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33화, 적은 가까이에 두어라.
“다 컸네! 우리 아들.”
혼케일은 기쁜 듯 밀크의 어깨를 두드리며 한결 가벼워진 얼굴이 되어 있었다. 무거운 짐을 내려 둔 듯한 표정이었다.
“부탁하마.”
“맡겨줘.”
두 부자는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았다. 밀크는 등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흐르는 느낌을 받았지만, 애써 모르는 척하였다.
그리고는 흔들리는 작은 아빠의 등을 토닥이며 한동안 그렇게 아들로서 그의 곁에서 남아 주었다.
얼마 후 태양의 날
족장의 집 앞에 홀스타우로스 여인들이 모여 있었다. 중대한 전달 사항이 있으니 전사를 제외한 모든 홀스타우로스들에게 모이라는 명이 떨어졌다.
무슨 일일지 궁금한 표정으로 족장의 집 앞에 모인 여인들의 중앙으로 나타난 혼케일은 자신의 뒤를 따라 나타난밀크를 한 번 쳐다보고는 여인들에게 말했다.
“부족의 중심이자. 모든 것을 통솔하는 중요한 자리인 족장의 자리에 앉아 그동안 고생도 많았지만, 너희들의 도움을 통하여 이렇게 큰 마을을 통치할 수 있었기에 고마움을 느낀다. 앞으로도 우리 부족의 마을이 번창하고 또 번식하여 대대손손 영광을 이루었으면 하는구나.”
모오!!!
마앙!!!
홀스타우로스 여인들이 하울링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고개를 위로 올리고 마치 소들이 우는 듯한 소리를 질렀다.
족장에 대한 예를 다하는 이 하울링, 자신들을 이끌어준혼케일을 향한 고마움과 존경을 담은 그녀들의 대답이었다. 한바탕 하울링이 끝나자 혼케일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나 족장은 영원할 수가 없다. 내 나이도 이제 200이 넘어 수명의 반 이상을 살아왔다. 나를 따라 이제껏 와준 모두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나 역시 이제 지쳐가는구나. 그래서 내 후계자인 밀크에게 족장의 자리를 내어주고 이만 물러날까 하는구나.”
장내가 엄숙해졌다. 충격을 받은 듯 그 자리에 얼어붙는 자들, 어느 정도 예상을 했는지 담담하게 서 있는 자들과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자들, 그리고 경악에 어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자들까지 모두의 표정이 천차만별이었다.
그리고 치라야의 경우는 결국 올 것이 왔다는 듯 질끈 감아버린 눈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미 여기 있는 밀크의 능력은 다들보았을 것이다. 내가 비록 너희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었지만, 주변에서의 위협으로는 너희들에게 거의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윤택한 생활은 내가 이루었으니 이제부터는 주변 위협으로부터 너희를 안전하게 지켜줄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한 시기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걸맞은 자는 바로 내 아들 밀크다.”
혼케일의 말과 함께 그의 옆으로 나아가 그와 동등한 위치에 서는 밀크, 혼케일은 자신이 들고 있는 족장의 지팡이를 밀크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니 지금 이 시각부터우리 부족의 미래를 여기 있는 새로운 족장 밀크에게 위임하겠다. 너희들은 앞으로 내가 아닌 여기 있는 내 아들 밀크의 명령을 받아 이 부족의 앞날을 창대하게 밝혀주기 바란다.”
그리 말한 혼케일은 족장의 지팡이를 들고 있는 밀크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새 족장. 밀크님에게 인사 올립니다.”
그러자 모든 부족의 여인들이 그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눈을 감고 있던 치라야도 순리를 거스를 수는 없었는지 잠자코 그에 따랐다.
새 족장 밀크님에게 인사 올립니다.
모두의 축복을 받은 밀크, 그런 그에게 새로운 인물이 다가왔다. 부족의 제사를 책임지는 주술사 안멜이었다.
얼굴에 기이한 문양을 그리고 조금 창백하지만, 입술 만큼은 생기가 넘치는 여인, 얼굴이 창백한 이유는 문양이 잘 보이기 위해 분칠을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밀크에게 다가와 그의 양쪽 어깨 뒤편으로 알 수 없는 가루를 뿌렸다. 이 가루는 바로 선대 홀스타우로스 남성이 죽은 뒤 남긴 가루였다.
죽은 홀스타우로스를 주술로 제사 지낸 뒤 땅에 흡수되지 않고 단상 위에 남은 가루를 모아둔 것으로 이것을 어깨너머로 뿌려 선대의 축복을 대신하는 것이다.
마지막은 밀리였다. 그녀는 잘 치장하고밀크의 옆으로 등장하여 긴장한 듯 밀크의 손을 잡았다.
족장의 아내, 그 아내 중 으뜸인 여성이 그와 함께 부족 홀스타우로스의 축복을 받는 것이 이 의식의 마지막이었다.
그녀가 옆으로 서자 홀스타우로스 여인들의 하울링이 이어졌다. 그리고 하울링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멀리서 대답을 하는 듯한 여전사들의 하울링이 이어진다.
그녀들도 하울링을 들으며 이제 부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대략 알아낸 모양인지 새로운 족장이 될 이를 축복하기 위해 하울링을 이어 나갔다.
의식이 끝난 후 집이 아닌 낯선 공간에 앉아있는 밀의 옆으로는 밀리, 뷰렌, 메어리, 벨, 린다가 서 있었다.
조용한 가운데 먼저 입을 여는 뷰렌
“우리 쪼그만 밀크가 벌써 족장이라니 세월 참 빠르다- 그치?”
“뷰렌! 족장님께 그게 무슨 버릇없는 말이니!”
그녀의 말을 들은 밀 리가 그녀에게 호통을 쳤다. 엄마와 작은 엄마라는 위치이자 이제는 그의 아내가 된 그녀들이다. 당연히 호칭에 주의해야 했다.
“이크! 알았어. 언니- 그래도 정말 이제부터는 족장이잖아. 조금서운해서 그러지- 앞으로는 작은 엄마 소리 못들을 테니까.”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돼. 주변 홀스타우로스들이 우릴 보고 따라 하면 족장님 체면이 어떻게 되겠어?”
“알았다고…. 죄송해요. 족장님.”
“괜찮아…. 그보다는….나도 좀 서운하네…. 이제 뷰렌하고 밀리한테 엄마라고 못 부른다니 말이야.”
그 말에 밀리는 따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마주 잡아 주었다.
“곧 익숙해지실 거예요. 그리고 엄마라는 말을 못 들으면 어때요? 전…. 족장님이 정말 자랑스러워요.”
“밀리….”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아들이 건강하게 자라서 부족의 족장이 되었다는 사실 마으로 그녀는 아미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런 아들의 첫 번째 아내까지되는 영광을 가지다니. 그녀의 기쁨은 이미 말로 다 표현이 안 될 지경이었다.
의식이 끝난 뒤 혼케일은 그를 따라나선 10명의 여인과 함께 마을 어귀의 큰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녀들의 선두에는 그의첫 번째 아내이자 부족의 가죽 공예를 도맡아 하던 엘라가 있었다. 밀크로서는 그녀의 재능이 아쉬웠지만, 이제 격리되다시피 할 아빠의 행복을 위해 그녀를 잡지 않았다.
그가 이끌던 나머지 여인들은 모두 밀크의 아내로 들어오게 되었다. 아직은 어색하긴 해도 모두 착한 여인들이기의 한 명을 빼고는 문제가 없었다.
딱 한 명 치라야를 빼고는 말이다. 밀크가 족장에 앉음과 동시에 치라야의 주변에 몰려 있던 여인들이 대거 이탈하였다.
이번 데빌배어를 사냥하면서 밀크가 만들어낸 신무기의 위력이 결정적인 활약을 하였다는 것과 그것으로 인해 밀크를 족장으로 신뢰할 만하다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새로이 아내가 된 여인들과 처음 만나는 자리에 치라야 혼자 나타나지 않았다. 몸이 아프다는 핑계였지만, 아마 그 자리에나가는 것이 너무도 괴로웠을 터, 밀크는 그녀에 대해 별로 유감을 표하지 않고 몸조리를 잘 하라고 신경을 써 주었다.
그러나 다른 여인들, 특히나 밀리의 경우는 그런 치라야의 행동이 몹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제 족장이 된 그에게 벌써 반항을 한다고 생각된 모양이었다.
“저 족장님.”
“왜?”
“다름이 아니고 치라야 말입니다.”
“아- 안 그래도 그 말 하려고 했는데 잘 됐다. 다른 사람들도 잘 들어”
밀리의 말을 들은 밀크는 그녀의 말을 중지시키고 주변에 모여 있는 최측근들의 시선을 한데 모았다.
“치라야의 문제는 전 족장과 약속했어. 그녀와 그녀의 아들은 나중에 처리하겠어. 그러니 지금은 일단 내버려 둬.”
“족장님….”
“밀리. 너라면 이해할 수 있지? 치라야의 마음, 만약 오르카 형이 죽지 않았으면 내가 바크의 길을 걸었을 수도 있어. 그런 너라면 치라야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 가잖아.”
“그건…. 그렇다 하여도 족장님께 반항하는 것은 용서할 수 가….”
“단순히 정말 몸이 아픈 것일 수도 있어. 그러니 너무 그녀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가지지는 마. 말 나온 김에 오늘 치라야에게 가볼까?”
“예?!”
“족장님!”
“그런….”
밀크의 폭탄선언, 주변 여자들이 그녀를 말리려 하였지만, 밀크의 뜻이 확고하여 말릴 수가 없었다.
[잘 하셨습니다.]
‘일단 말은 꺼냈는데…. 과연 괜찮을까? 난 치라야랑 이렇다 할 접점이 없어서 집에 찾아가도 정말 어색할 거 같은데.’
[제가 알려드린 방법대로 이행을 하려면 우선 치라야의 호감도를 올려 그녀가 밀크의 말을 전적으로 믿게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의 그녀는 당신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지 않아서 전혀 신뢰하지 않고 있습니다.]
‘알았어. 노력해 볼게…. 그런데 지금 그녀를 안는다고 과연 호감도가 오를까?’
[일단 그녀는 아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일단 당신의 호감을 사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마음이 움직이지 않은 것이지요. 그러니 당신이 먼저 다가가면 싫은 척을 하면서도 은근히 유혹해올 겁니다. 이제 혼케일이 아닌 당신이 족장이기에 더욱 말이지요.]
‘알았어. 그럼 그녀의 호감도를 올리는 걸 목적으로 삼자고. 그런 뒤 바크와그녀가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수컷이 없어 떠도는 홀스타우로스 부족을 찾는 것에 집중하자. 그게 아니면 바크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마을을 만드는 계획도 나쁘진 않을 거야.’
바크를 중심으로 한 마을 계획, 앞으로 태어날 어린 여자아이들과 바크를 함께 뛰놀게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를 중심으로 할 2세대 마을을 분리해줄 계획이었다.
부족에 속해 있고 모든 행동을 밀크의 명령을 통하여 행동하는 두 번째 마을, 그런 마을의 중심에 씨 족장의 형태로 성인이 된 바크를 둘 생각이었다.
밀크와 바크는 결국 같은 씨를 받고 태어난 사이다. 그렇기에 밀크의 아이도 바크의 아이고 바크의 아이도 밀크의 아이라 할 수 있다.
철저하게 밀크의 종족 휘하에 생기는 산하 마을이라 할 수 있는 곳을 만들어 그곳에서 부족의 인원을 늘리는 일에 바크를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대신 여기에는 조건이 있었다. 바크에겐 새로 건설되는 마을에 속하게 될 여인들과 그 여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여인들과의 관계만 허락할 생각이었다. 이미 밀크가 손을 댄 여인들과 그런 여인들의 아이들은 절대로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
여기에 바크를 따라 새로 구성되는 마을에 들어가려는 여인이 아예 없으면서도 이 방법은 초기에 없어질 계획이다.
만약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어기게 되면 그때는모든 일을 부족의 전통대로 행할 것이라는 내용도 덧붙였다.
그리고 그 바크의 행동을 억제할 여인이 바로 치라야다. 아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그녀는 밀크의 아내가 됨과 동시에 인질과 같은 형태로 본 마을에 남아 있게 된다.
축제, 또는 정기적인 보고를 올 때만 만남을 허락하며 몸을 섞지 못하게 할 것과 부족의 여 전사들을 배치하여 감시를 철저히 할 것을 강조하는 루의 해답
[치라야의 호감도를 100으로 채우면 그녀 스스로가 바크를 옳은 방향으로 교육하려 할 것입니다. 족장에게 충성하고 절대 본분을 잊지 않는 씨 족장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해주겠지요. 그것이 자신도 살고 아들도 사는 최고의 방법이 될 테니까요.]
‘알았어. 그리고 고마워 루. 좋은 방법을 알려줘서.’
[아닙니다. 더 좋은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여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럼 슬슬 이동해 볼까? 치라야의 집으로.’
밀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채비를 갖추었다. 오늘 밤 잠잘 곳을 치라야의 집으로 정한 것이었다.
아프다고 하니 건강이 걱정된 것도 있고 또 다른 여인들 사이에서 그녀에 관한 안 좋은 이야기가 도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도 있었다.
밀리와 다른 여인들은 밀크의 결정이 다소 걱정되었지만, 그의 뜻을 따라주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를 린다, 벨이 호위하여 치라야의 집으로 향했다. 잠시 후 그녀의 집에 도착한 밀크는 문손잡이를 잡고 작게 두드렸다.
“누구?”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딱히 없어서 의아함을 가진 치라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그녀는 문 앞에 서 있는 밀크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문에서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족장님?!”
“아프다고 들었는데 몸은 좀 괜찮아?”
“괘, 괜찮아요. 그, 그거 때문에 여기까지 찾아오신 건가요?”
“문병도 있고. 바크 얼굴도 보고 싶고, 또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갈 생각이야.”
“아!”
밀크의 말을 들은 치라야는 놀라서 말을 이어 나가지 못하였다. 그리고 약간 떨떠름한 얼굴을 했지만 그를 집 안으로 불러들였다.
“드, 들어오세요. 시장하실 테니 식사 준비를 하겠습니다.
린다와 벨은 내일 날이 밝으면 오겠다는 말을 하며 인근에 있는 다른 여인의 집으로 향하였다. 족장의 호위를 맡은 여전사는 다른 여성의 집을 이용할 권한이 있기에 숙소가 따로 필요 없었다.
밀크는 치라야가 밥 준비를 하는 동안 침대처럼 꾸민 바구니 안에서 잠들어 있는 바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귀엽네.’
[밀크의 어린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지요. 당신이 100배 이상 귀여웠습니다.]
‘간지러우니까 그런 말은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입니다.]
‘어휴….’
이내 치라야의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바크를 뒤로한 그는 치라야가 차린 상으로 가서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