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44화, 인간 우월주의.
아침에 눈을 뜬 밀크는, 개운하게 풀린 몸 상태에 의아함을 가졌다. 어제 그렇게 무리를 한 것 치고는 온몸에 활력이 넘쳐나고 결리는 곳조차 없었다.
“일어나셨나요.”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제사장 루피카의 얼굴이 보여 몸을 일으키려 하자 그녀가 손을 들어 그의 움직임을 만류했다.
“잠시만 더 누워 계셔요. 곧 끝납니다.”
그렇게 말한 루피카는 방금까지 하던 행동을 이어서 시작했다. 밀크의 다리 부분을 살살 주물러서 마사지하고 있던 것이다.
피로가 다 풀린 이유는 따로 없었다. 그녀가 밀크의 몸을 정성스럽게 마사지했고 그 덕분에 온몸에 활기가 감돌고 있었다.
어제까지와는 사뭇 다른 상냥한 미소와 더불어 밀크의 몸을 꼼꼼히 만지며 온 정성을 쏟아붓는 모습, 확실히 달랐다.
[일어나셨군요.]
때마침 들려오는 루의 목소리, 어제와는 새삼 다른 루피카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을 때 잘 되었다는 듯 밀크는 속으로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간밤에 무슨 일이 더 있던 거야?’
[아닙니다. 오늘 아침 일찍 그녀가 일어난 뒤 당신의 몸을 깨어날 때까지 정성스럽게 마사지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호감도는 100에 도달 하였고 무려 그녀는 복종 상태가 되었습니다.]
‘복종이라니?’
[애정과는 다른 특별한 상태입니다. 말 그대로 암컷으로서 수컷에게 완전히 지배당했다는 뜻이지요. 부족 내의 그 어떤 여인보다 루피카의 충성심이 가장 높을 겁니다.]
‘이, 이거 잘 된 거지?’
[물론이지요. 잘된 일입니다.]
예상했던 내용이 아니라 많이 당황하였지만, 일단 루가 괜찮다고 하니 안심이 되는 밀크였다.
간밤에 치른 제사장과의 성인식을 통하여 그는 드디어 당당한 한 사람의 어른이 되었다. 우여곡절이 좀 있긴 하였지만, 결국에는 제사장인 루피카도 굴복시키고 족장으로서의 입지도 단단히 세워 그야말로 최상의 결과를 이루어 냈다.
오늘은 태양의 날, 홀스타우로스 여인들의 일을 쉬는 날이다. 부족 내의 여성들이 모두 족장의 집 앞으로 모여 어른이 된 밀크를 진심으로 축하하며 하울링을 퍼트렸다.
그의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루피카와 밀리는 하울링이끝나자 앞으로 나와 밀크의 양쪽에 서서 그를 축복하듯 루피카가 나누어준 가루를 흩뿌렸다.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대장장이 노예들도 함께 참여하였다. 그녀들은 홀스타우로스 종족에 대하여 잘 몰라서 이것이 뭔가를 축하한다는 것까지는 유추해 냈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하여 그저 겁먹은 표정으로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성인식이 완전히 끝난 뒤 마을에는 자재를 가지러 떠났던 에스타 상단의 일원들이 도착하였다.
인부와 함께 마을로 도달한 그들은 뚝딱뚝딱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건축물을 지어 올리기 시작한다.
완성까지 3일이 걸린다 하여 그들은 이 마을에 불의 날까지상주할 계획이었다. 공사 책임자로 같이 따라온 발렌은 인부들에게 단단히 지시를 내린 후 밀크가 있는 족장의 방으로 이동했다.
“족장님. 발렌입니다.”
“아- 어서 들어와.”
밀크의 목소리를 들은 그녀는 방으로 들어와 그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물론 그녀는 홀스타우로스가 아닌 인간이기에 목을 살짝 숙이는 간단한 동작이 전부였다.
밀크 역시 그녀를 향해 고개를 살짝 까닥거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 하였다. 발렌은 그런 그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릴 뻔했지만, 잘 참아냈다.
‘아인 주제에 정말 건방지네….’
큰 거래 상대이자 대 고객이며 이제 대 행수가 된 퍼슨이 그를 자신처럼 여기고 극진히 대하라는 언질이 있었지만, 처음부터 그녀는 아인의 존재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굳이 따지면 경멸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들은 야만적이고 덜떨어졌으며 인간보다 열등한 문화를 가진 뒤떨어지는 종족들이다.
대륙에 널리 퍼진 인간 우월 사상에 단단히 물들어 있는 그녀였기의 행수가 되었다 해도 이런 곳에서 젊은 나날을 이 냄새 나는 아인들과 썩어야 한다는 것이 못내 아쉽고 짜증이 나 있던 차에 밀크의 자연스러운 하대는 스트레스를 더 높이는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다.
‘제길…. 고작 젖이나 짜는 종족 주제에 값이 나간다고 자기들도 비싼 줄 아나? 빨리 이곳에서 탈출해야지 원….’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그들이 큰 거래 상대라는 것은 잊지 않고 입과 눈은 영업으로 빚어진 자연스러운 미소가 지어진다.
“인부들과 함께 건물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불의 날까지는 완공될 겁니다.”
“정말 고마워. 중요한 기술을 가진 대장장이들이 병으로 죽지 않도록 최대한 서둘러주길 바랄게. 그런데 불의 날까지 완공한다면 남자 인부들이 이곳에 상주하는 건가?”
“그렇게 됩니다만?”
“우리 부족의 여자들하고 되도록 마주치지 않게 부탁하지. 잘 알겠지만, 부족의 여자들은 거의 다 임신이 가능한지라 운이 나쁘면 인간의 씨를 받아서 인간을 잉태하게 될 거야. 만약 이런 일이 생기면 관련자 처벌은 우리 부족에서 직접 행하게 되니 단단히 주의해야 할 거야. 밤사이에 지정된 곳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도 엄히 금하겠어. 이는 우리 부족의 전사들이 인부들의 막사를 지키고 서 있을 테니 그 점도 유의시켜줘.”
“이를 말인가요. 당연히 그리 하겠습니다.”
대답하며 고개를 숙인 발렌의 표정은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아인 주제에 바라는 것도 참 많다고 생각한 것이다.
‘흥…. 아인 주제에 인간의 자손을 낳으면 영광이지 하여튼 자기들이 뭐 잘난 줄 안다니까? 자지만 큰놈이 아까부터 잘난 척은 참…. 족장인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새파랗게 어린 꼬마 주제에 이래라저래라 아주 짜증 나는 놈이군.’
속으로 그를 향해 욕을한 바가지 해주며 기분 나쁜 것을 간접적으로 풀어낸 그녀는 썩어가던 얼굴을 다시 원래의 미소로 되돌린 후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그녀는 과연 알고 있을까? 지금 그녀가 숨기고 있는 추악한 아인 멸시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루가 감지하고 있다는 것을
물론 그녀의 마음을 읽어본다거나 그녀의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무슨 요인으로 인하여 밀크에 대한 호감도가 떨어지고 있는지는 알 수가 있었다.
[밀크님]
‘응? 왜그래?’
[저 여자는 아인 멸시가 뼛속까지 박혀 있습니다. 인간 우월주의 사상에 완전히 감화된 여성입니다. 그로 인하여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 지속해서 떨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그녀의 호감도는 –15점입니다.]
‘뭐야?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혼자 호감도를 떨구고 그러는 거야?’
[아인 멸시는 그만큼 무서운 사상입니다. 밀크의 세계에서도 자기 인종이 아닌 자들을 배척하고 차별하는 사상이 만연해 있었지요?]
‘그, 그랬었지.’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도 이유 따위는 없습니다. 상대가 인간이 아닌 아인이다. 그러니 이들은 미개하고 야만적이니 천대받아 마땅하며 우리의 우월함을 절대 이길 수 없다. 라는 생각이 만연한 사상입니다. 이곳 대륙에는 이러한 사상을 가진 인간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습니다.퍼슨의 경우는 그런 우월주의 사상이 없었지만, 그녀는 아주 심각한 수준의 우월주의 사상자이니 주의를 요해야 합니다.]
‘허…. 퍼슨은 하필 이런 여자를 우리 담당으로 두고 간 거지?’
[그거야 그녀의 사상은 같은 인간에게는 통용되지 않으니 퍼슨도 몰랐을 확률이 높습니다. 아니면 알았다 하더라도 일에 있어서 공정함을 추구하는 그였기에 그녀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거나.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몇 가지 추려 보았지만, 확실한 답은 없습니다.]
‘음…. 일단 주의할 인물이라 이거로군.’
밀크는 앞에 있는 발렌의 얼굴을 쳐다보며 그녀를 살폈다. 160 정도 되는 키에 인상은 오똑한 콧날과 좁은 이마 그리고 강렬한 눈빛을 내는 눈이 만나서 어딘지 모르게 깐깐해 보이고 입술마저 작아서 고집도 여간 있어 보인다.
몸매는 인간들 사이에서는 좋은 평을 들을 거 같지만, 워낙에 몸매가 좋은 여인들인 홀스타우로스 사이에서 큰 그였기에 눈에 차지는 않았다.
노예들을 다루기 위해 들고 다니는 옆구리의 채찍이나 호신용으로 들고 다니는지 작은 단검이 반대쪽 허리에 장착돼 있었다.
여인치고는 남성에 가까운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장거리 상행이나. 활동적인 행동을 하기에는 매우 안성맞춤인 복장이라 상단 일하는 그녀에게는 충분히 어울렸다.
그나마 영업용으로 단련된 부드러운 미소가 있어서 다행이지 만약 저 얼굴에 인상까지 쓰고 있으면 누구 하나 쳐 죽이려고 안달 난 얼굴이 될 거 같아서 참으로 무서웠다.
밀크가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고 있을 때였다. 루가 그에게 발렌의 호감도가 변하였음을 알려왔다.
[발렌의 호감도가 –20으로 변화했습니다. 그녀와 정면으로 시선을 엮지 마시기 바랍니다.]
‘깐깐하긴….’
밀크가 그녀에게서 눈을 치워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녀의 미세한 얼굴 경직이 풀렸다.
‘아 진짜 짜증 나…. 왜 바라보고 난리지? 예의도 없는 무식한 것들 같으니! 숙녀의 얼굴을 그런 식으로 쳐다보고 야만인 같으니!’
속으로 바락바락 욕을 또 한 바가지 쏟아 부어버린 그녀는 더 참지 못하고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다음부터는 부하를 보내야겠어. 이딴 곳 다시는 안 온다 내가! 더럽고 불결해!’
밀크가 볼 수 없는 밖으로 나온 그녀는 몸서리치는 간지러움에 양팔을 모아 팔뚝 부분을 쓰다듬으며 인부들이 일하는 곳으로 돌아가 버렸다.
[엄청난 속도의 호감도 저하율이군요. 그녀의 호감도가 –25로 떨어졌습니다. 숨겨져 있던 달성 과제가 해결되어 능력치 포인트 20점을 획득하였습니다.]
‘그거 호감도 떨구기야?’
[그렇습니다. 미움받을 용기, 한 대상의 호감도가 –25로 도달하면 해결되는 달성 과제였습니다. 추가로 –50 만들기와 –75점 만들기, -100점에 도달하여 철천지원수가 되기, 원수와의 동침, 원수를 사랑으로 총 다섯 개의 달성 과제가 해금되었습니다.]
‘많기도 해라…. 그러니까 루의 말은 저 발렌이라는 여자를….’
[예~ 차라리 이렇게 된 거 이용할 때로 이용한 뒤 호감도가 –100으로 떨어져 철천지원수가 된 뒤 그녀를 상대하여 원수와 동침을 달성하고 그녀의 호감도를 반전시켜 사랑으로 만들면 됩니다.]
‘말 참쉽게 하네…. 그게 어디 말처럼 쉽겠냐고 저 여자 아인 멸시 사상이 있다며?’
[어쩌면 그 아인 멸시 사상이 밀크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이해가 잘 안 되는데….’
[자신이 지금까지 믿어온 사상이 한번 깨지면 인간은 그 충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붕괴할 때도있습니다. 그리고 그 붕괴한 정신에서 다시 깨어나면 인간 그 자체가 변해 있을 때도 있지요.]
‘어휴…. 무서워라.’
어렵게 말했지만, 결국은 그녀가 저항하지 못하게 철저하게 뭉개버리고 그것에서 얻은 수치심과 자존심이 박살 난 그녀를 다독여서 수족으로 만들어 버리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이대로는 그녀와 계속 안 좋은 상황을 유지할 뿐입니다. 지속적인 거래 상대와 그런 관계에 있으면 여간 껄끄러운 상대가 아니지요. 그러니 아예 밀크의 자지로 누가 위고 아래인지 확실히 알려 주어서 그녀의 아인 멸시도 치료하고 인간 부인도 하나 만들고 단단한 사랑을 가진 거래 상대도 만드는 세 가지이익을 취하는 겁니다.]
‘아니 진짜 그 이익이 꼴리긴 하는데…. 여간해서는 어렵겠지?’
[일단 되든 안 되든 호감도를 –100으로 내려버리는 것부터 시작하시지요. 아예 오늘 밤 그녀를 불러서 술자리 상대라도 시키는 것은 어떨까요? 제 예상이지만 오늘 안에 –70까지는 찍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아인 멸시 사상이 있는데 술 상대? -70이아니라 –90도 찍겠다…. 정말 사악한 방법이네.’
[어디까지나 당신을 돕기 위한 일입니다. 그 무엇이라도 해야지요.]
‘아니 말은 바로 하자. 그거 하는 건 나라고!’
[행운을 빌겠습니다-]
‘아니….’
유쾌한 어조로 등을 떠미는 루의 행태에 밀크는 가끔 그녀가 눈앞에 있으면 꿀밤이라도 먹여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뭐, 이런 것도 어디까지나 그녀와 밀크가 17년을 함께 행동해 오면서 친해질때로 친해져서 만들어진 유대의 하나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안에서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도와주고 또 보살펴 주고 지켜보아 준내면의 어머니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때로는 자상하게. 때로는 엄격하게, 또 때로는 사랑과 친밀함으로, 그리고 또 때로는 편한 친구와도 같이 항상 곁에 있는 존재.
“밖에 누구 있어?”
밀크의 부름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뷰렌이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그녀가 밀리를 대신하여 그의 수발을 드는 날이었던 모양이다.
“부르셨나요?”
“에스타 상단 책임자에게 오늘 밤에 내 방으로 오라고 해주겠어? 이렇게 도움을 주어서 기분이 좋아 술자리를 마련했다고 꼭 참석해 달라고 전해줘.”
“오늘 밤 술자리 말이지요? 알겠습니다. 족장님.”
뷰렌이 족장의 방을 나섰다. 나가는 그녀를 본 밀크는 오늘 술자리에서 아인 멸시 사상을 가진 여자와 술을 자셔야 하니 단단히 마음을 다잡으며 각오를 다졌다.
이 세계에 온 다음 처음으로 밤 상대를 해야 할 인간 여인이었다. 마음을 먹은 이상 허투루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