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59화, 레이나 반돌프 남작
여관 안에 들어가자 오늘 하루 여관을 통째로 빌린 것인지 모든 테이블이 다 비어 있었다. 그나마 두 자리가 차 있었는데 한쪽은 무장한 호위로 추정되고 나머지 한쪽은 오늘 밀크를 초청한 반돌프 백작가의 사람으로 추정된다.
10명의 호위 중 한 사람은 단 하나의 살결도 보이지 않는 단단한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있었는데 그는 측근 호위인 듯 백작가 사람과 같이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귀족처럼 생긴 남자가 염소수염을 길게 길러 그것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마치 이것이 인간 귀족의 위엄이라는 듯한 오만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밀크가 그들에게 다가가자 호위들이 움찔했지만, 풀 플레이트 메일의 기사가 손을 젖자 그들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초대 받은 손님의 입장이니 먼저 고개를 한 번 숙여 인사를 하는 밀크, 그는 바로 자기 소개를 시작했다.
“홀스타우로스 부족을 이끄는 족장 밀크라 합니다.”
“당신이?”
염소 수염의 남자가 고개를 들어 그를 한 번 확인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오만한 표정을 지우고는 옆에 있는 기사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다.
“남작님 이 분이 바로 밀크 족장님이라 하십니다.”
“그렇군.”
뜻밖이었다. 누가 봐도 자기가 귀족이라고 선전을 하는 듯한 남자는 그냥 겉멋이 잔뜩 들어 있는 시종일 뿐이었고 진짜 귀족은 온몸을 저 단단한 풀 플레이트 메일로 감싼 ‘여자’ 였다.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바로 냉정함을 되찾은 밀크는 반돌프 남작으로 추정되는 그 갑옷의 여인에게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갑옷 안에서는 부드러운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앉으세요 밀크 족장님. 이렇게 초청에 응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남작이라고 하나 그저 아비의 연줄에 힘입어서 얻은 자리이니 크게 여의치 말고 편하게 말씀하셔도 좋아요. 손님께 자리를 내어 드려라!”
“예 남작님!”
그에게 부드럽게 이야기를 하던 반돌프 남작은 다음 순간 수하로 보이는 염소수염 남자에게 일갈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전장의 장군과도 같았다. 그 호령에 삐질 거리며 땀을 흘리는 염소수염 남자는 대답과 함께 바로 의자를 대령하여 밀크를 정중하게 앉혀 주고 의자를 밀어 넣어 주었다.
밀크가 자리에 앉자 반돌프 남작은 손을 내밀었다. 밀크가 그 뜻을 알고는 손을 마주 잡자 남작은 웃으면서 자기소개를 이어 나갔다.
“레이나 반돌프입니다. 남작도 빼고 반돌프도 빼도 좋으니 앞으로는 레이나 라고 불러줘요.”
“아. 그러죠. 저도 밀크라 불러주면 됩니다.”
“손님 앞에서 이런 차림은 실례이지만, 제가 아무래도 적이 좀 많은 편이다 보니 밖에서 목숨을 신경 써야 해서 말이지요. 답답해 보이더라도 양해를 부탁해요.”
“아닙니다. 목숨과 연관된 문제라는데 괜찮아요. 그럼 바로 오늘 부르신 용건을 말씀해 주시기에 앞서 작은 선물을 준비했으니 받아 주시지요.”
“아…. 그러실 거 없는데….”
밀크의 말에 레이나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도 선물을 준비하긴 했지만,어디까지나 손님을 초청한 입장이라 잘 보아 주십사 준비한 건데 상대편에서도 선물을 준비 했을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듯 보였다.
물론 그녀의 얼굴은 투구에 가려져 있어서 그러한 표정이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목소리 톤으로 그것을 알아차린 눈치 빠른 밀크는 괜찮다는 듯 그녀에게 이야기 했다.
“별거 아닌 선물이에요. 앞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자는 뜻에서 드리는 거니까 너무 힘들어하지 마시고 받아 주십시오. 홀스타우로스의 젖과 홀스타주를 조금 준비해 왔습니다.”
“호, 홀스타주!”
“그 귀한 것을….”
홀스타주라는 말에 주변 인물들이 더 난리가 났다. 입가에 침까지 고인 녀석이 있을 정도로 밀크의 말에 입이 먼저 반응하였다.
“자리에 앉아! 손님 앞에서 이 무슨 추태인가! 밀크님 아랫것들이 실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용서를….”
그들의 추태에 레이나는 소리쳐서 그들을 진정시킨 뒤에 밀크에게 못 볼 꼴을 보였다고 사죄를 하였다. 밀크는 손사래를 치며 사죄를 받았다.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요. 개의치 않으니 너무 혼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홀스타주는 넉넉히 가져 왔으니 여러분 모두 한잔 씩 마시십시오. 호위는 우리 여전사들이 해줄 겁니다. 린다 여관 호위를 부탁하마.”
“예 족장님. 가라. 오늘 하루 이 여관은 우리가 수호한다.”
예! 대전사님!
린다의 명을 들은 여전사들이 밖으로 나가 여관을 호위하기 시작했다. 다만 밀크의 안전도 중요하기에 린다만큼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대화하기 위한 준비가 얼추 끝난 거 같아, 밀크의 옆에 있던 발렌이 밀크, 그리고 레이나의 중간에 앉아 둘 사이의 대화를 이끌어 나가기 시작한다.
“퍼슨 대행수님을 대신하여 저 발렌 행수가 이 자리에 참여했습니다. 밀크님과 반돌프 백작가 사이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은 모두 청산하고 저희 에스타 상단의 조율 하에 두 분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을 정식으로 축하드립니다. 아울러 레이나 남작님께서 제안해 주셨던 내용은 여기 계시는에스타 상단의 대고객이신 밀크 족장님이 허락하셔야 하니 이 자리에서 다시 그 내용을 꺼낼까 합니다.”
퍼슨은 밀크에게 힘을 실어주고자 하였다. 앞으로 반돌프 백작과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이 없으니 준비를 해 두는 것이다.
독점 거래로 인하여 밀크는 에스타 상단의 대고객이며 그가 팔고 있는 물품에 한해서는 그의 허락이 있지 않으면 중간 거래가 불가능하다. 라는 인식을 미리 심어두어서 밀크가 이처럼 귀족을 만나는 일이 있더라도 휘둘리지 않게 미리 차단을 해두려는 생각이었다.
발렌이 조용히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밀크는 미리 말을 맞춰둔 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얼마 전 있었던 일은이미 불문에부쳤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건 신경 쓰지 말도록 하지요. 본론으로 들어가 에스타 상단은 항상 우리와 좋은 거래를 해 왔지요. 이들과는 신의로 거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나 퍼슨 대행수가 말하기를 남작님께서 제시하는 이야기를 들어보고 나서 중간 거래를 허용할지 아니면 허용하지 말지 선택을 하는 게 좋을 것이라 조언하여 일단 남작님의 이야기를 들어볼까 합니다. 그리고 먼저 알려드리지만, 거래가 가능한 품목은 젖과 술뿐입니다.”
밀크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본 레이나는 투구로 가려지진 얼굴을 끄덕거리며 알았다는 듯 동작을 취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대답했다.
“먼저 불미스러웠던 일을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 아인들을 거래하는 일을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으니 믿어주시기 바라요. 제가 바라는 것은 순수하게 이익이 되는 거래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으로 젖과 술이라면 충분히 차고 넘치지요. 그러나. 한 가지만 욕심을 내자면 데빌베어의 가죽도 거래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셨으면 합니다.”
“데빌베어의 가죽까지 말입니까?”
“예. 젖과 술이 분명 수요도 많고 그 값이 천청 부지로 치솟는 값진 물건인 것은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귀족들의 전유물로 에스타 상단처럼 거대한 상단이 취급하면 모를까 아버님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 운영하는 제 작은 상단의 주 물품으로 만들기에는 장기적으로 볼 때 좋은 물건이 아닙니다.젖과 술의 수량은 줄여도 좋으니 되도록 데빌베어의 가죽을 많이 거래 받길 원합니다.”
“나, 남작님?!”
염소수염의 사내가 당황하여 그녀를 말리려고 하지만 그녀는 이미 마음을 정한 모양인지 투구 사이로 빛나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을 멈추게 하였다.
염소수염의 남자는 뭔가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입을 뻐끔거릴 뿐 그녀의 기에 눌려 말을 하지 못하다가 벙어리 속앓이하듯 가슴만 두드렸다.
“데빌베어 가죽이야 중간에 유통하여 구매하시는 것은 충분히 허용 가능합니다. 그렇지 발렌 행수?”
“예. 어차피 저희 상단의 주 거래 상품은 족장님과 거래하는 젖과 술입니다. 데빌베어의 가죽은 어디까지나 끼워서 더 사 오는 격이지요. 그리고 판매율을 보아도 데빌베어의 가죽은 판매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젖과술을 금방금방 판매됩니다. 가죽을 중간에서 유통해 가신다면 저희 쪽도 판매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으니 훨씬 이득입니다.”
“그렇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의외입니다. 젖과 술보다 가죽을 더 필요로 하신다니 말입니다.”
“저희는 귀족보다는 서민들, 특히나 생산직에 관련된 자들과 주로 거래를 합니다. 공방과 연결도 되어 있기에 데빌베어의 가죽은 구하는 족족 팔아넘길 수 있지요.”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알겠습니다. 이 렘톤 마을에서 에스타 상단과 반돌프 남작의 거래를 허용하겠습니다. 대신 이곳 인근에 있는 저희 마을로 접근하지 말 것과 앞으로 이 근방에서 아인 사냥을 금지하겠습니다. 이 부분만 지켜 주신다면 앞으로의 거래에 어떠한 차질도 없을 거라는 것을 약속드리지요.”
“족장님의 말씀대로 이 부분만 지켜 주신다면 저희 에스타 상단 또한 그 어떠한 불만도 없습니다. 남작님께서는 어떠신지요?”
밀크, 그리고 발렌의 말에 레이나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표시를 하며 대답을 하였다.
“아버지께서는 아인 사냥을 멈추지 않겠지만, 이곳 렘톤 마을의 인근에서는 그 어떠한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아인 사냥꾼의 이동과 사냥 행위를 중지시키겠습니다. 저 반돌프 남작의 이름을 걸고 약조하지요.”
“약조를 위한 계약서를 준비해 뒀습니다. 남작님, 그리고 족장님 두 분 다 이곳에 서명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내용은 두 분이 보는 앞에서 제가 적겠습니다. 첫째 본 거래는 홀스타우로스 족의 부족을 이끄는 족장 밀크님과 그 물건을 독점으로 판매하는 에스타 상단, 그것을 중간에서 유통하기 위한 반돌프 남작 상단과의 거래를 증명하는 계약서입니다. 둘째. 저희 에스타 상단은 족장님과 거래한 품목 중 데빌베어의 가죽을 최대한 남작님과 거래하며 그 외 젖과 술도 소량 거래에 추가합니다. 셋째. 남작님은 이 계약의 내용대로 렘톤 마을에서 거래하여야 하며 그 어떠한 위협 행위도 금해야 합니다. 아울러 아인 사냥에 대한 모든 행위를 배제해 주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계약 내용에 위반하는 내용이 생기면 그 책임은 내용 위반을 겪은 분께서 지셔야 함을 알립니다.”
계약서의 제작이 끝나자 세 사람이 그곳에 사인했다. 발렌은 자신의 이름이 아닌 퍼슨의 이름이 적힌 도장을 찍는 것으로 대리 사인을 하였다.
사인이 끝나자 계약서가 잠시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 사람의 이름에 마치 사슬 같은 모양이 생겨 계약서에 세 사람을 묶어 두는 듯한 느낌으로 변화하였다.
“계약서는 마법적인 처리가 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계약은 모두 종료되었습니다. 이걸로 에스타 상단과, 밀크 족장님, 그리고 남작님은 신의를 기반으로 한 계약 관계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밀크님.”
“저도 잘 부탁하지요. 레이나님.”
두 사람은 다시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작게 힘을 주었다. 갑옷에 쌓여 있긴 하지만 왠지 모르게 여성적인 느낌이 강한 손이었다.
“그럼 오늘은 제가 가져온 홀스타주로 친분을 다지는 시간을 가지도록 할까요? 우리 전사들이 이곳을 철통같이 수호해 줄 겁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오늘은 계약이 잘 성사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한 잔씩 하시지요.”
“먼 길을 오느라 기사들도 지쳤을 겁니다. 남작님 호의를 받아들이시는 것이….”
레이나의 옆에 있던 염소수염의 남자가 침을 꼴깍 삼키며 이리 말하니 레이나는 그를 노려보는 듯하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 밀크에게 대답했다.
“호의 감사 드립니다. 모두 들어라! 만약 만취하여 추태를 부리는 자가 있다면 이 자리에서 즉결 처분하겠다. 그러니 자기 주량을 이기지 못하고 멍청하게 술을 들이켜는 짓은 자제하기 바란다. 여기까지 날 호위하느라 모두 수고 많았으니 밀크님이 주시는 술을 감사하게 들도록!”
“예 남작님!”
“감사합니다. 밀크 족장님!”
레이나의 허락이 있자. 발렌이 상단원을 불러 홀스타주가 가득 들어 있는 오크통을 들고 들어왔다. 통의 수는 세 통 사람 열 명이 먹기에는 전혀 부족하지 않은 양이었다.
세 통을 그들에게 나누어 준 상단원들은 밀크 그리고 레이나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는 따로 홀스타주를 담은 작은 항아리를 가져와 올려 두었다. 아무래도 낮은 위치의 사람과 겸상을 하게 하는 것은 귀족에게 예의가 아니었던지라 배려를 한 모양이다.
그렇게 한바탕 남작의 부하들이 술판을 벌이면서도 정신을 차리면서 술을 들이켜는 진풍경이 일어났고 밀크와 레이나는 한쪽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