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4화 〉74화, 판이라는 것들 (74/177)



〈 74화 〉74화, 판이라는 것들

“위, 윈디!”

윈디아라 불린 엘프, 밝은 연둣빛의 머리카락을 잘 정리한 단발머리의 엘프 여성, 단출하게 차려입고 등에는 엘프들의 자랑일 엘프 궁을 메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정말 호리호리해서 좋게 말하면 슬림하고 잘 빠진 스타일이라 할  있으며 나쁘게 말하면 가슴이고 엉덩이고 볼품이 없는 몸이었다.

그러나 어디 여성의 매력이 가슴과 엉덩이에만 있던가? 마른 체형을 좋아하는 사람일 경우 정말 이상적인 미녀를 추천하자면 두말할 거 없이 눈앞에 있는 저 윈디라는 엘프를 추천할 것이라고 말이다.

얼굴에서 환한 빛이 나는 기분이  정도로 잡티 하나 없이 맑고 고왔으며 무릎 위의 허벅지까지 드러난 치마와 결합한 디자인의 튜닉을 입고 있어서 청조한 분위기와는 반대로 색기가 물신 풍겨왔다.

“먼저 인사를 나눈 모양이니까 나도 소개를 좀 해주겠니 티나-”

절친한 사이인 모양인지 크리스티나를 애칭으로 부르면서살가운 태도로 응대하는 윈디, 그런 그녀의 말에 한참 잘 되고 있었는데 방해가 들어 왔다는 표정이  크리스티나는 떨떠름했지만, 그녀에게 밀크를 소개한다.

“이분은 홀스타우로스 종족의 밀크 족장님이셔.”

“밀크님이시군요. 저는 엘프 종족의 작은마을을 책임지는 족장의  윈디아입니다. 이렇게 족장님을 뵈니 무한한 영광입니다.”

크리스티나에게 살가웠던 만큼이나 밀크에게 살가운 태도를 보이는 윈디아. 아무래도 이 건 그녀의 성격 탓인 모양이다.

“그나저나 티나가 저한테 인사도 없이 여기서 호들갑을 떨고 있나 했더니, 이렇게 귀한 분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얘! 나만 따돌리고 그럴 거니? 이러고도 너랑 나랑 친한 친구라고 할 수 있어?”

엘프는 켄타우로스와 다르게 평원이 아닌 산지나 숲에 살지만, 두 여성의 부족 마을은 제법 가까운 거리에 있는지라 왕래가 잦았고 그 덕에 둘을 친한 친구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

다만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하여도 지금 순간만큼은 만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이라고 생각하는 크리스티나, 밀크와 좀  대화를 나누면서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방해가 들어왔다고 느낀 것이다.

그런 크리스티나의 생각을 알기나 하는 것일까? 그녀의 표정을  무시한 윈디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밀크에게 가까워졌다.

그리고는 밀크에게 홀스타우로스 전통의 인사를 시작했다. 밀크의 목에 코를 대고 향을 맡으니 밀크 또한 자연스럽게 그녀의 목에 코를 대고는 향을 맡았다.

숲속에서 흘러나올 것 같은 청량하고 상쾌한 향이 가득했다. 옷도 나무 덩굴을 이용해서 촘촘하게 만든 모양인지 이상한 향보다는 마찬가지로 청량한 향이 가득했다.

인사를 나눈 윈디아는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와 반대로 크리스티나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윈디아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초면에 족장님께 무슨 짓이야!”

화를 낸 것은 다른 이유가 전혀 없었다. 마음에 든 밀크에게 추근거리는 윈디아가 정말이지 고까웠다.

그러나 그녀의 일침에도 윈디아는 태연하게 대응하면서 오히려 당연하다는  차분하게 대꾸를 했다.

“어머- 몰랐나 보다? 이건 홀스타우로스의 전통 인사야- 물론 친한 사이가 아니면 결례이긴 하지만, 나야 좀  친근감을 표시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무엇보다 족장님이 받아 주셨잖아?”

“그, 그런 거야?!”

홀스타루로스끼리 통하는 인사?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던 크리스티나는 완전히 당했다는 표정이 되어 윈디아를 노려보다가 밀크에게 시선을 옮겼다.

다시 생각해 보니 부러워할  아니라 자신도 하면  일이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크리스티나가 밀크의 목을 향해 거의 돌진이라도  기세가 되었을 때였다.

슥~

밀크, 그리고 크리스티나와 윈디아 사이로 끼어들어 오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상체가 인간, 그리고 하체가 양인 판 종족 남성이었다.

“이거 참~ 인사하기가 참 힘들군요. 슬슬 저희에게도 기회를 주시렵니까. 아가씨들?”

정중하고 누가 봐도 살가움이 뚝뚝 떨어지는 음색으로 말을 걸어온 판 종족의 남자는 크리스티나 그리고 윈디아를 한 번씩 돌아보고는 뒤로 힐끔 눈을 옮겨 밀크를 확인한다.

그리고는 그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다시 두 여인에게 고개를 돌려 자기소개하기 시작했다.

“저는 판 종족의 위대하고 현명한 족장 크로울리라고….”

자신을 돌아보고 완전히 무시해버린 그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밀크는, 다만 이런 자리에서 괜히 작은 일로 소동을 일으키기 싫었던 그는, 크로울리가 두 여성에게 자기소개를 시작하자 관심을 꺼버리고 그곳에서 멀어졌다.

뒤에 자신이 있음을 뻔히 보도고 모두에게 인사를 하지 않고 자신만 쏙 빼고 등진 채 소개를 시작하다니 불쾌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가 자신을 무시했으니 자신 역시 그에게 인사를 하고 싶은 마음 따윈 일절도 없었다.

그가 나중에라도 다시 인사를 하러 온다면 모를까. 지금 이 한 번으로 그는 어울리고 싶지 않은 대상 순위권에 올라 버렸다.

웬 만에서는 참고 넘어가는 성격인 느긋한 홀스타우로스라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밀크는 정신이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 아예 무시할 생각이 가득한 그의 생각을 일찌감치 눈치채고는 거리를 두기로 했다.

판의 성격이 착하고 부드럽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여성에게 한정된 행동이다. 남자만 존재하는 그들은 같은 종족이 아니라면 남성을 대부분 적대한다.

이들은 선천적으로 여성을 홀리는 페로몬을 몸에서 뿌리고 다니는데 페로몬에 노출되어 마음이 동하면 판에게 매료되어 헤어나올  없게 된다.

그 씨도 어찌나 강한지 임신을 시키면 십중팔구는 판이 태어난다. 이들은 다른 종족의 여성들을 꿰어내 자신들의 부족에 데려가 가정을 차리고 자손을 번영하는 이들이다.

발정기만 오지 않으면 평소에는 매우 온순하고 말도  통하는 종족이라 그리 위험하지는 않지만, 이놈들의 발정기인 가을 무렵이 오면 성격이 참으로 괴팍해진다.

지금은 아직 여름이지만, 가을이 다가오고 있는 시기이니 녀석들이 점점 몸이 달아오를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판들이 가장 선호하는 대상은 자신들과 같이 하반신이 동물인 켄타우로스나 미의 종족인 엘프들이다.

단 위도레빗과 판이 결혼하여 자손을낳게 되면 확률이 반반이 돼버리기 때문에 자기 자손을 좀 더 많이 남기기 위해 이 두 종족은 되도록 결합하지 않으려고 한다.

어쨌든 밀크가 시무룩해져서(크리스티나와 윈디아의 관점으로 보기에) 자리를 뜨자 아직 그와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두 여인, 특히나 그와 홀스타우로스 전통 인사를 하려다가 방해를 받은 크리스티나는 화가 잔뜩 난 얼굴이 되어 자신을 크로울리라 밝힌판에게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윈디아 예요. 그럼 이만.”

“흥! 제가 당신에게 이름을 밝힐 이유가 하등 없군요. 불쾌하니 저리 가주세요.”

윈디아는 정중하긴 하지만 명백히 관심이 없다는 투로 대답하며 그와 자리를 피했고 크리스티나의 경우는 까칠한 반응과 동시에 도도한 표정 그리고 몸동작으로 돌아와서 그에게 콧방귀를 크게 뀌며 몸을 돌려 버렸다.

두 여성의 반응에 어안이벙벙해진 크로울리 멀어져가는 윈디아와 크리스티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실 뿐 딱히 아쉬워하거나 안타까워하지는 않았다. 그저 페로몬이 잘 듣지 않았겠거니 하며 그냥  사람에게 관심을 끊었다.

 페로몬이라는 것도 코드가 잘 맞아야 먹혀들어 가는지라 만능은 아니었다. 페로몬에 잘 듣는 여성은 알아서 넘어오니 아직 급할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찬찬히 주변을 살피던 그의 눈에는 손님들이 혼자가 된 밀크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다시금 그에게 다가온 하피퀸 바토리의 모습이 들어왔다.

“휘유~ 하피인가? 정말 아름다운 종족이지. 좋아 이번에는 저쪽에 가볼까?”

남자 따위는 머리에 저장하지 않는 그였던 지라. 방금 한 번 결례를 범한 상대가 밀크라는 것도 다 잊어버린  다시 천연덕스럽게 밀크와 바토리의 사이로 끼어들어 가는 크로울리.

막 바토리와 다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밀크도 이번만큼은 정말 봐줄 수가 없었다. 예의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종족이 아닌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이렇게 갑자기 끼어들어서 대화 상대를 가로채다니 말이다.

“이보세요. 당신!”

“응?”

막 바토리와의 대화 물꼬를 틀려는 순간 뒤에서 밀크가 말을 걸자 짜증스러운 얼굴이 된 그는 남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뒤를 돌아보고는 손을 휘저으면서 이렇게 대꾸했다.

“당신 뭐지?  당신과 대화할 마음 없으니 저리 가시지. 지금부터 여기 있는 아름다운 분과 오붓한 시간을 가져야 하니 말이야.”

잘못을 먼저 하고도 사과는커녕 오히려 축객령을 내리는 그의 행동에 밀크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혀 버렸다.

사실 판이라는 종족이 마법적인 지식이 놓아 점잖고 현명하다고도 불리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여성을 상대할 때 한정이었다. 남성에게도 심하게 적대하는 경우는 발정기 때뿐이다. 지금 크로울리의 상태는 발정기가 오고 있어서 조금씩 적대성향이 나오는 경우였다.

이중성이 좀 있긴 하지만, 그들도 하나의 종족이고 나름의 입지가 있으며 번식력도 좋다. 사고뭉치긴 해도 어느 한쪽으로는 친한 종족도 많아서  대륙에 잘 살아남은 경우라 할 수 있었다.

아무리 발정기라도 동족끼리는 싸우지 않아서 다행이지 남자를 적대하는  종족이 만약에 발정기에 동족까지 공격했다면 아마 씨가 마르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부족 자체가 서열도 잘 잡혀 있고 체계적이라 누군가가 먼저 선점한 대상에게 다른 판이 손을 대지 않는다는 나름의 법도도 존재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런 법도가 있다 하더라도 발정기의 그들은 그냥 민폐 덩어리 종족임과 다름없었다. 여성이 많은 홀스타우로스의 경우에도 녀석들과 결혼하면 무조건 판이 태어나기 때문에 꺼리는 종족이기도 했다.

만약 녀석들이 페로몬을 풍기고 나름의 여성을 사로잡는 화려한 언변, 그리고 높은 마법 실력을 갖추지 않았다면 정말 이 세계에서 멸종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페로몬의 코드가 맞지 않으면 말짱 꽝이요. 그들의 화려한 언변과화술도 통하는 상대가 따로 있는 법이다. 적어도 크로울리가 지금 말을 건 상대인바토리의 경우는 그따위 화술이 통하지 않는 부류였다.

“안녕하십니까 아름다운 분이시여 저는….”

크로울리가 밀크를 완전히 무시하고 자신을 바토리에게 소개하려는 그 순간이었다. 그의 말이 들려오기가 무섭게 뒤이어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촤악!

“으악!”

바토리가 크로울리의 뺨을 손으로 때리는 소리였다. 어찌나 그 소리가 찰진지 마치 채찍으로 때린 듯했다.

별안간 뺨을 맞은 그는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아픈 볼을 한 손으로 부여잡고는 바토리를 바라보는 크로울리

그리고 그런 크로울리의 눈초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바토리는 밀크에게 보여주든 부드럽고 우아한 표정 대신 표독스럽고 싸늘하기 그지없는 표정이 되어 양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 치우거라. 내가  더러운 것을 파 도려내 버리기 전에 말이다.”

“헉!”

싸늘한 그녀의 말투, 그리고 마치 그 말을 바로 실행할 것만 같은 날카로운 발톱을 보이며 하는 경고에 크로울리는 바로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서 시선을 때버렸다.

난봉꾼 판에게 따끔한 경고를 가한 그녀는 다시 우아한 표정으로 돌아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호호거리며 웃었다.

“가끔 이렇게 꼴불견인 놈들이 있기 마련이지요. 그렇지 않나요. 밀크님?”

“아…. 아, 네….”

일순 보인 그녀의 여왕님 포스에기가 눌린 밀크는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짜내어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얼어붙어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밀크의 옆으로 다가온 바토리는 작은 키의 그와 키까지 맞춰 힘들게 허리를 숙이며 팔짱을 끼고는 그와 몸을 밀착했다. 그리고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다독였다.

“아이참- 왜 이렇게 얼어붙었을까? 내가 우리 밀크님을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호호호- 그런데 먹고 싶기도 하네요-”

싸늘

한순간 보이는 먹이를 보는 듯한 눈빛, 물론 식욕을 채우기 위한 먹이가 아닌 다른 것을 채우기 위한 먹이로 보는 눈빛이었다.

그의 귀에 가까이 입을 대고는 그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오는바토리

“홀스타우로스의 뜨겁고, 끈적하고, 진한, 젖- 정말 좋아하거든요.”

그것이 과연 여자의 젖일까? 두루뭉술하지만 적어도 같은 여자의 젖을 두고 하는  같지는않았다.

“하, 하하, 네….”

“잔뜩, 짜서 먹여 줄래요? 우후훗-”

이렇게 말한 뒤 그녀가 귓속에 혀를 넣어서 한번 핥아오는데 밀크는 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릴 뻔한 것을 겨우 참아내며 주변에서 기색을 느끼지 못하도록 천천히 걸었다.

다만 이 자리에서 굴욕을 당한 한 남자는 아직도 고개를 들지 못한 상태로 분노를 쌓아가는 중이었다.

‘저딴 어린놈에게 내가 눌려? 제기랄!’

좋은 인연들이 만들어지는 가운데 딱 하나 나쁜 인연이 생겨난 순간이었다.  그런 순간에도 밀크는 여왕님의 손에 이끌려 점점 유혹을 당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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