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46화, 미움받을 용기.
서로 모루를 하나씩 잡고 작업을 시작하는 대장장이들, 밀크는 다시 뒤로 물러나서 그녀들의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어떤 여자는 벌목을 위한 도끼를, 또 어떤 여인은 돌을 부수기 위한 곡괭이를, 또 어떤 여인은 가위를 만들고 바늘과 못 같은 작은 작업물을 여러 개 만드는 여인도 있었다.
물론 승부는 냉정해야 하지만, 노력하면서 스스로 최상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땀을 흘리는 그녀들의 모습은 모두가 빛나고 있었다.
자신의 작품을 완성한 파티마는 숫돌 앞에 자리를 잡고 다가오는 여인들을 위해 힘껏 숫돌을 돌려주었다.
모든 작품은 그 비싸고 귀한 젖을 사용하여 유광을 하는 것으로 완성되었다. 자신의 작품에 귀한 홀스타우로스의 젖으로 유광을 낸다는 사실에 그녀들은 파티마처럼 눈물이라도 흘릴 듯이 기뻐했다.
그렇게 완성된 작품들이 하나, 둘 모루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하나같이 손재주가 좋은 인간들의 손에서 만들어진 만큼 수준급의 작품들뿐이었다.
‘역시 힘은 우리 홀스타우로스가 더 뛰어나지만, 손재주는 인간이 더 좋구나. 완성된 물건이 전부 대단하다. 유광을 빼고 본다 하여도 매우 뛰어난 작품 들이야.’
순수한 인간의 실력에 감탄하는 밀크, 이 여자들에게 대장 기술을 배워 자신도 더 뛰어난 대장장이가 되고 싶은 욕구가 점점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은 그녀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는 않았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고 했는데 벌써 친근한 척 다가가 기술을 알려달라고 할 단계는 아니었다.
‘일단, 이런 식으로 얼굴을 알아가면서 점차 마음을 열게 만들어야겠다.’
같은 인간들에게도 노예라고 천대받아온 이들이니 아인에게 안 좋은 감정이 있다 하여도 조금 잘 대해주면 금방 이곳 생활에 익숙해져서 마음을 열게 되리라.
다만 그렇다고 생각 없이 잘 대해주기만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지구에서의 생활로 그가 배운 것이 있다면 그 유명한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명언이었다.
그곳의 인간과 이곳의 인간이 분명 다른 양상을 띠고 있지만, 결국은 같은 인간이다. 속은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며 경각심을 가지는 밀크였다.
“그럼 어디 너희가 봐도 파티마의 실력이 가장 좋다는 것은 인정하겠지?”
모두의 작품을 본 뒤 최종적으로 파티마를 고르는 밀크, 그러나 그의 말대로 압도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가 만들어낸 검은 최상품의 검이었다.
다만 새로운 환경, 손에 익지 않은 도구와 팔려 왔다는 것에서 온 정신적인 불안 등등 여러 가지 요인이 겹치는 바람에 아쉽게 명검이 되지 못한 듯 보였다.
이름을 지어준 명검의 특징인 손잡이 윗부분의 이름이 없었다. 다만 그녀가 이곳에 익숙해지기만 하다면 얼마 안 가 명검을 만들어낼지도 모를 일이다.
‘솜씨가 대단해. 무조건 파티마와는 친해져야겠어. 다른 사람들은 나중으로 미룬다 하여도 그녀는 확실하게 내 편으로 만든다.’
품평이 끝나고 여인들은 요즈음 쓰지 않았던 근육을 사용하고 더운 용광로가 데워준 대장간에서 땀을 빼서 그런지 개운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작업이 끝나 용광로가 꺼진 대장간에 남아있던 밀크, 대장장이들은 여전사들을 시켜 가옥으로 이동시켜 두었다.
“벨-”
“네 족장님”
오늘 밀크의 호위 담당인 벨, 그녀는 그의 부름에 중 저음으로 대답을 하며 깔끔한 동작으로 그의 앞에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하- 린다도 그렇지만, 역시 벨도 믿음직하다니까? 인간 대장장이가 만든 검이지만, 엄청 대단한 작품이야. 이걸 벨에게 줄게.”
“저! 저따위가 감히….”
“아니야. 날 위해서 힘써 주는데 이런 건 내가 챙겨 줘야지. 린다처럼 명검을 주고 싶지만. 역시 그때는 운이 좋았던 모양인지 만들지 못해서. 다른 사람이 만든 작품이지만 충분히 대단한 검이야. 이걸로 날 더 안전하게 지켜주리라 믿고 있어.”
“족장님….”
린다에게 선물한 셰이크 이후로 명검을 만들지 못한 밀크, 하지만 명검이라는 것이 그렇게 계속해서 등장한다면 과연 명검이라 할 수 있을까.
훗날 그의 기술이 더 높아지면 바라지 않아도 명검을 만들 순간이 또 올 것으로 생각하며 차분하게 조바심내지 않고 정진을 쌓아가는 그였다.
다만 그렇다 보니 노력을 해주는 호위 벨에게 딱히 선물해줄 검이 없어서 조금 아쉬웠던 차에 파티마가 만들어낸 검이 매우 대단하여 그것을 벨에게 선물하는 것이었다.
밀크가 내민 검을 공손하게 받아 허리춤에 차는 벨, 밀크는 잠시 주변을 한 번 둘러 보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벨의 입술을 훔쳤다.
“쪽!”
“!!!”
황송하게도 입술을 허락받은 벨은 붉어진 얼굴을 들지 못하고 수줍게 숙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밀크는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벨- 이름 불러줄래?”
“그, 그럴 수는….”
“주변에 아무도 없어. 응-”
“으….”
바로 그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잠시 뜸을 들이는 벨, 예전이야 친구 사이로 친하게 지내는 누나 동생 사이였지, 지금의 그녀와 그는 그 위치가 너무 많이 차이 났다.
그러나 족장의 명령이라는 핑계를 무기로 용기를 낸 벨은 오랜만에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아 불러 보았다.
“미, 밀크….”
“예전 생각나네. 숨바꼭질할 때 그때도 이렇게 둘이 있었지?”
“그, 그랬었지….”
“그때 정말 재미있었는데- 이야- 벌써 10년이나 된 추억거리가 되었다니 시간 정말 빨리 간다. 그치?”
피식
애늙은이 같이 말하는 그의 모습에 벨은 더 참지 못하고 그대로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녀 특유의 무미건조한 웃음, 그래서 더 예뻐 보이는 그녀만의 웃음이었다.
“오늘은 예정이 있지만, 다음에 둘이 오붓하게 또 놀까?”
“숨바꼭질하자고? 이젠 우리 아이가 아닌걸….”
시무룩해진 벨에게 다가간 밀크는 그녀의 허리를 안으며 다른 여성들보다 조금 작지만 부드럽고 말랑한 그녀의 가슴에 폭 안겨들었다.
“뭐 어때- 어른들의 숨바꼭질이지 뭐.”
“풋- 그게 뭐야-”
“히힛-”
“하하-”
나이를 먹어도 밀크는 밀크였다. 아담하고 품에 쏙 들어오는 귀엽고 귀여운 남동생 밀크,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라도 있다는 것에 벨은 그를 소중하게 안아주며 고개를 숙여 입술을 훔쳤다.
그렇게 서로 한 번씩 입술을 훔친 두 사람은 저녁노을이 지고 있을 때쯤 대장간에서의 밀회를 끝내고 밖으로 나왔다.
몸을 섞지 않았어도 마음이 충족되는 느낌이 신기한지 벨은 그와 나누었던 입술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조금 전 모습이 머릿속으로 떠오르는지 뒤늦게 얼굴을 붉히며 뜨거워진 볼을 손으로 비볐다.
“뭐해?”
“아, 아닙니다!”
밀크의 부름에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는 벨, 허리춤의 검을 한 번 더 정리한 그녀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참 넓고 큰 등이라 느끼고 있었다.
‘작지만, 누구보다 크고 든든한 등…. 아아…. 밀크…. 사랑해’
조금 전 전달하지못한 사랑을 마음속으로만 외치며 밀크의 뒤를 따라 족장의 집으로 향한다. 언젠가는 입으로 전달하겠다는 맹세와 함께 말이다.
족장의 집에 도착한 밀크는 준비가 한창인 술자리를 보고는 한쪽 테이블에 앉았다. 그러자 뷰렌이 들어와 그에게 말하였다.
“족장님. 손님께서밖에 기다리고 계십니다.”
‘조금 화를 돋워볼까?’
어차피그녀의 호감도를 최대한 내려야 했기에 밀크는 아예 얼굴에 철판을 깔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남에게 미움을 사는 것은 성격에 안 맞지만. 그래도 달성 과제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아직 준비가 덜 끝났으니 밖에서 기다리게 해.”
“그럴까요? 호호호-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뷰렌의 경우 아까 발렌이 보여준 고까운 행동이 눈에 밟혔는데 밀크의 명도 있었겠다. 이참에 고년의 기세를 콱 짓밟아줄 생각이었다.
‘어디서 감시 하늘 같은 족장님의 말을 거절하려고 해? 고년 버릇을 좀 고쳐놔야겠어.’
밀크의 말을 듣고 밖으로 향한 그녀는 머지않아 기다리고 있는 발렌과 마주하게 되었다.
“아직 준비가 다 끝나지 않아 잠시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뭐. 뭐라고요?!”
“귀가 안 좋으신가요? 기 · 다 · 리 · 라 · 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찬바람이 횅하니 불도록 몸을 돌려 문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뷰렌의 행동에 어이가 없어 그녀를 따라 들어가려고 하는 발렌, 그러나 문지기 역할을 하는 여전사들이 그것을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창!
두 개의 창이 교차하면서 X자를 만들었다. 족장의 집으로 통하는 입구는 여기 하나뿐이다. 즉 들어가지 말라는 의사 표시
“이거 봐요! 난 족장님께 초대받은 손님이라고요! 손님을 이리 대접하는 경우가 어디 있나요!!!”
“준비가 덜 되었다지 않나?”
“얌전히 기다려라. 안에서 기별이 없으면 못 들어간다.”
무뚝뚝한 그녀들의 태도에 더 화가 치밀어 오른 발렌, 얼굴의 표정 변화는 어떻게 참았지만, 붉으락푸르락 한 얼굴색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이 못 배워 처먹은 야만적인 아인들이 감히! 감히!!!’
아무도 없었다면 이미 길길이 날뛰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뷰렌의 태도와 문지기의 태도에 분노한 그녀의 욕은 모두 밀크를 향하고 있었다.
‘꼬맹이 자식! 감히 나에게 이런 수모를 줘?! 허…. 지금 기세 싸움을 하겠다는 건가?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 내가 이 정도로 굴할 것 같으냐!’
상대방을 고분고분하게 만들기 위해 귀족들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 손님으로 초대한 뒤 입장을 시키지 않고 기다리게 하는 아주 고전적인 수법이었다.
상대방을애가 타고 초조하게 만들어 우위를 점하는 방법이지만, 그녀는 상대를 잘못 고른 거라며 속으로 밀크를 계속 욕하였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준비가 완벽하게 끝나밀크의 명을 받은 뷰렌이 다시 밖으로 나와 그녀에게 들어와도 좋다 알렸다.
“들어오시지요.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흥! 그러지요!”
아무리 기세 싸움이라 해도 기다리게 한 것은 잘못이기에 그녀는 이제 조금 세게 나갈 수 있는 명분을 챙기게 되었다.
화난 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어 족장의 방으로 들어간 발렌, 그리고 그녀는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여유로운 표정의 밀크과 마주하게 되었다.
‘뻔뻔스러워! 어쩜 저런 표정으로 기다릴 수 있지? 사람을 이렇게 힘들게 하고 저게 지을 표정이야?!’
그의 표정은 그녀의 화를 더 돋워 놓았다. 사실 그는 그냥 편안한 원래의 표정을 하고 있었을 뿐이지만, 한번 상대에게 화가 나면 눈에 보이는 상대의 모든 것이 다 흠으로 보이는 법
시간이 지남에 따라 뚝뚝 떨어지는 그녀의 호감도를 실시간으로 루에게 보고 받으며 쓴웃음을 짖는 밀크였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돼라.’
원래는 여기서 기다리게 한 것을 사과해야 정상이지만, 그는 사과를 생략해 버리고 그녀에게 자리를 권해다.
“앉아. 오늘 내 초대에 응해 주어 고맙군.”
“네! 초대 감사하군요.”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그녀의 말투, 마치 예전 그에게 안 좋은 감정이 있던 큰엄마 엘라와 비슷하다고 할까?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얼음일 생산 하고 있다고 하는 편이 더 알맞을 것이다.
엘라는 오르카에 대한 일이 그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고 발렌은 말 그대로 밀크에게 화가단단히 나 있는 것이니 말이다.
[호감도 –45점입니다.]
‘눈빛 좀 봐라. 홀스타우로스 하나 확실히 결딴내겠다는 눈빛이네.’
물론 그녀는 처지가 처지인지라 밀크에게 심한 행동을 할 수는 없지만, 기다렸다는 명분을 십분 활용하여 그에게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는 중이었다.
밀크는 애써 그녀의 불편한 기색을 모르는 척하며 한쪽에 있는 술병을 들고는 그녀에게 따라주며 웃었다.
“인간 세상에서는 홀스타주가 비싼 술이라지? 많이 있으니까 이거 받고 열심히 해주게. 에스타 상단의 대표로 자네를 보낸 걸 보니까 유능한 친구 같은데 나도 믿고 일을 자주 맡길게.”
인정은 해주는 거 같은데 뭔가 깔보는 듯한 느낌이 느껴지는 밀크의 언변, 그녀는 칭찬해도 저렇게 기분 나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느껴보았다.
‘얄미워! 어떻게 말을 해도 저렇게 얄밉게 하지? 진짜 볼때기를 꼬집어 버리고 싶네!’
그래도 상대방이 귀여운 아이처럼 보이는지라, 그녀가 하고 싶은 보복은 어디까지나 어린아이에게 하는 작은 괴롭힌 정도에서 그치고 있었다.
밀크가 건네준 술로 화를 식히려는지 단숨에 끝까지 들이키는 발렌, 온도는 시원하지만, 발효로 생긴 특유의 시큼함과 톡 쏘는 맛이 뒤이어 올라와 한 번에 마시면 여간한 사람도 기침하는 독한 술.
그러나 그녀는 눈빛 하나 변하지 않고 마신 술잔을 테이블에 탁! 하고 내려둔 뒤 기침 한번 없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밀크 역시 그녀의 마시는 모습을 보고는 시원하게 술을 들이켰다. 그러나 여기서 그녀와 밀크는 인간과 홀스타우로스라는 거대한 차이가 있었다.
귀한 술이라 거의 입에 대보지 못했고 인간이라 밀크보다 술에 약할 수밖에 없는 발렌 그에 반해 홀스타우로스라 어른이 된 뒤로는 거의 입에 달고 살아온 술을 그냥 물 먹듯이 마시는 술에 강한 밀크. 시작부터 이 싸움은 그 승패가 정해져 있는 싸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