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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조교일지-82화 (8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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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를 어렵지 않게 굴복시킨 베론은 느긋하게 마탑으로 돌아왔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하층은 늘 그랬듯 적당한 흥분감에 휩싸여있었다.

하지만 고위 마법사들이 머무는 상층까지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은 흔치 않았다.

'무슨 축제라도 벌어지는건가?'

공방의 문을 열며 바지를 벗어서 인사하자 제자와 노예들이 쪼르르 달려온다.

그는 그녀들의 봉사로 여독을 풀며 노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조만간 무슨 행사라도 있는거냐? 마탑이 꽤 어수선하던데..."

"행사요? 아, 가장 대회 준비를 보신거군요."

베론의 어깨를 주무르던 세리스가 손뼉을 치며 말하자 이리나와 앨리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베론은 본능적으로 하반신이 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분명 좋은 소식 같았다.

"가장 대회? 그게 뭐지?"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평소와 다른 직업의 옷을 입고 연기를 하는거에요. 별건 없지만, 이게 나름 오랫동안 이어진 유서깊은 대회라네요. 이번이 50주년이라 특별히 마탑에서 개최하는 것 같아요."

"다른 직업의 옷을 입고 연기한다고? 그거 코스프레잖아?"

"네? 코스?"

세 여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이자 베론이 고개를 털어내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의 기행에 익숙해진 제자들은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베론은 그녀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기대로 가득찬 표정을 하며 기분 좋게 웃었다.

가장 대회의 개최일.

레이시아 마르실라는 다른 사람들과 섞여서 웅장하고 화려한 입구로 걸어들어갔다.

가족들 몰래 먼 길을 온 그녀의 손에는 옷과 화장품 등이 들어간 가방이 들려있다.

누가 보면 가출이라도 한 것 같은 행색이지만, 그녀도 한 사람의 어엿한 참가자였다.

'여기가 대회장이구나... 처음이지만 잘 할 수 있겠지?'

입상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그녀는 스스로를 바꾸기 위해서 이 자리에 왔다.

무슨 죄라도 지은 것 마냥 고개를 푹 숙인 레이시아가 덜덜 떨리는 발걸음을 움직여서 참가 접수를 진행했다.

남들보다 얼굴이나 출신성분이 꿇리는 것도 아니건만.

그녀는 정말 지독하게도 낯을 가렸다.

아마 어릴적에 사교계에서 왕따를 당한 것이 원인이리라.

그녀가 무슨 잘못을 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그녀의 아버지인 마르실라 백작의 가세가 조금 기울어졌을 뿐이다.

마르실라 백작가는 오래지 않아서 다시 일어섰지만, 그녀의 마음은 치유되지 않았다.

남들과 마주 할 때 마다 자신을 보고 웃던 사람들이 떠올라서 그녀를 지독히도 괴롭힌다.

결국 그녀는 방구석에 처박힌 채 결혼도 하지 못하고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마탑의 기술이 그녀에게 기회를 줬다.

얼마전에 유통되기 시작한, SNS용 마법도구.

익명의 세상에서는 그녀도 그럭저럭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얼굴도, 이름도 보이지 않고 채팅을 하거나 몸을 찍어서 올리면 다른 사람들이 금세 호응해준다.

보기 싫은 상대가 나타나도 블락해버리면 그만.

이 작고 근사한 세계는 그녀의 마음에 쏙 들었다.

점점 흥이 오른 그녀는 최근 유행하기 시작한 '가장'이란 것을 시도해봤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다니.

그것이야말로 지금의 그녀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던가.

원래는 하인들을 대동하고 참가하려 했지만, 말을 살짝 꺼내는 것 만으로도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레이시아는 직감했다.

SNS를 하며 증상이 호전됐다 해도, 자신은 여전히 방구석 폐인일 뿐이다.

만약 이 기회를 놓친다면 방 밖으로 나가는건 영영 불가능해지리라.

결국 그녀는 일생일대의 용기를 내서 이곳까지 와버렸다.

왕국에서 웬일로 마차까지 빌려줘서 이동은 아주 편했다.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서 접수원에게 닿은 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 참가 신청을 하려고 한다.

"저... 저어, 참가..."

그러나 늘 그랬듯, 제대로 된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마탑의 접수원은 갖가지 인간말종들을 상대해본 프로페셔널이었다.

가지각색의 기인들이 판치는 이곳에서 그녀 정도는 별난 고객도 아니다.

"참가 신청이신가요? 이쪽에 성명을 기입해주세요."

"아, 네에..."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탈의실은 저쪽에 있고, 회장 내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셔도 돼요. 그럼 건승을 기원하겠습니다."

접수원의 친절한 응대에 감탄한 레이시아는 기분 좋게 탈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역시 가장 대회에 참여하길 잘 했다.

이곳에서는 자신도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탈의실의 문을 열어낸 순간.

그녀의 자신감은 급격히 꺾여버렸다.

안쪽의 여성들은 모두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미인들.

게다가 의상과 분장의 퀄리티도 자신의 것 보다 훨씬 높다.

무엇보다도 차이가 나는 것은 바로 노출도다.

그녀들은 자신의 살결을 드러내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마탑이 개방적인 곳이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였을 줄이야.

이번 대회에 걸린 상금이 워낙 거액이라서 다들 수치심이고 뭐고 잊어버린 것 같다.

'에엣? 이, 이거 어떻게 하지? 내 의상으론 어림도 없을 것 같은데...'

그녀가 준비한 것은 비운의 노예 왕녀 에르제베스.

이 대회에서 3번 이상 우승을 가져다준, 우수한 소재다.

소극적인 그녀에겐 활발한 연기 따윈 버거운지라 자연스럽게 이쪽을 선택하게 됐다.

하지만 지금 탈의실 안에 보이는 에르제베스만 무려 다섯 명이다.

그래도 기왕 이곳까지 왔으니 의상을 입고 분장을 끝냈다.

남들에 비하면 꽁꽁 싸맨 것이나 다름없는 차림새.

그녀의 몸매가 워낙 출중한지라 그 상태로도 숨길 수 없는 음란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사람들의 시선을 제대로 모을 수 없었다.

'기껏 용기를 내봤는데...'

올해의 가장 대회는 그 어느때보다도 성황이었다.

마탑의 주민들이며 멀리서 온 관광객들이 사진 촬영용 마법 도구 따위를 들고 다니며 참가자들을 구경한다.

하지만 레이시아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녀는 의상부터 무척 얌전했을 뿐더러, 연기도 서투르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헐벗은 여자들이 포즈를 취해주니 게임이 될 리가 없다.

다른 참가자들이 자신을 보고 수군거리는 것을 발견한 그녀는 눈물을 머금은 채 회장을 뛰쳐나갔다.

역시 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나 따위는 그 어떤 기회가 주어져도 영원히 이 모양 이 꼴이겠지.

그렇게 자책을 하며 어디론가 도망쳐버리려던 중.

굉장히 뚱뚱하고 기분나쁘게 생긴 사내가 사진기를 들고 그녀에게 접근했다.

"저기, 사진 한 번 찍어봐도 될까요?"

"네에? 아... 그..."

그야말로 상상도 못한 제안.

레이시아가 몸을 굳힌 사이, 상대가 멋대로 그녀를 찍어대기 시작한다.

그녀는 그것이 당혹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른다.

아무도 자신을 알아봐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래도 한 명 정도는 있었구나.

그녀를 다양한 각도로 찍어보인 사내가 뒤늦게 아는 체를 한다.

"노예 왕녀 에르제베스 맞죠? 조금 답답해보이긴 해도 의상이 괜찮네요. 하지만 컨셉이 좀 애매한 것 같아요. 보통 에르제베스라고 하면 왕녀 시절이 아니라 노예로 전락한 뒤를 떠올리니까..."

"아앗... 죄, 죄송... 합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몇 번이고 사죄하는 레이시아.

그녀의 행동을 본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맺힌다.

이렇게 얼빵한 촌년들을 마음대로 굴리는 것이야 말로 사내의 전문분야요, 행복이었다.

그는 이내 레이시아를 살살 구슬리기 시작한다.

"분장이랑 연기는 괜찮으니까, 의상만 좀 바꿔보는게 어떨까요? 조금 더 노예 왕녀 시절에 어울리도록."

"네? 그, 그렇긴... 한데..."

사실 레이시아도 그쪽이 더 잘 먹힐 것이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맨살을 내보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물론, 지금의 제안을 거절할만한 용기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비릿한 웃음을 띈 사내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곤 마탑의 상업지구로 자리를 옮겼다.

가장 대회를 맞이해서 갖가지 의상이나 소품들을 판매하는 가게가 몇 군데나 눈에 띄인다.

그는 그 중 한 곳으로 들어가서 멋대로 의상을 고르기 시작한다.

국부를 간신히 가리는 팬티와 빈티지보단 누더기에 가까운 상의.

수갑과 족갑, 공 재갈이며 목줄 따위가 줄을 잇는다.

갖가지 구속구들의 뒤쪽에는 생색이라도 내는 듯한 면사가 놓인다.

안쪽이 훤히 비치는, 이국의 무희들이나 입을 법한 물건이다.

"자. 이 정도면 될 것 같네요. 괜찮으시죠?"

"아니. 그... 이, 이건 좀..."

얼굴을 붉힌 레이시아가 목소리를 끄집어내려고 하지만, 그래봤자 소용없다.

그의 말을 거부할 용기가 있었다면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탈의실로 들어간 그녀는 이게 마지막 기회라며 몇 번이고 변명하며 새로운 의상을 착용한다.

진짜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듯한 표정과 태도.

사내는 그녀의 변신에 만족하며 목줄을 잡고 가게를 나선다.

답답한 옷 아래에 숨겨져 있던 몸매는 그야말로 훌륭했다.

줄곧 방구석에 처박혀 있었던 것이 무색할 정도.

수갑과 족갑을 찬 그녀가 다시금 행사장에 들어서자 주변의 시선이 단번에 모여든다.

아까전과는 차원이 다른 관심도.

그녀의 노출도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도 굉장히 심했다.

"잠깐... 저 사람은 또 누구야? 전년도에는 못 본 것 같은데."

"저건 노예 왕녀 에르제베스잖아? 완성도 높은데 어이!"

아까전과는 차원이 다른 관심.

그에 힘입어서 되살아나는 자존감.

다른 참가자들이 마탑의 직원에게 이의를 제기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잠깐만요. 저건 좀 심한거 아닌가요?"

"적당히 에로하고 노출도 있는 의상이군요. 문제없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이곳은 마탑.

전 대륙에서 가장 성적으로 개방된 장소다.

사내에게 목줄을 붙잡힌 레이시아는 은근한 흥분과 고양감을 느끼게 됐다.

그녀의 상식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이미 눈치채신 분들도 많으시겠지만, 이번 에피소드의 소재인 가장 대회는 용사 조교일지에서 써먹었던겁니다.

제 소설 최초의 세계관 연동!

조교일지 유니버스의 탄생입니다!

이상, 늘 하던 개소리였습니다.

테에엥, 테에에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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