈한단 말입니까?”
“그래, 하여튼 이 식중독으로 일어난 소화기관 장애로 인하여 음식을 제대로 소화 시키지 못해 역류하여 토사를 하게 되고 이 토사에서 퍼진 병의 기운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미쳐서 전염되는 거야.”
“아! 그렇게 되는 겁니까?!”
“전염을 막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어 병의 증세를 빠르게 잡아내야 해. 우선 이 약초를 최대한 모아야 해.”
“이 포푸리 풀이 약초라고 하신 겁니까? 이건 어디서나 자라나는 잡초 아닙니까? 이런 것이 뭐에 쓸모가 있다는 것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로부터 포푸리풀은우리 홀스타우로스들이 음식을 먹은 후 탈이 났을 때 속을 다스리기 위해 사용하는 약초야. 이걸 태워서 향을 피우거나 죽에 섞어서 먹으면 속이 씻은 듯이 낮게 되지. 홀스타우로스와 인간의 구조가 거의 같아 우리가 조금 더 건강하고 강인한 육체를 가진 것이 다를 뿐이지. 이걸 사용하면 식중독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을 일단 회복시킬 수 있을 거야.”
“그,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놀라운 일이군요. 그저 잡초라고 생각했던 풀이 그런 약효가 있을 줄이야!”
“왜 그런 거 있지 않아? 어떤 나라에서는 하등 불필요한 취급을 받는 물건도 어떤 나라는 귀중한 요소로 받아들여지는 물건이 있곤 하잖아. 그런 것과 비슷한 거로 생각해.”
“무슨 말씀인지 알 거 같습니다. 그런데 괜찮을까요? 저희가 마법사와 신관의 눈치를 보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예 무시는 할 수 없습니다. 치료 행위가 적발되면, 아닌 게 아니라 큰 견제가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구호 활동을할 때도 약초는 일절 가져가지 못하고 무료 급식과 청소, 격리, 소각 등을 도맡아 하게 됩니다.”
그의 말에 밀크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치료가 아니면 되잖아.”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무료급식을 할 때 이 포푸리 풀을 섞어서 죽을 만든 다음에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혹시 이상하게 생각하는 자들이 있으면 죽으로는 너무 맛이 심심할 거 같아서 포푸리 풀을 넣어서 끓였다고 속여. 먹어보면 알겠지만, 포푸리 풀은 씁쓸하긴 해도 조금 지나면 풋내와 함께 달콤한 향이 풍기거든. 죽을 만들기 위해 끓이면 이 풋내는 자연스럽게 사라지니 아마 죽의 맛이 한껏 좋아질 거야. 말 그대로 약초의 기능이 아니라 죽의 맛을 끌어올리기 위한 재료의 하나가 되는 거지. 어차피 인간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효능의 약초이니 누가 뭐라고 할 수도 없을 거고 혹시 약의 효능을 알고 있는 신관이나 마법사가 딴지를 걸어도 상단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면 될 일이잖아? 너희는 그저 음식의 한 종류를 섞어서 구호 활동을 했을 뿐이니 말이야.”
탁!
밀크의 말을 끝까지 들은 퍼슨은 무릎을 탁! 하고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바로 그에게 읍하여 공손하게 무릎을 꿇은 뒤 감격한 어조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