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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한테 덮쳐졌습니다2 ─03, Imitation (10/10)

내 딸한테 덮쳐졌습니다2 ─03, Imitation 

내 몸은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내게, 대체……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 건가? 내 앞에 나타난 예슬이의 유령에 대고 꺼지라고 소리쳐야만 하는걸까? 대체 왜 너는 죽어서까지 날 이렇게 괴롭히는거냐고, 네 상(狀)은 언제쯤에서야 사라질거냐고. 제발 놔주라고. 언제까지 내게 절망을 맛보게할거냐고.

내 몸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는데, 예슬이가, 예슬이의 모습을 띤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여보, 어디 아파?”

체온을 재던 예슬이는 갸우뚱거리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열이 나는 것 같진 않은데……. 일단 앉아봐. 아침먹고 내가 약 하나 갔다줄게……”

난 그대로 역류하는 격동적인 감정의 흐름에 몸을 놓고 말았다. 난 이성을 잃고 예슬이를 끌어안으며 절규하듯 부르짖었다.

“아냐──! 아냐! 너, 환상이지? 그렇지? 곧 내 앞에서, 사라질거잖아…… 그럴거면 왜 나타난거야! 차라리 깨지않을 꿈이라면 나을텐데! 깨서 날 더 비참하게 만들거잖아! 제발 답해줘…… 이게 꿈이 아니라고. 너가 진짜라고, 예슬아…… 내가 얼마나 널 보고 싶었는데, 그렇게 꿈에도 기렸는데…… 말해봐. 곧 사라질 비누방울같은게 아닌거지? 내가 지금 헛깨비를 보는게 아니지? 하하. 너가 정말 그립긴 한가봐. 이렇게 또 나타나다니.”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왔다.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귀에선 이명이 들려왔다. 이성을 잃고 폭주하는 내 감정이 이리저리 역동하며 울려퍼졌다. 슬픔의 골이 깊었던만큼, 그 반작용도 거셌다.

내 품에 안겨있는 예슬이는 묵묵히 내 독백을 들어주다가 자상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내가 작게 입맞췄다. 그러곤 내게 속삭여왔다.

“사라지지 않아. 재현 오빠 곁에 영원히 있을게. 환상이나 꿈같은게 아니야. 이렇게 생생한 헛깨비 본적 있어?”

그러면서 예슬이는 잊혀지지 않을만큼, 화사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살짝 붉게 물든 양볼과 미소를 머금은 싱그러운 모습의 예슬이는 여전히 사랑을 속삭이는 아리따운 소녀같았다. 난 아직도 어안이 벙벙해서 예슬이가 멍하니 내 볼을 쓰다듬는걸 놔두었다.

이렇게 따뜻한 손길이─ 꿈일리가 없잖아. 차라리 꿈이라면, 이게 현실이고 저 너머에 있는 현실이 꿈이었으면 좋겠어. 언젠가 이런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옅어지는 상상을…… 그리고 난 이 순간을 이뤄준 누군가에게 정말 필사적으로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감사하다고. 물론 신이 아닌 다른 이에게.

“그, 그치만…… 그럼 윤슬이는 어디 갔어?”

그러자 예쁜 미소를 머금고서 내 앞에 서있던 예슬이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간다. 그 어여쁜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그리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오빠, 그 얘기는 또 왜 꺼내. 이, 잊고 지내기로…… 했었잖아.”

그러자 난 대번에 말도 안되는 상상이 떠올랐다. 어쩌면 예슬이와 윤슬이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뇌내 망상이 계속해서 점균처럼 증식해나갔다. 힘없는 예슬이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잠깐만…….”

난 급히 윤슬이의 방으로 뛰어갔다. 설마하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방문을 열자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윤슬이의 침대, 예쁘게 장식했던 책상, 옷장, 서랍…… 갖가지 귀여운 인형들도…… 오로지 텅 빈 하얀색 벽지의 공간만이 있을뿐. 그리고 그곳에 작게 놓여있는 한 장의 사진이 보였다.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윤슬이는 아마 9살? 10살? 그때쯤의 나이로 보였다. 아직 어린 딸의 모습을 보며 난 회한에 잠겼다. 사진 앞에는 작은 십자가가 놓여 있었고 십자가는 오랫동안 방치해뒀는지 먼지가 잔뜩 끼어있었다. 결국 내 무릎이 꺾여버렸다. 덜컥, 하고 내려앉아버린 심장에 찬찬히 먼지가 쌓여갔다. 그렇게 무릎꿇고 앉아있는 내 뒤로 예슬이가 다가와 읊조렸다.

“왜 또 그러는거야…… 왜…… 벌써 윤슬이 죽은지 7년이나 지났는데……”

난 그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걸까. 난 뒤에 서있는 예슬이를 문득 바라보다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거지? 예슬이와 윤슬이의 인생이 뒤바뀌기라도 한걸까? 아니면 여태껏 윤슬이와 지내왔던 시간들은, 그저 내 꿈에 불과했던것 뿐일까? 하하. 대체…… 뭐가 뭔지 모를 지경이었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왔다. 그제서야 교통사고를 들었던 당시의 기억들이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치직─……」

‘여보세요─?’

‘여보, 여보…… 윤슬이가…… 윤슬이가……’

‘윤슬이가 왜?’

‘통화하던 사이에 윤슬이가 어머니께 드릴 선물을 놓쳐서 그걸 주우려다 차에 그만……’

“다 잊기로 했었잖아……. 왜…… 이제서야 그 얘기를 다시 하는건데…… 이제 더 이상 아파하지 않기로 했었잖아……”

유리알같은 눈물이 아내의 눈에서 뚝뚝, 떨어진다. 난 일어서서 예슬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내 손에 닿는 이 감촉. 식어버린 뺨의 미온. 모든 것이 생생하다. 어루만져봐도 이것이 허상인지, 난 판별할만한 감각이 없었다. 내게 지금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난 겨우 예슬이를 진정시키고 밖으로 나섰다.

핸드폰을 켜보니 배경화면에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찍었던 윤슬이와 내 사진이 아니라, 예슬이와 내가 다정하게 팔짱을 키고서 찍은 사진이 있었다. 팔에 돋는 소름을 느끼며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아파트 단지로 나서니 주변은 초토화되어 있었다. 마치 세기말의 풍경을 보는 것 같았다. 가로수가 뿌리째 뽑혀 길에 나뒹굴고 있었고, 자동차들이 뒤집혀 있거나, 아직도 화염이 피어올라 검은 연기가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동차를 운전해서 어딘가로 갈만한 정신이 아직 들지 않았기 때문에, 난 약에 취한 사람마냥 비틀거리며 정처없이 걸어다녔다.

핸드폰을 열자 인터넷 기사의 팝업이 떠올랐다.

「이틀전에 상륙한 슈퍼 태풍 ‘키쿠’로 인한 사상자 1,000명 속출─」

「재산 피해가 6,000억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

하지만 글자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오전 7시 23분인것을 확인하고 핸드폰을 꺼버렸다. 아직도 어질어질하다. 마치 시력이 안좋은 사람이 안경을 안끼고 거리를 활보하는듯한 느낌이다. 모든 사물들이 비틀리고, 흐리멍텅하게 보였다. 슈퍼에서 캔커피 하나를 구매하고, 타는듯한 목을 축였다. 커피를 마시니 조금 정신이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난 지금 내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기이한 상황에 대해 누군가가 설명해줄 필요성을 느꼈다. 난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회사 후임 세명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형님. 왠일이세요. 내일까지 태풍 여파 때문에 자택 근무라는데.」

“어. 세명아. 나 물어볼게 있는데. 진짜 이상한 일이다? 분명히 어제까지 윤슬이 재우고 TV좀 보다가 잤던 것 같은데, 눈 떠보니까 예슬이가 아침을 하고 있었다니까?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냐?”

그런데 세명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혀, 형님? 그때 병원에서 준 약, 아직도 드시고 계세요?」

“뭐? 뭔 약?”

「하…… 형님 또 약 깜빡하셨나보네. 그때 형님 윤슬이…… 크흠! 교통사고 당했을때 스트레스 엄청 받으셨잖아요. 형수님도 그때 많이 힘들어하셨고…….」

난 하마터면 핸드폰을 떨어트릴 뻔했지만 겨우 손에 힘을 쥐었다. 세명이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윤슬이 하늘나라 가고나서 형님 많이 힘들어하신건 저도 잘알죠. 최근에는 좀 덜한 것 같더니, 아직도 환각 같은거─ 보이세요? 아마 외상 스트레스 증후군 같기도 한데. 아무튼 지금 집에 들어가서 빨리 약부터 드세요. 형수님도 오늘 갑자기 저한테 하소연 많이 하셨다고요. 오늘 아침부터 갑자기 형님이 윤슬이를 찾는다고 좀 도와달라고…… 왜 그러냐 했더니만……」

난 헛웃음을 흘렸다. 그뒤로도 세명이의 진심어린 충고를 몇번 듣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난 곧바로 구청으로 찾아가 가족등본 조회를 신청했다. 구청에는 태풍의 여파로 인한건지 모르겠다만, 사람이 엄청 많았다. 모니터 앞에 서서 신청 버튼을 누르자 약 3분 정도 지나니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자세한 정보들은 생략하고, 자식 관계 항목으로 넘어가자……

최재현(38)父

임예슬(37)母

최윤슬(10)女(20xx년 9월 17일 교통사고로 사망.)』

난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한순간에 뒤바뀐 이 현실이. 난 겨우 몸을 가누어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여태껏 어디 있다 들어왔어? 지금 밖에 되게 흉흉한데 나가지 말라니까.”

“예슬아……!!”

난 복받쳐오는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예슬이에게 안겼다.

“윤슬이, 죽은거지? 정말로 죽은거 맞아? 너가 살아있는거고?”

예슬이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져갔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넌…… 너는…… 제발 날 먼저 떠나가지마…… 어느날 갑자기 죽거나, 이러지 말라고…… 알았어?”

“응……. 알았어 재현 오빠.”

예슬이는 내 어깨를 어루만지며 내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웁, 으음. 흐읏……”

난 예슬이의 촉촉한 입술에 내 마른 입술을 맞췄다. 너무도 절박한, 헐떡이는듯한 키스였다. 난 스웨터를 입고있는 예슬이의 상체를 더듬다가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속옷에 싸여있는 예슬이의 가슴을 붙잡았다. 이 따뜻한 속살의 온도도, 내 귀에 와닿는 예슬이의 떨리는 한숨도, 모두 진짜였다.

꿈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생생했다.

지난날, 윤슬이와 함께했던 날들은 비누방울처럼, 사그라들었다. 잠시 내가 꾸었던 꿈인걸까. 이게 바로 현실인가.

난 예슬이의 희고 가는 목덜미에 입을 맞추곤, 살며시 깨물었다. 예슬이가 우는 듯한 신음을 짤막하게 흘렸다. 예슬이가 촉촉해진 시선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예슬이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오빠…… 오늘, 둘째 만들어볼까?”

난 문득 옷을 벗기다말고 예슬이를 응시했다. 예슬이가 쓰게 웃으며 내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이젠 윤슬이 놓아주는거야. 그게 윤슬이가 바라는 걸지도 몰라. 언제까지 자기 때문에 슬퍼하길 바라겠어…… 분명 윤슬이도 엄마 아빠, 행복을…… 바랄거야……”

난 고개를 끄덕이며 예슬이에게 키스했다. 브래지어를 벗기고 예슬이의 젖가슴 사이로 코를 파묻고 가슴 밑부분에서부터 핥아 올라갔다.

아직도 이 모든 것이 꿈같은 시간인가? 정녕 내 주변의 만물이 환상으로 보이나? 얼마 안있어 녹아내릴 비누방울일까? 아니. 아니야…… 여태껏 난 내 자신을 꿈에 가두고 있었던거다. 「치직─!」 순간 또 머리가 극심하게 아파왔다. 아니, 방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예슬이가 걱정했지만, 난 괜찮다며 다시 움직였다.

“하아, 아아…… 오빠…… 아흑─”

예슬이의 신음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머릿속, 내가 꾸었던 꿈같은 시간들이 지워나가지고 있는게 아닌가, 하고. 문득 갑자기 그런 생각이 떠오른건 왜일까? 윤슬이와 지냈던 악몽같은 시간마저, 잠시나마 행복했던 뒤틀렸던 시간들의 위로…… 예슬이와의 기억들이 겹쳐진다.

윤슬이를 잃고나서 처음으로 우리 부부는 말다툼을 하기도 했고, 고함을 지르기도 했었다. 하지만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안아주기 시작한다. 이건…… 단순히 예술이와 섹스를 하는게 아니다.

정화……

정화다.

상처받았던 기억들. 불투명한 악몽들. 지옥같던 순간들이……

먼지처럼 날아가버리는 듯하다.

이제 우리 둘은 껴안고 격렬하게 서로의 몸을 탐하고 있었다. 예슬이가 환희의 미소를 지어보이며 내게 키스했다. 살이 부딪치는 다소 원색적인 소리, 입안에서 혀가 움직일때마다 나는 소리와 삐걱거리는 침대 소리.

그저 내가 고민하고 회상했던 모든 것들이…… 비누방울처럼 깨어져나갔다.

“하아아…… 여보오……!”

“예, 예슬아…… 으, 으윽. 흑!”

머릿속이 하얗게 텅 비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대로 난 예슬이의 몸 안에 또다른 생명을 잉태할 씨앗을 잔뜩 쏟아내버렸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젠…… 윤슬이를 놓아줄 때가 온 것 같다고. 아내의 몸을 꼭 끌어안으며 우리는 관계후 잔뜩 달아오른 이 서로의 열을 느꼈다.

젊은 시절 타오르던 사랑처럼, 이 기분좋은 미열은 침대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그렇게…… 난 7년전 먼저 떠나간 딸을 놔주었다.

* * * * *

딸랑─……

청명한 방울 소리가 울린다. 유리 문이 열리자, 고풍스러운 나무 원목으로 꾸며진 카페 내부가 드러났다. 은은한 주황빛 조명과 천장에 걸려있는 아기자기한 인형들과 장신구들. 레코드판 특유의 지지직거리는 스크래치 소리가 간간히 들리는 콘트라베이스의 소리. 카운터 위에 걸린 나무 목판에는 ‘Deux la mort’라는 문구가 음각되어 있었다. 목판 위쪽에는 월계수 가지에 휩싸인 외눈의 형상이 끊임없이 카페 곳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소 섬뜩해보이는 배치였는데, 눈알은 마치 살아있는것처럼 깜빡거리면서 생동감넘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 오랜만이네. 헬로우~”

카운터에서 멍하니 눈을 감고있던 묘령의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카페로 들어온 인영을 반겼다. 그녀의 검푸른색 눈이 이채롭게 번뜩였다. 최한비, 그녀는 자리에 착석한 손님을 향해 커피잔을 갖다 놓으며 손님 앞에 앉았다.

“그래,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윤슬아?”

머리를 덮는 검은색 후드를 걷어내자 완전히 붉은 눈망울이 드러났다. 마치 핏빛같은 그 작열하는 눈동자는 최한비를 아무런 감정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완연한 요녀의 모습을 하고있는 최윤슬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퇴폐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윤슬은 글라스에 담겨있는 짙은 검은색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최예슬이 되고 싶어요.”

최한비는 묵묵히 웃는 낯으로 있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라, 그게 무슨 소리이려나~”

윤슬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턱을 괴고 다시 속삭이듯이 말했다.

“최윤슬은 죽고, 최예슬이 산걸로. ─둘을 바꿔줄 수 있나요?”

비로소 이해한듯, 최한비의 얼굴이 굳었다. 윤슬은 조소를 지으며 다시 커피를 마셨다. 한참 적막이 흐른뒤 나직하게 최윤슬은 말했다.

“──엄마를 대신해서, 제가 살아갈게요.”

그것은 마치 사악한 어릿광대의 웃음 같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말한 것이 웃겼던지 최윤슬은 한참을 낄낄거렸고, 최한비의 얼굴은 한없이 굳어갔다.

내 딸한테 덮쳐졌습니다2 ─04, metamorphosis 

“──하, 그게 너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나 해? 너가 말한걸 지금 현실적으로 구현하려면 일단 인격 해리는 필수야. 그건 알고 있지? 모든 사술이 행해지기 전에 기초적으로 있어야 하는 전제 조건이야.”

윤슬은 미소지었다.

“이미 증상은 오래전부터 나타났어요. 아빠 속에서 들려오는 그 차갑고, 날카롭고, 끈적끈적하고, 난폭한 목소리요. 그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은 했었어요. 그러니까 자연 궁금해지더라고요.”

윤슬은 잠시 커피를 마시고 입을 열었다.

“아빠는 순혈 새벽 요정들 중에서도 가장 본능에 충실한 진신(眞身)을 가지고 있어요. 원하는게 있으면 뜻대로 가지고, 맘에 들지 않는게 있으면 파괴하고. 자기 욕구에 매우 충실하죠. 아빠처럼 자기 관리가 뛰어난 사람에게 그런 진신이 있다는게 조금 아이러니하다만.”

한비는 이마를 지긋이 누르고는 허공에서 손을 한번 휘저었다. 검은색 곰방대였는데, 연녹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연기에서는 마치 온갖 화학 폐기물들을 섞어놓은 듯한, 지독한 냄새가 났다. 윤슬은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중지와 약지를 접고 탁자를 한번 두들겼다.

그러자 자신에게 다가오던 연기가 허공에서 뭔가에 부딪친듯, 물러났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비가 중얼거렸다.

“확실히 혈통이 전승된것 맞나보구나. 아직 약관이 되지도 않았는데 무언 영창이라.”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보지 않으셨어요?”

빙긋 웃으며 검지로 허공에 동그라미를 긋자, 연기들이 모두 최한비의 코로 들어가버렸다.

“콜록, 콜록! 너무해애!”

최한비는 한참이나 기침을 하면서 손수건에다가 코를 풀었다. 눈물까지 글썽글썽한 눈으로 윤슬을 쳐다보자 그녀는 움찔했다.

‘윽…… 하여튼 이 언니는 조심해야돼…… 절대로 아빠랑 만나게 하면 안되겠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최한비의 마성을 경계하며 윤슬이 숨을 가다듬자, 한비는 묘한 눈빛으로 윤슬을 응시했다.

“너 방금 나를 방사능 폐기물이라도 되는듯 쳐다보는 듯한 눈빛이었는데.”

“착각일거에요. 언니.”

어쨌든 한비는 어디선가 나타난 종이와 펜을 끄적거리며 필요한 사항들을 적어나갔다.

“후…… 일단 네가 예슬 언니가 되려먼 우선 네 아빠의 기억을 왜곡해야돼. 7년전 죽은건 최윤슬, 산건 최예슬로. 인격 해리가 이미 말기 증상이라면 그것만큼 더 쉬울게 없지. 아 물론 주변 인물들의 기억도 뒤틀어야돼. 사고 기록도 바꿔야되고. 최소 100명 정도는 일일이 찾아다녀야 할거야.”

윤슬은 어느덧 빽빽하게 채워진 종이를 바라보며 이것저것 사항을 더 추가했다.

“진(陣)의 형태는 거미줄 방사형으로 할게요. 아무래도 주문을 펼치는데에는 이게 제일 편하더라고요.”

한비는 어깨를 으쓱이며 중얼거렸다.

“내가 아는 애도 집에다가 거미줄을 가득 뿌려놨는데. 보면 고개가 절로 저어질 정도야. 하여튼 자기 남자한테 죽어라 물고 늘어지는 것들은 정말 거미랑 연관이 깊은가봐.”

“거미줄에 묶어두고, 절대 내보내지 않겠다는거죠. 혹여라 다른 꽃에 현혹되진 않을까……. 누군가 물어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거미줄을 짜는거죠. 내 것이 나로부터 절대로 벗어날 수 없게. 영원히 거미줄 속에서 발버둥치게……”

한비는 팔에 돋은 소름을 슥슥 비비며 헬쑥한 얼굴로 도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왜 새벽 요정들 중에서는 정상적인 사랑을 하는 애들이 없을까.’

그러다가 문득 자기 생각을 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뭐, 내가 할말은 아니지.’

“한비 언니. 심령술로 대지의 기억을 읽을 수 있는 최대 한계가 얼마나 되요?”

윤슬이 서적을 뒤지다가 문득 한 질문에 한비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도면을 그리며 말한다.

“글쎄? 한 15년? 아마 내 실력으로는 그 정도까지 읽을 수 있을걸.”

“엄마가 사망한 날짜는 20xx년 9월 17일이고, 위치는 마포역 3번 출구 앞 횡단 보도에요. 언니가 7년전에 그곳에서 벌어진 사고를 재구축하고 거기에서 파생된 기억들을 제가 수집할게요.”

그러자 한비가 다시 곰방대를 피워물면서 탐탁치않은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 사고를 네가 다시 경험하게 될지도 몰라. 정신적 피해가 클텐데, 괜찮겠어?”

그러자 윤슬이 깔깔 웃으면서 탁자를 친다. 한참을 그렇게 배를 부여잡고 웃다가 문득 최윤슬은 히죽, 웃었다.

“내가 일부러 죽인건데 무슨 정신적 피해에요. 언니. 킥킥. 어차피 인간 어미는 대리 자궁에 지나지 않아요. 당연히 같은 종끼리 사랑하는게 맞지 않나요? 인간들이 어렸을때 벌레 채집을 구실로 아무렇지도 않게 잠자리 날개를 뜯어버리거나, 개미를 짓밟는걸 뭐라 하진 않잖아요? 그거랑 똑같은거에요.”

아무렇지않게 말하는 최윤슬을 보며 최한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연녹색 음울한 연기가 카페 환풍구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그녀는 한참동안 곰방대를 태우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네 가치관이 그렇다면야. 새벽 요정들 중에서도 너처럼 혼돈을 추종하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나처럼 균형을 추구하는 자들도 있기 마련이지.”

“그렇지만─ 결국 질서를 추구하는 자들은 없다는거네요.”

한비는 거미줄 방사 마법진의 도면을 마무리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혼세의 주민들 중에 질서를 추종하는 자는 못해도 추방, 심하면 영혼의 멸. 질서를 추종하는 자가 있었다면 진작에 현세에 살았겠지. 요즘처럼 현세와 혼세의 경계가 다시 옅어지는 시기에는 그게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만.”

한비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카운터에서 차키를 가져왔다.

“그럼 바로 시작해보자.”

* * *

마포역 3번 출구. 차를 잠시 도로 한켠에 세워두고 한비는 윤슬과 함께 7년전 사고가 일어났던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한비가 품에서 시약을 담은 작은 꾸러미를 꺼냈다. 그런데 누군가의 목을 잘라 그 안에 집어넣기라도 한듯, 꾸러미 바닥에서 검붉은 핏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도 했다.

윤슬이 그걸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 수상하게 여기는거 아니에요?”

“걱정마. 어차피 사술이 벌어지는 동안에는 평범한 이들은 우리를 인식하지 못해. 사냥꾼들이 보기라도 하면 골치아파지니까 빨리 행하고 떠나야돼.”

윤슬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호등을 노려보았다. 붉은색으로 가만히 서있던 신호등이, 초록색 걸어가는 모습으로 바뀐다.

둘은 태연히 걷다가, 문득 횡단보도 한가운데에 멈춰선다. 한비가 눈짓으로 장소를 정확히 자문하자, 윤슬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비의 가는 손가락이 꾸러미를 묶은 줄을 푼다. 꾸러미를 거꾸로 뒤집자 그 안에서 하얀 가루들이 떨어진다.

“말해주겠니─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기억해보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니?”

마치 속삭이듯이 읊조리는 한비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들린다. 하얀 가루가 떨어지고, 순간 주변이 비틀린다. 그 속에서 한비와 윤슬만이 온전히 있었다. 모든 것이 뒤로 돌아간다. 걷는 이도, 차들도, 신호등, 해와 달이 뜨고 지고…… 빠르게 뒤로 돌아가던 모든것이 이내 정지했다.

그리고 윤슬은 다시 한번 목도했다. 자신의 어미가 차에 치이는 것을. 그녀의 하얀 이가 드러났다. 자신의 사술에 걸려든 트럭 운전사는 시내에서 시속 100km넘게 엑셀을 밟고, 최예슬은 선물을 흘린 자신을 뒤로 밀쳐내고 차에 치인다. 그리고 엄청난 굉음과 함께 어머니의 육신이 갈가리 찢겨나간다.

이 모든 것이 신기했다. 자신은 타인의 시선으로 이 사고를 관찰하고 있었다. 어린 자신도 보였다. 그리고 어린 자신을 바라보았다. 온몸에 피가 튀긴 아이는 처참한 광경을 목도한 충격이 아니라…… 너무나도 희번득하게 웃고 있었다. 그에 윤슬도 웃음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정말 너무 나답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윤슬은 눈을 감고 정확하게 예슬이 차에 치였던 지점으로 다가가서 그곳에서 남은 핏자국을 어루만진다.

“방사형 율법진 개형. 검색 항목은 위 사건과 관련되어 현재까지 온건하게 기억이나 인상을 확연한 의식에 기억하고 있는자.”

그녀 주변으로 막대한 양의 새파란 줄이 뻗어나간다. 그 막대한 양의 마력 운용에 한비도 표정을 굳힌다. 곧 기억의 잔상들이 윤슬의 진을 타고 흘러들어온다.

주부 이정원. 회사원 강일구. 대학생 성현우. 의사 정재한. 간호사 이채원. 회사원 장민혁……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 의념이 머릿속에 들어온다. 윤슬은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의외로 많네. 하긴 뉴스도 떴을테고, 직접 본 사람도 많았겠지.’

생각한 것 보다 더 인원이 많았지만, 어차피 리스트는 완성되었다. 윤슬이 고개를 끄덕이자 비로소 현재의 풍경이 다시보인다. 신호가 끝나기전 후다닥 차가 있는 쪽으로 돌아온 윤슬은 레닉스 폰을 한비에게 넘긴다. 윤슬이 손가락을 튕기자 목격자들의 신분, 거주지, 개인 정보가 모두 차 안의 공간에 떠다닌다.

“이쯤은 광명회 하부 조직에서 처리해줄수 있죠?”

“실질적으로 기억하고있는건 539명 정도네. 이 정도야 하루 쯤이면 충분해. 조직원들이야 넘치니까. 교통사고 기록은 조회해서 수정하면 되는거고, 인터넷 기사글들은 어차피 한꺼번에 일괄되게 수정될거야. 그래서 수고비는?”

한비가 손을 내밀자 윤슬이 얼굴을 찡그리며 한비의 손바닥 위에 작은 루비알 4개를 조심스레 올려놓는다. 그러자 한비의 눈에 이채가 돈다.

“어머, 예뻐라. 이거 루비맞아?”

분홍빛이 감도는 루비가 아니라, 완전 새빨간 색의 불길해보이는 루비알이었다.

“피로 만든거에요. 친가 쪽에 연금술 서적이 있어서 그거 보고 만들어봤어요.”

“그걸 보고 따라서 만든다고 이런 품질의 보석을 만들 수 있는건 아닐텐데……. 어쨌든 잘 받을게.”

그녀가 말아쥔 손바닥을 다시 피자, 루비알은 온데간데 없었다.

“이제 남은건 아빠한테 가서 나머지 술식을 펼치는 일뿐이네요.”

한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운전대를 잡았다.

“우선 기억 왜곡이랑, 귀신들림, 인식 장애, 망상 증폭, 침식…… 필요한 주술만 5개네. 그리 힘든건 아니지만. 그래도 귀찮은걸.”

문득 카페로 다시 향하던 도중, 차창에 빗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일주일뒤에 태풍이 온다고 했었나?”

그러자 윤슬의 눈동자가 번뜩인다.

“네. 이번에 규모가 꽤 크다고 들었어요. 예수회에서 공들인 놈이라 그런지 조금 크던데.”

“그날에 일을 치루는 건 어때?”

윤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아요. 2시간만 재우면 되는거죠?”

“미리 초석을 다져야 하니까. 아주 깊게 재워. 율법진을 집안 곳곳에 그려놓을테니까.”

쿠르르릉─……!!

칠흑같은 어둠이 사방에 깔렸다. 어느덧 흐리던 하늘은 막대한 양의 빗방울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어두운 차 안에서 윤슬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 * *

그렇게 난 태풍이 몰아닥친날, 아빠와 교합했다. 그리고 그날밤 율법진의 작동을 통해 모든 기억과 현상들의 조작을 최종 확인했다. 아빠의 직장 동료, 친인척, 사건의 목격자, 관계자까지. 완전 범죄를 저질렀을때 희열이 이런걸까? 난 기쁨에 넘쳐 아침 요리를 만들었다. 평소에 부르지도 않던 콧노래를 부르며 찌개를 끓이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예슬아──?”

옛날에, 아빠가 날 한번 엄마의 이름으로 부른적이 있었다. 그때처럼 요리를 하던 내 뒷모습을 보고서 착각을 했다고. 하지만 이번엔 아닐꺼야. 왜냐하면 난 아빠가 바라는대로, 엄마의 탈을 쓰고─ 아빠 옆에서 평생 행복하게 살거니까.

명백히 아빠의 얼굴은 당혹감에 가득 휩싸여 있었다. 난 화사하게 웃으며 아빠를, 조금 색다르게 불렀다.

“응, 일어났어? 자기야?”

하아, 조금 젖은 것 같아. 난 단숨에라도 올라올것 같은 달콤한 한숨을 겨우 억눌렀다. 기쁜 감정이, 너무 벅차올라서 참을 수가 없다. 이렇게 싱글벙글한 표정을 짓는것도 정말 얼마만일까.

“여보, 어디 아파?”

여전히 혼란스러워보이는 아빠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다행히도 몸에 큰 이상은 없는 것 같았다. 사술의 부작용이라기보다는, 지금 벌어진 이 상황이 믿겨지지가 않는거겠지. 어때요? 아빠? 딸의 이 서프라이즈가?

“열이 나는 것 같진 않은데……. 일단 앉아봐. 아침먹고 내가 약 하나 갔다줄게……”

그 순간, 아빠가 악에 받친 소리로 날 밀어내며 외쳤다.

“아냐──! 아냐! 너, 환상이지? 그렇지? 곧 내 앞에서, 사라질거잖아…… 그럴거면 왜 나타난거야! 차라리 깨지않을 꿈이라면 나을텐데! 깨서 날 더 비참하게 만들거잖아! 제발 답해줘…… 이게 꿈이 아니라고. 너가 진짜라고, 예슬아…… 내가 얼마나 널 보고 싶었는데, 그렇게 꿈에도 기렸는데…… 말해봐. 곧 사라질 비누방울같은게 아닌거지? 내가 지금 헛깨비를 보는게 아니지? 하하. 너가 정말 그립긴 한가봐. 이렇게 또 나타나다니.”

아빠는 눈물을 흘리며 비통한 표정으로 날 끌어안고서 울부짖었다. 아아, 아빠. 그렇게 슬펐구나. 후후. 괜시리 미안해지네. 그리고 난 아빠의 기억 속에서 본, 엄마 특유의 톤과 호칭, 목소리를 모두 살려 말했다.

“사라지지 않아. 재현 오빠 곁에 영원히 있을게. 환상이나 꿈같은게 아니야. 이렇게 생생한 헛깨비 본적 있어?”

아아, 너무 웃기다. 엄마를 연기하면서 아빠를 위로하는 내가. 너무나도 우습다. 이 상황이 너무 희곡같아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 그치만…… 그럼 윤슬이는 어디 갔어?”

그 순간 난 심장이 터질뻔했다. 아아. 그렇구나. 아빠의 눈빛에서 보이는 갈등이 너무나도 훤히 보였다. 아빠는 엄마보다 내가 더 좋았던거구나. 분명 아빠가 꿈처럼 기린 상황이었지만, 모순되게도 아빠는 아내를 되찾았다는 기쁨보다는 딸을 잃었다는 아이러니한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이제 완벽히 인격의 분리가 이루어져 정작 본인은 듣지 못하겠지만.

‘아아! 아쉽다! 그래도 딸년이 애미년보단 더 먹음직스럽고, 먹는 보람이 있는데! 아쉽다! 아쉬워!’

‘그렇게! 그냥 두지! 존나 아깝네! 씨발! 애미 쪽도 좋긴 하지만, 그래도 어린 년이 색기도 더 쩔고 교태스럽잖아! 제길, 제길! 제기랄!’

끊임없이 아빠 속에서 들려오는 난폭하고 거침없는 욕설과 비명이 나한테는 너무나도 감미로운 속삭임같았다. 아, 나 피학 기질이 있는거일지도 몰라. 물론 아빠에 한해서라면?

그리고 난 바로 연기를 시작한다.

“……오빠, 그 얘기는 또 왜 꺼내. 이, 잊고 지내기로…… 했었잖아.”

일단 얼굴에 혈액 순환을 줄이는게 포인트, 떨리는 목소리와 동요하는 눈빛은 덤이다.

“잠깐만…….”

그 말을 듣고 아빠는 곧바로 내 방으로 뛰어갔다. 난 급히 달려가는 아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미 내 방에 있던 물건들은 모조리 소거했다. 물론 물건들 뿐만 아니라, 날 기억하던 모든 이들을 지워버렸다. 10살 이후에 한해서. 완벽하다. 이제 난 최윤슬이 아니라 최예슬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아빠랑 정식으로 부부 사이고, 남들의 눈초리를 살 필요가 없다.

물론 신세계질서 완성까지만 한해서다. 근친혼과 동성애, 일처다부,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는 열개의 왕국이 이 땅에 세워지기 전까지는…… 우린 평범한 가정을 연기해야하니까. 어차피 그때쯤이면 아빠의 본신을 깨울테니까 상관없겠지. 오히려 내 연기가 죽여줬다며 칭찬하고 학대해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아빠는 자신이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있으니 이런 귀찮은 일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다. 뭐 그래봤자 5일간의 공작으로 끝났으니까. 이런 대규모 프로젝트가 아무렇지도 않게 끝나다니. 세상참 무섭다니까.

난 내 방에서 무릎꿇고있는 아빠에게 다가갔다.

“왜 또 그러는거야…… 왜…… 벌써 윤슬이 죽은지 7년이나 지났는데……”

그러자 뒤돌아본 아빠는 순간 이마를 부여잡으며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됐다. 드디어 이식한 모조 기억들이 살아나는구나. 아빠 주변의 방사형 율법진이 활발하게 움직인다. 아빠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내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이 집을 뒤덮고있는 마력의 빛이─ 미친듯이 활성화되고 있었다.

“다 잊기로 했었잖아……. 왜…… 이제서야 그 얘기를 다시 하는건데…… 이제 더 이상 아파하지 않기로 했었잖아……”

그리고 연기의 클라이맥스! 눈물을 뚝뚝 흘리며 흐느낀다. 아아, 차라리 연예인으로 데뷔라도 할걸 그랬어. 아빠랑 스캔이 터진 여자 탤런트, 얼마나 가쉽거리가 좋아? 희대의 막장극이려나? 난 또다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웁스, 미소를 지으면 안되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진정시키느라 죽는줄 알았다.

그뒤로도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아빠랑 섹스를 했다. 하필이면 위험일에 잔뜩 질내 사정. 내 자궁을 가득 채우는 아빠의 따뜻한 정액을 느끼며 난 환희했다. 아빠의 아이를 밴다니. 어쩜 짜릿한지. 헤헤.

난 너무나도 즐거운 나날이었다. 엄마의 기억을 흡수해 교회에도 꾸준히 나가면서 적절히 인맥을 관리해나갔다. 뭐, 어디까지나 대환란 이전의 유희에 불과한 일이다만.

최윤슬이 아니라 최예슬로 살아가는데, 부당하다 느끼지 않냐고? 내 삶이 아닌 타인의 삶을 살아가는데, 그게 진정 행복이냐고? 당연히 행복하지. 아빠랑 적어도 이렇게 남의 시선 신경쓰지 않고 안길 수도 있고, 언제나 키스할 수도 있잖아? 아아──. 최윤슬. 최예슬. 내가 지금 여기에 누구의 신분으로 서있는지 그런건 중요하지 않아.

엄마는 죽었고, 난 지금 여기서 아빠랑 같이 있는걸.

누구보다도, 난─ 진정 행복하다.

그래서…… 흘러나올 수 없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결국 터뜨리고 말았다.

“풋, 아하하하─!!”

문득 길을 같이 걷던 아빠가 의아한 시선으로 날 쳐다본다.

“뭐가 좋길래 그렇게 웃어?”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빠의 팔에 매달렸다.

“으응, 아무것도 아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 아빠의 손길을 즐겼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다가 문득 난 내 배를 어루만졌다.

임신 1개월이다.

또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친아버지의 아이를 밴 친딸. 그리고 그 친딸은 자신의 어미의 탈을 쓰고서 아비의 아내 행색을 하고 있다니. 킥킥.

재밌어서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아빠아──”

아직 젖살도 빠지지 않은 작고 귀여운 3살배기 아이가 내게 아장아장 걸어온다. 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로 다가온 이 작은 천사를 끌어안았다.

“응, 우리 딸! 오늘은 뭐하고 놀았어!”

“이슬이 오늘 친구들이랑 소꿉놀이하고 왔어! 엄─청 재밌었어!”

“아유, 그래?”

난 웃으며 딸의 볼에 마구 입을 맞춰주었다.

최이슬. 우리 둘에게 찾아온 두번째 천사였다. 이번에는 더욱 열을 다에 이슬이에게 우리 부부의 애정이 퍼부어졌다. 다시는 이전과 같은 일은 없으리라 수백번 다짐했다.

정말 위태롭기 짝이 없던 가정은, 이슬이의 존재 덕분에 이제 견고하고 안전해졌다. 안도하면서도, 소중한 딸을 끌어안았다.

주방에서 포크 커틀렛을 굽던 예슬이가 접시에 토마토와 샐러드를 담아 상 위를 풍요롭게 채운다.

“자, 이슬아. 빨리 와서 밥먹어~ 자기도 이쪽으로.”

“응.”

난 문득 이제는 이슬이 방이 되어버린 윤슬이의 방을 쳐다본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폭풍우가 몰아치던 날──.

신을 향해 부르짖으며 신앙을 정면으로 부정했던 날─.

그리고─……

“여보─ 뭐해요?”

이미 이슬이에게 잘게 썬 포크 커틀렛을 먹이며 예슬이가 내게 핀잔을 준다.

“아, 금방갈게.”

…………

……

미안해. 예슬아.

──하지만 난 지금 너무 행복한걸.

난 너도 사랑하지만, 지금의 예슬이도─ 사랑하는걸.

웃음이 흘러나올 수 밖에 없었다. 지조섞인 의미도 있었지만, 너무나도 기뻐서.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하여튼 기득하다니까. 오늘도 잔뜩 안아줄거다. 이슬이 동생을 이제 만들어주는 것도 괜찮겠지.

……

뭐…… 윤슬이 동생이기도 하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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