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79화, 파탄난 잔치
“이게 무슨 소란입니까!”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족장 라파니였다. 최고 전사인 필리아는 굳게 입을 다물고 주변의 상황을 살폈으며 제사장이자 이 생일의 주인공 카린은 눈을 감고 라파니가 하는 모양을 살피며 가만히 있었다.
부족을 통치하는 여인 세 명이 모두 등장한 상황, 분명 켕기는 게 있는 쪽이 당황할 법도 한데 이 상황을 만드는 데 크게 이바지한 문제의 남자 크로울리는 오히려 느끼한 얼굴을 유지하며 그녀들에게 고개 숙였다.
“소란을 피웠군요. 여기 계시는 버터 족장님과 잠시 일이 있었을 뿐입니다. 큰일이 아니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큰일인지 아닌지는 듣고 제가 판단합니다. 어서 자초지종이나 말해 보시지요?”
그리하여 시작된 두 남자의 증언, 버터는 있는 그대로 크로울리가 감히 자신의 아내를 탐하려 하였고 그 때문에 그의 잘못을 따지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런데 크로울리의 대답이 참 가관이었다.
“예 물론 제가 이 아리따운 분에게 추파를 던진 것을 사실입니다. 그러나버터님의 말씀으로만 해석하면 제가 너무 억울하지요. 전 이분이 버터님의 아내인 줄을 몰랐으며 더더욱이 이런 사교장에 홀로 외로이 있는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워서 말을 걸고 좋은 관계나 만들어 보려 했을뿐입니다. 아니면 분명하게 이 여성분이 족장님의 아내라고 밝혔으면 모를까 그러지도 않으셨고 버터님 역시 이분을 아내라 소개한 적도 없지요. 그런데 제가 어찌 이분이 아내분인 줄 알았겠습니까? 실수하긴 했지만, 오롯이 제 실수만은 아닙니다. 그러니 이렇게 사과는 드리겠습니다. 족장님의 아내를 탐할 뻔한 죄 이렇게 사죄드립니다.”
그리고는 당당하게 고개를 까닥 움직여 버터에게 사죄 아닌 사죄를 하였다. 실로 뻔뻔한 작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쳐들고 한다는 말이 더 가관이었다.
“그럼 이제 제 명예를 실추한 점을 사죄받을까 합니다.”
“뭐라고요?!”
“아닌 게 아니라. 절 유부녀나 탐하는 무뢰배로 만드시지 않았습니까? 제가 여자를밝히는 판 종족이긴 해도 이미 임자가 있는 몸에까지는 손대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정도 알아보지 않고 가타부타 절 이렇게 몰고 가셨으니 제 평판이 이제 땅에 떨어지게 생겼습니다. 그러니 저도 사죄를 받아야겠습니다. 뒤에 계시는 여자분을 제 아내로 주시지요.”
“말을 삼가세요! 그런 가당찮을 일이 가능하리라 봅니까!”
“그럼 이대로 제 명예를 바닥까지 떨어트리고 모른 척 넘어가실 생각입니까? 이거야…. 홀 스타우로스 분들이 평화를 사랑한다는 말을 다 헛소문인 모양입니다. 사람 하나 나쁜 놈 만들고 아무런 보상도 없이 넘어가겠다니 이거, 이거 심보가 아주 고약합니다.”
“그, 그건….”
궤변이지만, 일부분 진실이 바탕이 된 궤변이라 호응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판 종족을 다스리는 족장의 위치에 있는 크로울리다. 유부녀나 탐하는 무뢰배로 알려지는 것은 정말이지 큰 명예훼손이었다.
버터의 아내를 탐한 일은 자신이 모르고 저지른 일이니 시원하게 사과함과 동시에 이번에는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킨 일을 빌미로 역공을 가한 것이다.
주변에 보는 사람들이 있긴 하였지만, 크로울리가 버터의 아내에게 추근거리고 있을 때 버터의 아내는 확실하게 거부 의사를 보이긴 했지만,자신의 신분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으며 버터 나서서야 그의 아내임이 밝혀졌다.
별거 아닌 일이지만, 공격하기 위한 빌미로는 훌륭한 이유였다. 분명히 크로울리는 자신의 잘못을 확실히 인정하고 버터에게 사죄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부녀를 넘겨 달라는 그의 태도는 많은 이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분명 크로울리의 상황을 두둔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나 백중지세가 아닐지라도 크로울리의 말에 힘이 실리니 아예 무시할 수많은 또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안될 말입니다. 차라리 나도 당신에게 사죄하지요. 많은 사람 앞에서 면박을 주어 창피를 준 일은 본디 제가 흥분하여 저지른 일입니다. 그러니 제 사죄를 받고 이 일은 이쯤에서 조용히 끝내도록 합시다.”
그리 말하며 버터가 고개를 숙였다. 이로써 완만하게 끝이 나면 좋으련만, 크로울리의 눈에는 아직도 음탕한 성욕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아름답고 풍만한 홀스타우로스 유부녀라는 저 여자의 모습에 이미 마음을 굳혀버린 모양이었다.
“불가합니다. 이렇게 된 거 전 제 명예를 이리 만든 저 여인을 꼭 받아야겠습니다. 단 저 분을 아내로 받는다면 제대로 아껴주고 제 아내로서 존중해 줄 것을 약속드리지요.”
완만하게 끝내기에는 글러 먹은 듯싶었다. 상황을 보고 있던 필리아는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자 끼어들기 힘들어하였고 라파니는 중앙에서 열심히 두 사람을 중재하였으나 계속 도돌이표를 찍고 있었다. 카린은 계속 말이 없었다.
그때 버터의 뒤로 도칸과 트루칸을 더불어 밀크가 나서서 그의 곁에 모여들었다. 비슷한 종족인 미노타우로스와 홀스타우로스가 한자리에 모이니 그 모습에 제법 웅장했다.
밀크에게는 크게 반응하지 않던 판이 미노타우로스 형제를 보고는 적잖이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먼저 앞으로 나선 도칸이 칸을 보고는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를 마구 헐뜯었다.
“유부녀만 보면 안달을 못 하는 너희 판 종족의 그 더러운 성격은 어딜 가서도 말썽을 부리는구나. 내가 이래서 판이 온다는 말에 잔치에 안 오려고 했지. 여기 있는 카린님의 정중한 초대가 아니었다면 내 네놈들의 상판대기 보기 싫어서 절대로 이런 자리에 오지 않았을 거다!”
“뭣이! 지금 말 다 한 겁니까! 감히 나와 판 종족을 싸잡아서 욕을 하다니! 감히!”
“내 말 아직 덜 끝났어 이 난봉꾼아! 네놈들 판은 과거 내 결혼식에도 참가해서 나와 결혼할 아내를 작당하고 납치해 빼돌린 일이 있다! 내가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열불이 터져서 너희 놈들을 갈아 마시고 싶다고! 그때 나와 내 동생, 그리고 전사들이 빠르게 추적하여 너희 판 놈들을 도륙해서 망정이지 만약 조금만 늦었어도 난 아내를 빼앗긴 멍청한 족장이 되어 두고두고 회자하였을 거다. 그런데 또 이런 일을 감히 내 앞에서 벌여? 오늘 여기 있는 판 놈들 다 내 손에 갈가리 찢어지는 모습 보기 싫으면 당장 꺼져!!!”
“이, 이!!! 감히 우리 동족을 죽였다 이거냐! 이 소대가리 세끼야!!!”
자신들의 잘못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저 도칸이 동족을 도륙했다는 이야기 하나에 분노하는 옹졸한 소인배, 그것이 바로 크로울리였고 판 종족이었다. 만약 그자들이 여자를 후리는 페로몬이라도 없었다면, 그리고 종족 번식이 빠르지 못했다면, 정말 이 세상에 살아남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나 인간 여자 중에 귀족가 여성들이 판에게 자주 홀리곤 하였다. 얼굴도 반반하고 남자다운 면도 있으며 섹스도 잘하니 귀족가에 팔려 다니는 젊고 고운 유부녀들은 그들의 맛좋은 먹잇감이자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돈줄이나 마찬가지인 존재이니 말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그들의 마법적인 능력은 진짜배기였다. 지금 바로 이 순간 크로울리의 양손에는 활활 타오르는 두 개의 불덩어리가 들려 있었다. 크기를 보아하니 중급 이상의 화염 마법을 그것도 두 개나 펼친 모양이었다.
“그만! 여기서 싸움을 벌이면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닥치시오! 이 모욕을 당하고도 그냥 참으라는 겁니까! 거기다 동족을 죽인 원수 놈입니다. 여기서 복수를 할 것이오!”
필리아의 만류에도 크로울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살기를 풀풀 풍겼다. 그야말로 진흙탕 싸움으로 변한 것이다.
밀크는 손을 뻗어 어딘가를 향해 펼쳤다. 그의 뒤에 있던 트루칸은 그가 뭘 하는지 몰라 의아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그때 그의 말을 듣고 숙소에서 날아오는 창이 있었으니 휘황찬란한 빛을 뿌리며 주인의 손에 안착하는 궁니르였다.
갑자기 날아온 창을 보고 모두가 놀라서 어안이벙벙해진 이때 도칸과 트루칸 또한 밀크를 돌아보고는 물었다.
“허! 창이 자동으로 날아왔다? 밀크, 그건 당최 무슨 무기야?!”
“설명할 시간은 없고 거길 좀 비켜줘.”
“아, 알았어.”
무기가 스스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마법사가 마법적인 힘을 가하여 물건의 위치를 옮기는 경우는 있어도 이렇게 주인의 부름을 받고 스스로 찾아오는 경우는 말이다.
어제의 일로 악감정도 있었고 또 오늘은 같은 동족인 버터를 핍박하는 것도 모자라 유부녀에 환장하는 크로울리의 모습을 보고 밀크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당장 잘못을 빌고 사교장에서 떠나 모습을 감추어도 모자랄 판에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피해자인 척은 다 하고 유부녀를 내놓으라 당당하게 요구까지 하다니 말이다.
거기에 더하여 자기들 잘못은 눈곱만큼도 인정치 않으려 하고 오히려 동족의 죽음에만 반응하여 역정을 내고 있으니 이거야말로 말이 안 통하는 부류였다. 그런 부류에는 말을 더할 필요가 없었다. 철저하게 실력을 보여줘야 입을 다물고 순종하리라.
“듣자 듣자 하니까 안하무인이 따로 없군. 그러고도 한 종족을 이끄는 수장이냐!”
“뭐, 뭣이?!”
“적어도 어제 네 녀석이 나에게 저지른 무례는 별말 하지 않고 넘어갔다. 잔치 자리에서 작은 일로 큰 소란을 만들어봐야 폐만 될 뿐이니까. 그런데 오늘 내 동족 버터에게 보인 그 방자함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이미 혼인한 아내를 내어달라니 네 녀석은 얼굴에 철판이라도 깔았냐! 내가 무예는 부족하지만 네 녀석 정도는 한창에 죽여버릴 힘이 있으니 용기가 있다면 어디 그 알량한 마법으로 덤벼 봐라!”
화앙!
자세를 잡으며 궁니르의 날카로운 창날을 들이미는 밀크, 그런 창끝에서는 살기가 물씬 흘러나와 요사스럽게 뻗쳐 크로울리의 몸을 옭아매었다.
‘이, 이 무슨….’
궁니르가 보여주는 예리함과 살기에 놀란 것인지 크로울리가 잠시 몸을 움찔하며 뒤로 물러나지만, 다시금 화염을 더 강하게 끌어 올리며 앞으로 전전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 겁먹을 줄 알아! 그리고 우리 같은 미남들이 여자를 취하는 것이 뭐가 나쁘다는 거야! 여자를 빼앗기는 멍청한 것들이 잘못이고 관리를 못 한 것들이 또 잘못이야! 적어도 우리는 한 여자를 충분히 사랑해주고 위해준다! 너희같이 아내들이 많은 것들이 동족 여자가 없는 우리의 설움이나 알긴 아는 거냐!”
“지금 와서 피해자인 척 굴어도 그 누가 네놈에게 호응해주겠나? 주변이나 한번 돌아보고 그 입을 놀리는 게 어떨까 싶은데?”
밀크의 말에 크로울리는힐끔 주변을 한번 돌아보았다. 자신과 동족들만 그와 뜻을 같이할 뿐 모든 이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제길…. 적이 너무 많으니 안 되겠다.’
적어도 여성들만 있는 위도레빗이나, 일부 아인들을 빠르게 구워삶아 놓았다면 좋았으련만, 라파니, 그리고 필리아가 미리 작당하여 그들을 여인들과 사적으로 만나지 못하게 함과 동시에 잔칫상도 따로 차리는 바람에 그들의 편이 거의 없었다.
그들과 친분이 있는 종족들도 상황이 이렇게 되니 슬슬 그들에게서 손을 때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불리함을 느꼈는지 손에서 화염을 꺼트린 크로울리, 그는 양손을 머리 위로 올리며 밀크에게 비릿한 미소와 함께 항복의 표시를 전달했다.
“그만하겠습니다. 창을 거두시지요.”
“누구 마음대로? 적어도 내 눈앞에서 네놈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무기를 거두지 않을 거다.”
속이 검어 보이는 그에게 한치의 기회도 주지 않으려는지 밀크는 흉흉한 창끝을 더욱 그에게 가까이 들이밀었다.
거의 목 언저리까지 온 그 날카로운 궁니르의 창날에 침을 꿀꺽 삼키는 크로울리, 그는 난색을 보이며 뒤로 물러나 동족들에게 소리 질렀다.
“가자! 여긴 우리가 있을 곳이 아니다.”
아직 원하는 여성을 고르지 못한 이들이었는지라 아쉬움을 표하긴 하지만, 상황이 이리된 마당에 멍청하게 여자나 탐하는 짓은 하지 않는 판들, 그나마 이런 눈치라도 있으니 목숨을 연명하는 것이 아닐까?
눈치를 살살 살피던 이들이 장내를 빠져나갔다. 다만 크로울리가 등을 돌릴 때 희미하지만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웃고 있는 모습을 확인한 밀크가 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버터의 뒤로 접근한 두 명의 판이 버터의 아내를 순식간에 들쳐 매더니 장내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꺄아아!!!”
“타냐!”
도칸과 트루칸이 뒤늦게 반응하여 두 녀석을 추격해 보지만, 아예 작정하고 도망치는 놈들을 따라가기엔 두 형제의 몸이 너무 굼떴다.
그러나 창을 들고 있는 밀크에게 등을 보이고 도망간다는 것은 죽겠다는 뜻과도 일치하는 말이었으니 그는 그대로 궁니르를 집어 던지며 외쳤다.
“가긴 어딜 가!”
후아아앙!!!
사교장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을 이용하여 사람들 틈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발 빠른 판의 모습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지 아주 능숙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더러는 그들을 잡기 위해 발을 걸거나 손을 내밀어 보지만, 그들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유유히 장내를 빠져나가 이윽고 마을을 빠져나가기 위해 발에 박차를 가하는 찰나였다.
적으로 인식한 자에게 반드시 명중한다는 궁니르, 밀크가 던진 그것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장내에 있는 그 누구에게도 손해를 끼치지 않고 공중에 떠오른 그것은 이윽고 빠르게 하강하면서 도망치고 있는 이들 중 타냐라 불린 여인의 다리를 단단히 잡은 판에게 날아가 등에 틀어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