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나라에서조차 보호를 받아야 할 정도로 중요도가 높은 인물이라는 건 그만큼 중압감이 엄청나다는 거다.
솜사탕 하나를 말하며 눈을 반짝이고 어렸을 때 이후로 먹지 못했다는 말을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리리엘."
"네!"
"성녀의 생활에 만족하십니까?"
"네?"
무의식적으로 나온 물음에 리리엘은 의도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날 바라봤다.
해맑게 웃고 있는 입과는 다르게 눈동자에선 수많은 질문과 답이 오가는 게 보인다.
책임감과 그에 따라오는 보람 그리고 여태 해왔던 일상과 중압감 등등.
몇 초 사이에 리리엘은 정말 수많은 걸 되돌아본 거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전 성녀였고, 성녀고 앞으로도 성녀일 거랍니다."
하하 호호 아이들이 뛰어노는 거리에서 소곤소곤 리리엘이 속삭인다.
그건 장난스럽고 부드럽게 말하는 것보단 어떤 엄숙한 선언과도 같아서 잠자코 듣게 만드는 힘이 섞여 있었다.
'생각보다 강한 사람이구나.'
중압감과 압박감 속에서도 그녀는 늘 이런 생각해왔겠지.
그렇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진 질문에 이런 각오를 내포하고 말할 수 있었을 거다.
수도 없이 스스로에게 되물으며 갈팡질팡 하던 시절을 이겨 낸 모습이었다.
"가끔 리리엘이시고 싶을 때 제가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 함께 하겠습니다."
"그럼 매일이면요?"
"매일 함께 해야죠."
"바람둥이는 한 여자랑 매일 함께 할 시각은 없다던데."
뭔가 좋은 분위기로 가는 듯하다가 갑자기 옆 차선에서 트럭이 끼어든 듯한 대답이 날아왔다.
꽁냥꽁냥이라던가 알콩달콩이라던가 그런 류의 단어들이 어울릴 법한 대화였는데.
달달구리함에 숨겨진 아주 매운 핫 소스 한 방울이 허를 찌르고 들어왔다.
"성녀님도 매일 리리엘이실 시각은 없으실 테니까요."
"엄청 능글 맞네요, 자주 듣죠?"
"그럼요."
"진짜 능글 맞아."
리리엘은 그 말을 내뱉곤 푸스스 웃으며 자연스레 내 손을 잡았다.
아니, 자연스럽진 않았다.
푸스스 웃는 것까진 자연스러웠지만 스킨쉽을 하는 부분에선 무슨 나무토막 인형을 보는 것 같았다.
관절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서 두둑 두둑 거리며 다가오는 새하얀 손.
난 그걸 덥썩 잡으며 빠져나가지 못하게 깍지로 단단히 자물쇠를 채웠다.
"근데 진짜 그때 김민수였어요?"
"네. 근데 뭐 큰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여차하면 제가 있으니까요."
"알죠, 성녀를 지키는 게 용사의 역할인 걸요. 둘은 그렇게 한 쌍이구요."
손을 잡고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길거리를 걷는 것.
정말 데이트다운 광경에 나 스스로 이런 데이트를 한 게 얼마 만인지 되물을 정도였다.
맨날 좀 걷다가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모텔에 들어가 떡을 치길 몇십년.
백태양 몸에 들어와서도 거의 비슷한 장면들의 반복이었으니 참 인생 19금이다 싶었다.
'최근에 제대로 했던 데이트는 그나마 멜라니랑 해변가에서 놀았던 건가.'
나 잡아봐라 같은 건 못 했지만 굉장히 풋풋한 첫사랑 향기를 풀풀 풍겼으니 19금으로 범벅 됐다곤 볼 수 없었다.
앞으로 이런 식으로 아기자기한 데이트를 이어 나갈 것을 다짐하며 마저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꼬르르르르르르륵.
누군가의 뱃고래가 크게 울렸다.
만화 연출 소리로나 나올 법한 소리.
나만 들은 게 아니었는지 근처에 지나가던 꼬마 아이가 고개를 돌려서 우리 쪽을 쳐다볼 정도였다.
"저 보지 마요."
"..."
리리엘은 자신이 뭘 했는지 즉시 깨닫고 내가 뭐라 입을 열기 전에 바로 대처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배려라고 생각하며 내뱉는 그 어떤 단어조차 위로되지 못 하니까 정말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요."
그냥 묵묵하게 걸어 줘요 제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점으로 갈 테니까.
리리엘은 얼굴이 발갛게 익은 상태로 내가 정말 아무 말도 내뱉지 못하게 계속 말을 이어갔다.
"배고프면 그럴 수 있다, 나도 그랬다, 생리적인 현상이니까 너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뭐 이런 거 다 알아요, 다 아니까 제발."
"..."
라이트 노벨에서나 일어날 법한 상황을 직접 겪어서 그런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이거 나쁘지 않구나.'
이래서 히로인 속성 중에 백치미 같은 게 있는 거고 순수니 천연이니 하며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거구나.
새로운 속성에 눈을 뜬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히며 리리엘의 말대로 묵묵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풋풋한 청춘이었다.
++++++++++
"...없다구요?"
"그렇습니다. 성검은 그게 끝입니다."
아카벨름 안.
그곳엔 페르쿠스와 김민수가 서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페르쿠스는 아카벨름 안으로 들어온 김민수를 보자마자 극진히 환영하며 귀빈실이 아닌 일반 접객실로 그를 안내했다.
아카벨름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예배실이자 주요 인사와 대화를 나누는 만남 장소 같은 곳이기도 했다.
일반인도 교황을 만날 수 있는 장소.
물론 예약을 하거나 절차를 거쳐야 했지만 김민수는 그런 부분에선 프리패스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귀빈이라고 보긴 어렵지.'
골칫덩어리 원숭이 정도.
페르쿠스는 속으로 김민수에게 가장 적합한 평가를 내리며 말을 이었다.
"그때 용사님, 그러니까 백태양님께서 뽑으신 성검이 최초이자 최후의 성검입니다."
"아니 그럼 루베니아엔 원래 성검이 한 자루 밖에 없다는 말씀입니까? 뭔가, 뭔가 꿍쳐 놓은 게 있..."
"꿍치다뇨, 하하 김민수 생도께서 말씀이 좀 많이 천박하신 것 같습니다."
페르쿠스는 온화한 이미지로 알려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각성자에 대한 체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시절.
어린 리리엘을 데리고 나라를 건국할 만큼 뛰어난 언변과 카리스마를 가진 그는 사람을 다룰 줄 알았다.
무례한 자에겐 무례하게.
자신이 절대로 위라고 생각이 들지 못하게 권위로 찍어눌러야 가장 효과적이란 걸 페르쿠스는 알고 있었다.
때문에 김민수는 자기 의견을 제대로 피력할 수 없었다.
'...많이 까다로우신 분이네.'
강약약강의 정석으로 살아왔던 김민수에게 페르쿠스는 너무 어려운 존재였다.
용사라고 불렸던 시절에는 페르쿠스가 살살 기었겠지만 지금은 완전 형세가 뒤바뀌었기에.
김민수는 이 변화에 쉽사리 적응을 하지 못하는 거였다.
김민수는 자기한테 잘해주던 사람이 갑자기 돌변을 했을 때.
자기 잘못을 찾지도 않고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그럼 그다음으로 뛰어난 검이라도..."
"왜 제가 그걸 김민수 생도한테 줘야하는지 이유를 모르겠군요."
"그건 제가 옛 용사이자 조금 있으면 용사의 칭호를 다시 가져올 자이기 때문입니다."
김민수는 이 순간만큼 아주 확신에 차서 각오가 담긴 문장을 완성시켰지만 페르쿠스에겐 통하지 않았다.
'잠깐, 그럼 이 자식도 리리엘을 노린다는 건가?'
심지어 얘는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안 봤잖아.
근데도 이런 식으로 나온다고?
페르쿠스는 상상 속에 저울을 만들고 양쪽에 백태양과 김민수를 올렸다.
잠깐의 고민.
저울추는 순식간에 한쪽으로 기울었고 결론은 나왔다.
"그런 개소리는 제발 다른 곳에서 해주시길 바랍니다."
김민수보단 백태양이 백 배 나았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백태양의 평가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김민수는 페르쿠스의 직설적인 말을 듣자마자 당황했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교황의 입에서 나온 개소리라는 말이 자기한테 향했다는 걸 이해하자마자 김민수는 지금, 이 상황이 자신한테 얼마나 불리한지 자각했다.
이제 막 출소를 한 빅토리 아카데미 1학년생.
그게 자신을 나타내는 현 지표였다.
'나 너무 불리하잖아.'
용사라는 것도 성검을 뽑기 이전의 이야기였고 그 이후 활약한 거라곤 모두 백태양의 그늘에 덮어진 상태.
자신이 한 때 빛나는 유망주라고 말을 들었던 것도 증명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있을 때였지, 지금이 아니었다.
현재는 그저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 빅토리 아카데미 생에 불과하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거다.
'성녀와 성검을 제대로 요구할 수 없다고?'
이건 말도 안 돼.
김민수는 상황이 왜 여기까지 흘러 갔나에 대해 의심을 했고 바로 백태양 탓했다.
놈만 아니었다면, 그놈이 방해를 하지만 않았다면.
문제는 그런 식으로 핑계를 대며 상황을 질질 끌기엔 모든 분위기가 김민수에게 긍정적으로 흘러가지 않았다는 거다.
"하실 말씀이 다 끝났다면 이만 가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명백한 축객령.
페르쿠스는 수없이 많은 폭력적인 수단과 강한 훈계를 떠올렸지만 인력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강했다.
행복하게 오래 사는 법은 바보와 대화하지 않는 거라 했던가.
'차라리 백태양이 선녀 같군.'
페르쿠스는 계속 이런 상태로 김민수를 상대했다간 백태양에 대한 신뢰가 무한정으로 올라갈 것을 걱정했다.
입을 열 때마다 이미지를 깎아 먹는 김민수와 대외적인 여자 문제만 있을 뿐 아무 문제가 없는 백태양.
이 둘의 매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갖다 놔도, 백태양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을 데려와도 승패는 결정되어 있었다.
"가세요, 그리고 돌아오지 마세요."
한번 말한 거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페르쿠스는 강하게 나가라고 경고했고 김민수는 분위기에 압도 돼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압도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김민수는 더 이상 이 자리에 있을 명분이 없었다.
여기까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도 페르쿠스가 옛정을 생각해 배려를 해줬을 뿐.
김민수가 어떤 중요한 위치에 있다거나 조심스럽게 대해야 할 대상이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사람 좋은 페르쿠스가 하는 일종의 어떤 배려라고 해야 할까.
"예... 알겠습니다. 대화 감사합니다."
김민수가 아무리 눈치가 없고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한다고는 하지만 지금 분위기를 못 읽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 성검은 어디서 구하지.'
지금 당장 백태양에게 뺏는 건 무리가 있고 성녀에게 달려가 봤자 어차피 의미가 없을 터.
그렇다고 성검을 포기할 수도 없는 게 자신은 지금 검이 총 세 자루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인간에게서 하나, 마족에게서 하나.
마지막으로 성스러운 그런 류의 느낌이 하나 더 있다면 좋을 텐데.
'훔쳐야 하나?'
그것도 말이 쉽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민수는 일단 자리에서 벗어나면서 머리로 수많은 계획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