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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화로운 마차에 탑승한 베론은 때마침 방학을 맞이한 세리스와 함께 교단의 본진으로 향했다. 원래 성직자 지망이었던 세리스는 베론의 제안을 듣고 뛸 듯이 기뻐했다.
교단이 난데없이 자신을 초대한 것이 조금 의심스럽긴 했지만... 그곳은 마탑과 쌍벽을 이룰 정도의 단체다. 별 이유도 없이 거절했다가는 좋은 꼴을 보지 못하리라.
세리스는 베론의 무릎 위에 앉은 채로 초대장이 날아온 이유를 추측했다.
"이, 이건 성녀님의 인장인데... 아무래도 성녀님께서 저를 보려고 스승님을 초대하신 것 같아요."
"성녀라... 그 여자 예쁘냐?"
베론은 가장 첫번째로 솟아오른 의문을 내뱉었다. 세리스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네. 성녀님은 저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우신 분이에요. 멀리서 쳐다보기만 해도 고귀함이 느껴져서 절로 몸가짐을 살피게 되죠."
"호오. 성녀라는건 교단의 고위직이지? 세리스 너는 그런 사람과 어떻게 알고있는거지?"
추궁이라기 보다는 호기심 어린 질문에 가까웠다. 세리스는 아름다운 추억을 더듬듯 기쁘게 설명했다.
"성녀님은 원래 저와 같은 성직자 지망생이셨어요. 물론 주신님의 총애를 받아서 그때부터 남다르긴 했지만... 그래도 성녀의 자리에 오른지는 얼마 되지 않았을거에요."
"견습생 시절때 같이 지냈던 모양이구나."
"네. 모자라던 저를 친언니처럼 잘 보살펴주셨어요."
베론은 이쯤에서 슬슬 불안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세리스와 친하게 지냈던 사이라지만, 단지 그녀를 만나기 위하여 8등급 마법사를 초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성녀는 아마 그녀를 타락시킨 자신에게 복수할 셈이리라. 세리스는 그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하고 즐겁게 떠든다.
"아, 그리고 성녀님께는 굉장한 권능이 있어요. 참회의 신성력이라고 불리는 힘인데, 그 어떤 범죄자나 불한당들도 성녀님의 앞에 서면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곤 하죠. 체험자의 말에 따르면 단번에 모든 악심이 씻져겨나가는 기분이래요."
"그, 그래? 그거 혹시 마법으로 막을 수 있나?"
이곳저곳에서 찔리는게 많은 베론이 긴장한 채 묻자 세리스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마 힘들거에요. 신성력은 마법과 완전히 다른 종류의 힘이니까..."
"그렇군. 그렇게 참회를 하면 다들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건가?"
"대부분은 그럴거에요. 정말 극악무도한 죄를 지은 사람들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요."
이제야 성녀의 노림수가 이해됐다. 베론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하다가 자신을 믿기로 했다.
지금 자신은 적진의 심장부로 걸어들어가는 중이다. 이제와서 마탑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직접 초대까지 한 것으로 봐서, 성녀는 어떻게든 자신을 노릴 것이다.
피할 수 없다면 스스로를 믿고 격렬히 부딪히는 수 밖에 없다. 베론이 그렇게 생각하며 각오를 다지고 있자 세리스가 그의 반응을 오해했다.
"설마 성녀님 생각을 하시는 중이에요? 지금은 부디 저를 봐주세요."
그녀는 귀엽게 볼을 부풀리며 마차의 바닥에 꿇어앉고 베론에게 봉사하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교단에 도착한 베론은 사제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손님용 방으로 안내됐다. 성녀의 진심이 어떻든간에, 베론을 초대한 명목은 교단의 행사 참여였다.
일년에 몇 없는 축일을 맞이한 교단에서는 벌써부터 음악소리가 울리고 음식 냄새가 퍼졌다. 다들 몸가짐이 단정하고 조용한지라 시끌벅적하다는 느낌은 없었으나, 그래도 충분히 들떠있었다.
세리스는 베론과 자신의 방이 따로 지정된 것을 보고 성직자들에게 항의하려 했으나, 베론이 그것을 황급히 막았다.
"저, 저는 제자로서 스승님을 모셔야 하기 때문에 방을 따로 쓸 수는..."
"괜찮다 세리스. 교단에서는 교단의 법을 따라야지. 가끔씩은 뭐든 직접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구나."
"스승님께서 그렇게 말하신다면야..."
베론은 세리스를 진정시킨 뒤에 그녀와 함께 교단의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유서깊은 교단의 오래된 신전인지라 이곳저곳에 역사적인 유물이며 건축물들이 잔뜩 있었다.
두 사람이 예의바른 성직자의 안내를 받으며 관광을 즐기는 사이. 쇠줄로 온 몸이 묶인 사내가 높은 탑으로 끌려가는 것이 보였다. 베론이 그것에 대하여 묻자 성직자가 자랑스럽게 웃으며 설명했다.
"저건 참회의 의식입니다. 저자는 죽어 마땅한 죄를 지은 죄인이나, 그분의 자비는 온 세상 구석구석 공평하게 내려지지요. 저 탑에 머물고 계신 성녀님께서는 죄인들의 참회를 돕고 계십니다."
"아하."
베론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 머지않아 탑 위에서 그림자 하나가 떨어졌다. 방금 끌려들어간 죄수는 너무나도 행복한 표정을 지은 채 창 밖으로 투신했다.
"이, 이런..."
깜짝 놀란 세리스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자, 베론이 그녀의 눈을 가려줬다. 성직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두 사람을 진정시킨다.
"가끔씩 죄책감을 못이겨서 투신하는 분들도 계시죠. 또다시 교단의 일꾼이 한 명 줄어들었군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으음."
베론은 목 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감추며 관광을 마친 뒤, 정갈하면서도 맛있는 식사를 했다. 아무래도 요행을 바라기에는 상황이 영 좋지 않았다. 그는 오후부터 방 안에 틀어박혀서 앞으로의 전투를 준비했다.
이윽고 날이 저물어서 신전 전체가 어둠에 잠기자 정중한 노크가 베론을 방문했다. 명상과 이미지 트레이닝을 마친 그가 문을 열자 건장한 성기사들이 갑옷을 입은 채 고개를 숙여보인다. 무척 정중하지만 거절을 모르는 분위기다.
"안녕하십니까 베론 마법사님. 성녀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부디 동행해주시지요."
"알겠습니다."
베론은 허리를 당당히 펴고 탑으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성직자들은 그의 모습에 살짝 놀랐으나, 금세 비웃었다.
'마법으로 어떻게 할 수 있을 줄 아는 모양이군.'
'불쌍하긴. 그래도 시끄럽게 굴지 않아서 좋네.'
창칼을 든 성기자들이 지키는 탑의 입구를 지나자, 가파른 나선 계단이 나왔다. 높고 넓은 탑의 상층은 두꺼운 철문으로 막혀있었다.
"그럼 들어가시지요."
"안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베론이 최상층 안으로 발걸음을 내딛자 뒤쪽에서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성기사들은 그대로 계단을 내려가버린 모양이다. 방 안에는 등을 보인 채 기도하고 있는 여성밖에 보이지 않았다.
8등급 마법사와 성녀를 단둘이 놔두다니. 그녀가 자랑하는 참회의 신성력이 어지간히도 믿음직스러운 것 같다. 베론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방 안의 촛불들이 저절로 켜졌다.
"잘 오셨습니다 마법사님. 먼 길을 오시느라 무척 수고가 많으셨어요."
"성녀님께서 불러주신다면 어디든 달려가야죠."
성녀가 몸을 돌려서 얼굴을 보이자, 베론은 그대로 숨을 삼켰다. 이제껏 마탑에서 수많은 미인들을 봤건만. 그녀가 자랑하는 미모는 마법사들의 그것과는 종류가 달랐다.
단정하고 우아한 얼굴의 아래로 촛불을 받아서 빛나는 목덜미. 너무나도 탐스러운 둔부와 가슴은 딱딱하고 멋없는 성복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형태를 자랑하고있다. 부드러운 백금발이 성복의 밖으로 새어나와 베론을 유혹하듯 흔들렸다.
"감히 세리스을 스승이 자처하며 억지로 범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마탑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도 그대의 악행이 들려오니, 실제로는 어땠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군요."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원래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죠."
베론이 넉살좋게 대꾸했으나 성녀는 이미 오래 전부터 마음을 결정한 상태였다. 베론이 그녀의 냉랭한 기색에 뒷걸음을 치자 그녀가 피식 웃는다.
"저 문은 아침까지 열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봤자 최하층에 있는 경비들에게 닿을리도 없구요."
"하하, 그거 참..."
"당신의 악행도 여기까지입니다. 나가시는 길은 저쪽이니 나중에 참고하세요."
성녀가 벽면의 창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비록 아주 크거나 낮지는 않지만, 작정하고 떨어지고자 하면 충분히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녀의 조롱을 보다못한 베론이 주문을 사용하며 그녀에게 달려들려던 찰나. 성녀가 양 손을 모으더니 눈에서 광휘를 내뿜었다.
"당신의 종이 간절히 바라노니, 이 악당의 죄를 사하소서!"
짧은 기도와 함께 빛무리가 베론을 강타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악심이 씻겨져나가는 듯한 감각에 저절로 무릎을 꿇었다.
다소 기묘하긴 했지만 고통스럽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럭저럭 황홀한 기분이 든다. 성녀는 복수를 완료하기 위하여 그의 뒤로 다가가서 속삭였다.
사람들은 그녀가 이런 짓을 하는걸 모르고 있었지만, 참회의 신성력이 작용한 직후에 그녀가 속삭이면 대부분은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곤 했다. 그녀는 그것을 이용하여 마음에 안 드는 죄수들을 수도 없이 자살시켰다.
"자, 이제 자신의 죄를 좀 뉘우치셨나요? 저쪽으로 나가시면 죄책감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어요."
"으으..."
베론은 낮게 신음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린다. 성녀는 그의 행동에 당황한 채 말을 더듬는다.
"어어? 왜 뛰어내리지 않는거지? 다, 당신. 저기로 나가면 된다니까요?"
"성녀님. 저는 죽을만한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설령 제가 죄를 지었다 해도, 이 세상에서 그 죗값을 치뤄야하죠."
베론은 너무도 평온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대꾸한다. 성녀는 다시금 참회의 신성력을 사용했지만, 그가 뛰어내리는 일은 없었다.
"이, 이게 무슨... 당신은 수도 없는 여성들을 강간해서 더럽혔잖아요. 그게 죽을 죄가 아니면 뭐가 죽을 죄라는거죠?"
"뭘 모르시는군요 성녀님. 여성들과 관계를 맺어서 내면의 기쁨을 일깨워준 것이 어째서 죄라는 것이죠?"
"뭐요?"
기가 찬 성녀가 굳어있던 사이. 베론이 갑작스레 그녀를 덮쳤다. 놀란 성녀는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가 말했듯이 그걸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베론은 침대 위로 넘어진 그녀의 몸을 더듬으며 선의로 가득찬 목소리를 냈다.
"성녀님께서도 아까운 몸을 썩히고 계시는군요. 제가 여성의 기쁨을 차근차근 알려드리겠습니다."
"아, 안 돼. 저리 비켜요!"
성녀는 참회의 권능을 재차 사용하면서 깨달았다. 베론은 진심으로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다고 믿는 것이리라. 설마 스스로에게 최면이라도 걸어둔 것일까? 어쨌거나 자신의 힘으로는 그를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녀에겐 최소한의 호위조차 붙어있지 않았다. 참회의 신성력은 그녀에게 적대적인 모든 사람을 회개시켰기 때문에 호위가 필요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무력함을 체감하며 베론의 손으로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질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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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연참입니다.
즐겁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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