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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조교일지-20화 (2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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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급시험에서의 굴욕 이후. 이리나에게 음심을 드러냈던 원로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아무리 원로회의 일원이라 해도, 그는 수 많은 원로들 중 한 명일 뿐이다. 마탑에게 협조적인 8등급 마법사인 베론을 압박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베론의 정치적 발언권은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다른 원로들이 그의 폭주를 두고 보지 않았다.

"자네 요즘 과해."

그의 친구이자 중진 원로가 그를 찾아와서 건넨 말이었다. 당연하지만, 원로는 콧방귀를 뀌었다.

"마탑의 원로로서 이 정도도 하지 못한다는게 말이 되는가?"

"베론은 유용하고 순종적인 인재다. 그는 자신의 분수를 잘 알고있어. 이 이상 그의 제자들에게 집착하면 자네의 정적들이 좌시하지 않을거야."

지금껏 무리하게 베론을 압박하느라 다른 원로들에게 상당한 부분을 양보해야했다. 만약 여기서 더 나간다면 그의 파벌마저 등을 돌리리라. 원로의 친구가 마지막으로 조언하고 떠났다.

"그래봤자 한낱 계집일 뿐이야. 마탑의 원로가 모험가 출신 마법사에게 매달리는 것도 추하다. 적당히 하고 손을 떼게."

그의 말에 인상을 쓰던 원로가 마침내 묘안을 떠올렸다.

"이번에 왕국군으로부터 지원 요청이 들어왔지. 그곳에 베론을 보내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그 정도야 괜찮겠지.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일세. 이 이상 집착하면 더 이상 도와주지 않을거야."

"알겠네, 알겠어. 그냥 끝내는건 뭔가 아쉬우니까 마지막으로 고생 좀 시키고 끝내지."

원로는 허탈하게 자리에 앉으며 친구를 내보냈다.

승급 시험으로부터 며칠 뒤. 베론은 꽤나 황당한 지시를 받게 됐다. 이리나와 앨리샤가 마탑의 공문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스승님께서 전쟁터에 나가시게 됐다고요?"

"왕국군에게서 협조 요청이 들어왔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내가 그쪽으로 파견되게 됐다."

물론 전쟁터라고 해도, 8등급 마법사를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을 것이다. 왕국군에게 있어 그는 너무도 귀중한 전략병기다. 그가 의뢰받은 것은 어느 왕족의 호위였다.

"왕가의 자제가 전공을 위해서 출전한다고 한다. 이 정도 되는 의뢰면 겉치레로라도 고등급 마법사를 보낼 수 밖에 없지. 우리 마탑은 명색이 왕국 소속이니까."

그래서 선택받은 것이 이름만 8등급인 베론이다. 물론, 아무리 베론의 실력이 형편없다고 해도 호위 임무 정도는 무리 없이 수행할 수 있으리라. 그는 벌벌 떠는 두 제자를 안심시켰다.

"그냥 산책을 다녀온다고 생각하면 된다. 왕국 측에서는 나를 위해서 마차까지 보내기로 했으니까."

"저, 저희도 따라갈 수 있는건가요?

"그래야겠지."

이리나와 앨리샤를 마탑에 남겨두기에는 원로의 음모가 두렵다. 두 여자를 데려가면 전쟁터에서도 몸이 식을 염려는 없겠지. 베론은 그녀들의 동행을 기꺼이 허락했다.

베론과 제자, 그리고 노예는 다음날 아침이 되자마자 마차를 타고 전쟁터로 향했다. 왕국군의 병사들 중 일부가 그들의 호위를 위하여 마차에 따라붙었다. 덕분에 베론은 누가 누구를 호위하는 것인지 조금 헷갈리게 됐다.

간만에 모험가 처럼 차려입은 이리나와 시녀처럼 차려입은 앨리샤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병사들의 시선을 한 눈에 받게 됐다. 그러나 베론이 염려했던 시선강간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기운 없는 병사들은 아리따운 여성들을 보자마자 왠지 모르게 살짝 움츠러든다.

'... 여기 분위기가 왜 이러지?'

이리나와 앨리샤 같은 미인들을 보게되면 다 죽어가던 고추라도 세워야 정상이다. 전쟁터에 내몰린 병사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당장 베론만 해도 군대에 있을때는 연예인들이 그리도 예뻐보였다.

떨떠름하게 주둔지를 걷던 베론은 머지않아 왕족의 천막에 도달했다. 다른 병사들의 것과 달리 성의가 가득한 고급 천막의 안쪽에는 늘씬한 몸매에 탐스러운 금발을 가진 여성이 있었다. 베론을 모시던 병사와 하인들이 그녀를 소개한다.

"알레시타의 왕족, 영광스런 국왕 폐하의 3번째 따님이신 헤시아님입니다."

"뵈, 뵙게되어 영광입니다."

베론은 살짝 당황하면서도 예법대로 인사를 건넸다. 설마 왕자도 아니고 공주가 전쟁터에 직접 출전할 줄이야. 헤시아는 베론의 외모를 보고 살짝 질겁했다.

"해시아 알레시타다. 귀공은 내 호위를 위해서 먼 길을 왔다고 했지. 힘을 쓸 때가 되면 말해줄테니 뒤쪽에서 편히 쉬고 있으라."

마탑의 8등급 마법사를 맞이한다고 보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최소한의 예의 정도만 갖춘 대답이었다. 그러나 베론은 그것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껄끄러워 한다면 오히려 좋다. 그도 딱히 이곳에서 열심히 일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헤시아는 몸에 딱 달라붙는 옷을 입은 채 작전 회의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천막 안에는 갑옷은 물론이고 투구조차 보이지 않는다. 발달된 마법 기술을 보유한 알레시타 왕국의 왕족인 만큼, 갑옷을 걸치기 보다는 보호 주문이 새겨진 마법도구를 사용하는 것을 선호했다.

베론은 테이블의 말석에 앉아서 조용히 작전회의를 지켜봤다. 헤시아를 보조하는 것은 제법 노련한 장군이었으나... 그는 제대로 의견을 개진하지 못했다.

"헤시아 공주 전하, 여기서는 측면의 부대부터 먼저 전진시켜서 중앙의 병력을 고립시켜야..."

"겁쟁이 같은 소리 하지 마라! 장군과 내가 모범을 보이지 않는다면 병사들이 어떻게 따르겠는가! 여기선 나와 기병들이 나서서 기세를 꺾어야한다. 보병들은 나의 뒤처리나 시켜라."

궁전에서 다과회나 열 것 같은 외모와 달리 깐깐한 목소리였다. 전략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베론이 보기에도, 그녀의 작전은 무리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헤시아는 저렇게 생각없이 돌격해도 된다. 그녀의 몸에는 값비싼 마법도구들이 줄줄이 걸려있으니까. 그녀는 중세시대의 탱크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녀의 뒷처리를 하는 장군이나 병사들은 정말 죽을 말일 것이다.

명색이 공주라는 작자가 적진 한가운데로 혼자서 돌격하게 놔둘 수 있겠는가? 그녀를 따르는 병사들은 무리하게 적진 속으로 파고들 것이고,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베론은 그제서야 병사들의 시선이 이상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공주한테 정말 많이 시달렸구나. 그래서 여자들을 보는 시선이 띠꺼웠던거야.'

헤시아의 기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무리한 작전을 밀어붙인 그녀는 주둔지를 정찰하다가 휴식을 취하던 병사 하나를 대뜸 베어넘겼다.

"옷차림이 엉망이군. 그러고도 영광스런 왕국의 병사인가!"

"전하! 이 병사는 부상병이고,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는데 어찌하여..."

그녀를 뒤따르던 장군이 경악하여 쓰러진 병사를 살폈다. 그러나 헤시아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왕국군으로서 부끄러운 짓을 한다면 베여 죽여도 할 말이 없는게 당연하지 않은가. 이 부대의 지휘관은 이몸이니, 나의 명예를 더럽힌 죄는 무겁다!"

'이거 완전 미친년인데?'

베론과 앨리샤, 그리고 이리나는 그런 뜻을 담은 시선을 주고받았다.

사랑스러운 제자와 헌신적인 노예까지 끼고있는지라, 주둔지에서의 생활은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그는 평소처럼 밤늦게까지 앨리샤와 이리나를 희롱하곤 했다. 이 동네에서 딱 하나 문제가 있다면 공주의 기행이다.

"베론 경! 지금 당장 놈들을 야습할테니... 아앗! 그게 무슨 꼴인가!"

밤늦게 그의 천막에 쳐들어온 헤시아가 알몸으로 엉켜있는 세 사람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다행히 베론의 지위가 지위인지라 병사들처럼 마구 베어넘기지는 못했다. 베론은 황급히 옷을 갖춰입곤 간언했다.

"저기, 저희쪽 병사들이 많이 지쳐있지 않겠습니까? 괜히 야습하다가 걸리면 저희가 쫓길 것 같은데... 이쪽이 야습을 시도한게 한두번도 아니고."

자고로 기습이란 상대가 대비하고 있지 않을 때에나 의미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헤시아는 어디서 이상한 것을 보고 들은 듯, 자꾸만 야습을 시도해서 아군과 적군을 동시에 괴롭혔다.

베론도 어지간하면 참고 넘어가려 했으나... 자기까지 동원되는 작전인지라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헤시아는 마탑 소속인 그에게 쓴 소리를 하진 못하고, 그저 길길이 날뛴다.

"왕국군의 장병들은 고작 이 정도로 지치지 않는다. 만약 그런 놈이 있다면 내가 직접 참수해주지!"

"아, 네..."

결국 그는 하는 수 없이 그녀를 따라서 나섰다. 그날 밤, 왕국군은 야습을 대비하고 있던 적군과 싸운 탓에 참패를 면하지 못했다. 낮이 되어서야 주둔지로 돌아온 베론이 이리나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천막으로 향하던 찰나. 돌연 장군의 천막에서 수상쩍은 목소리가 들렸다.

남에게 들킬 것을 걱정하듯 낮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그는 대뜸 마법을 사용하여 그것을 도청했다.

"장군님. 당장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적군이 아니라 저년이 우리를 다 죽일겁니다."

"맞습니다. 지금 병사들은 날마다 탈영이나 반란같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습니다. 만약 장군님이 아니셨다면 저희 군은 진작에 와해됐을겁니다."

비록 은밀한 회의라곤 하나, 그들은 공주에 대한 경칭조차 생략하고 욕설을 덧붙였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침중한 표정을 짓고있던 장군이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쉰다.

"그렇다고 우리가 저 년을 어떻게 하겠느냐. 정말로 뒤통수에 칼을 꽂아버릴 수도 없고... 유능한 적군보다 무능한 아군이 더욱 무섭다더니."

"...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안 그래도 헤시아가 아니꼬웠던 베론이 천막 안으로 불쑥 들어가서 조용한 반역자들에게 인사했다. 그들은 화들짝 놀라며 칼을 뽑으려 했으나, 장군이 가까스로 그것을 막는다.

"멍청한 놈들! 가만히 있어라. 지금 베론님이 손가락만 튕겨도 우린 다 죽는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헤시아 공주가 정말 싫거든요. 저렇게 까다로운 호위대상은 처음입니다."

베론이 자신을 낮잡아보던 그녀를 떠올리며 씩씩대자, 참모들이 대뜸 호의적인 시선을 보냈다. 원래 사람은 같은 대상을 물어뜯으면서 친해지는 법이다. 장군이 살짝 걱정스레 묻는다.

"혹시 마법사님께서는 좋은 방법을 가지고 계십니까?"

"물론입니다. 효과적이고, 속 시원할 뿐만 아니라 뒷탈도 없지요. 헤시아 공주님에게는 잊지 못할 트라우마를 선물해드려야겠습니다. 그러면 이 지긋지긋한 기행도 조금은 자제하겠죠."

음흉한 미소를 지어보인 베론이 자신의 속내를 한껏 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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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라, 내안의 한남충이여!

표지의 캐릭터는 독자님들이 원하는 그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 속의 상자를 열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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