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쿠스는 지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이상하군.'
분명히 이런 상황이 오면 두 팔 벌려 환영하고 리리엘을 데려가 줄 남자에게 축복을 내려주고 그랬을 텐데.
막상 그런 일이 찾아오니 미간 주름은 펴질 생각을 하질 않았으며 입꼬리 또한 올라오질 않았다.
"페르쿠스! 페르쿠스는 연애 해봤을 거 아니예요, 보통 남자들은 주말에 뭘 하면 좋아하나요?"
"저는 너무 예전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난다고 해도 요즘이랑은 많이 다를 게 분명하구요."
데이트를 할 생각에 체면도 잊고 귀빈실 안에서 방방 뛰는 리리엘을 보는 페르쿠스는 눈을 호랑이처럼 날카롭게 뜨고 있었다.
'백태양...'
품행단정이라는 단어와 거리는 멀지만 모순적이게도 용사라는 호칭에 아주 적합한 인물.
악에 맞서며 인품도 좋고 기부도 많이 하는 편이며 특히 강태민을 밑에 두고 고아원 설립 등 공익을 위해 많은 투자를 아끼지 않는 선행을 베푸는 중이었다.
장점을 나열하자면 끝도 없었으며 가장 놀라운 점은 아직 1학년 생도란 점과 지금도 계속 성장 중이라는 부분이었다.
지금도 빛이 나는데 장래가 유망하기까지 한 혜성 같은 존재이자 우량주.
그게 바로 백태양이었다.
포털 사이트 같은 곳에서 검색을 하거나 동영상 플랫폼을 조금만 뒤적거려도 그를 찬양하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으며, 남편감 1위라는 글도 종종 올라올 정도였다.
최영남 회장과 강태민이 서포트를 적극적으로 해줬기에 잠잠한 거지, 아마 백태양이 뒷배가 없었다면 매일매일 시끄러운 날이 펼쳐졌을 거다.
아이돌 해 봐라, 배우 해 봐라, 누구랑 같이 뭐 해 달라 등등.
끊임없는 구애를 받았을 게 분명한 삶.
어떤 관점에서 보면 성녀보다 더더욱 유명한 게 바로 그였다.
'근데 마음에 안 들어.'
그런 장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있는 단 하나의 단점.
치명적이고 악랄하기까지 하며 남자에게 몰매를 맞을 수도 있는 부분.
'여성 편력.'
문어 다리의 끝판왕.
공식적으로 알려진 여자 친구만 해도 벌써 셋이 넘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성녀와 데이트를 한다? 이건 너무 목적이 뻔했다.
'성녀님도 여자 친구로 삼으려는 건가!'
문제는 리리엘도 백태양의 저런 점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좋아 죽는다는 거였다.
당사자들끼리 서로 좋아하고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건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이건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서 강하게 들었다.
"근데 정말 데이트를 하셔야겠습니까?"
"그럼요! 제가 이 순간을 얼마나 바라고 있는데요! 페르쿠스도 빨리 축하해주세요!"
"예 뭐... 경사드립니다."
"더 진심을 담아서요!"
"축...축하합니다...축하합니다..."
페르쿠스는 영혼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하며 이 데이트를 취소할 계획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분명히 이 데이트로 성녀님은 백태양한테 홀딱 빠질 게 분명하다.'
여러 여자와 동시에 사귀면서 여태 불화설 하나 나지 않은걸 보면 백태양은 연애의 신이 분명했다.
그것도 공인으로 알려진 여자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 이건 확실히 그가 재능이 있다는 증거였다.
실질적인 예로 소유민과 멜라니는 라이벌 그룹이고 사이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백태양은 그 둘과 사귀고 있었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를 감당하는 그 포용력과 능력.
인정하긴 싫지만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부분이었다.
허나.
'그렇기에 더 인정할 수 없다.'
페르쿠스는 순애만을 바라보는 그런 유형의 인물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미 차려진 하렘에 자신이 곱게 키운 성녀가 쏙 들어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금이야 옥이야 키워둔 딸 같은 존재가 바람둥이 남자에게 시집을 가는걸 알면서도 막을 수 없는 심정!
똑똑똑.
"백태양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바로 그런 상황에서 신은 페르쿠스를 시험이라도 하듯 백태양을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등장 시켰다.
"네 당...읍!"
리리엘은 백태양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문을 열려고 했으나 페르쿠스가 바로 움직여 그녀의 행동을 저지했다.
분명 리리엘을 이대로 냅뒀다간 자연스레 둘만 있는 분위기가 형성 되어 자리를 비켜줘야 할 터.
그렇게 되면 리리엘은 무조건 백태양한테 함락 될 운명에 처하는 거였다.
'무조건 막는다.'
아니 막을 수 없더라도 백태양이 어떤 인물인지는 정확히 파악하리라.
딸을 가진 아버지의 마음을 장착한 페르쿠스는 신념을 가진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성녀님, 남자는 남자가 봐야 하는 법. 데이트를 막을 순 없겠지만 제가 먼저 용사님과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눠보겠습니다."
"예?"
"그러니까 제가 먼저 그가 성녀님에게 알맞은 인물인지 간단한 테스트를 몇 번 해 보겠습니다. 성녀님은 이런 부분에 문외한이시지 않습니까."
"어..."
리리엘은 평소와 다른 페르쿠스의 태도에 당황했고 너무 당찬 기세를 보이는 탓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평소엔 늘 져 주기만 했던 사람이 이런 자세로 나오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 거였다.
"성녀님은 잠시 뒷문을 통해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제가 감히 용사님을 시험해 보겠나이다."
"네...알겠어요."
리리엘은 영문 모를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천히 뒷문으로 향했고 페르쿠스는 굳은 얼굴로 문을 천천히 열었다.
"지금 성녀님은 안 계십니다. 그래도 잠시 할 말도 있고 하니 들어와주시겠습니까?"
"예...? 아... 넵..."
백태양 또한 보기 드문 페르쿠스의 기세에 움츠려들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본격적인 사위 검사 시간의 시작이었다.
페르쿠스의 제안을 받고 자리에 앉았을 때.
그는 이미 굉장히 진중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엔 무슨 이야기하려고 하나 싶었으나 이내 리리엘의 기척이 인근에서 느껴지자 난 바로 감을 잡았다.
'이런 거 되게 오랜만이네.'
오랜만이라는 표현보단 두 번째라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이런 자리를 접할 기회가 아주 적었다.
지구에선 애초에 부담스러운 마음 반 어차피 헤어질 거라 만날 생각도 없는 마음 반으로 여자 친구의 부모님을 아예 만나지 않았었고.
여기선 유민혁을 제외하면 여자 친구들의 부모님을 만날 기회가 아예 없었다.
만약 여자 친구 중 아무나 부모님과 만남 자리를 가지자고 말한다면 난 아마 흔쾌히 승낙했을 거다.
이곳은 이제 내가 앞으로 쭉 살 세계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자세였다.
'근데 뭐라고 불러야 되지.'
용사와 성녀 관계가 아닌 백태양과 리리엘로서 만남을 이어가기 위해 페르쿠스와 대화할 때.
그를 교황님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버님이라고 불러야 할지 굉장히 애매했다.
아버님이라고 하기엔 직접 낳은 것도 아니고 리리엘이 딱히 교황을 사석에서 그렇게 부르지도 않았으니 과하다 싶었고.
그렇다고 아예 딱딱하게 교황님이라고 부르자니 너무 페르쿠스를 제 3자로 밀어내는 것 같았다.
그는 충분히 이런 자리에서 독대를 할 자격이 있는 존재이며 리리엘의 큰 정신적 지주인 만큼 그에 걸맞은 예우가 필요했다.
"편하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떻게 부르셔도 그 마음은 변치 않을 테니까요."
확실히 교황 정도 되는 자리에 오면 사람 마음을 정확히 이해하는구나.
속으로 감탄하며 딱딱한 자리가 아니라고 알려주는 푸근한 미소에 그대로 화답했다.
"그렇게 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역시 아버…'
"크흠, 큼, 쿨럭, 쿠헥, 큼... 아, 제가 목에 사래가 걸려서 죄송합니다."
푸근하긴 개뿔.
아버님이라는 말을 내뱉자마자 바뀌는 분위기에 난 바로 늘어졌던 입꼬리를 주워 담았다.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이며 내가 무슨 자세로 임하고 있다는 게 다 까발려진 순간 페르쿠스는 태도를 싹 바꿨다.
아무래도 아버님이란 호칭을 듣기 전까진 교황 상태였고 들은 후엔 아버님 모드가 되는 시스템으로 파악 됐다.
'한 번 불렀으니 다시 교황님이라고 하기도 뭐 하네.'
여기서 호칭을 바꾼다면 줏대가 없다고 생각이 되거나 한발 물러서는 남자라는 인상을 줄 수 있었기 때문에.
믿음직한 남자란 인상을 팍팍 주기 위해선 한 번 내뱉은 말을 끝까지 고수하는 게 정답이었다.
"..."
페르쿠스의 죄송하다는 말을 끝으로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차라리 아무 말이나 하고 대화가 끊겼다면 좋았겠지만 두서에 바로 짤려서 뭐라 말을 할지 생각이 쉽사리 나지 않았다.
'다짜고짜 딸을 달라고 해야 하나.'
근데 또 딸은 아니잖아.
성녀를 달라고 하기엔 성녀는 누군가의 소유는 또 아니고 페르쿠스도 리리엘의 양육권 같은걸 주장하기 어려울 터.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그렇다고 계속 침묵을 지키며 눈치 싸움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일단 간단한 주제로 분위기를 환기하기로 했다.
이런 식으로 말을 꺼냄으로 가벼운 토크하면 뭔가 해답이 보이지 않을까.
"잘 지내긴 했습니다. 근데 최근 용사님의 기사를 보니 뭔가 또 다른 혼란이 야기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 최근엔 좀..."
아 예 그러시군요.
라고 할 뻔한 걸 간신히 목에 주워 담으며 얼굴색이 바뀌지 않도록 유지했다.
표정은 늘 해맑은 미소와 사람 좋게 보이는 인상을 지속시켜 모르쇠로 일관해야 했다.
오히려 그 부분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거나 찔린 기색을 보인 순간 그대로 끝.
무조건 떳떳한 자세로 있어야 했다.
'난 바람도 아니고 모두 동의 하에 만나며 다 책임질 수 있는데?'라는 느낌을 보여주는 게 중요했다.
쓰레기지만 아주 철두철미하고 애프터 서비스 케어가 확실한 쓰레기.
그런 이미지를 구축해야 했다.
'이왕이면 쓰레기가 아니라 좀 뭔가 듬직한 남자 같은 인상을 주고 싶었는데 말이지.'
그건 페르쿠스의 표정을 봤을 때 불가능해 보였다.
지금만 해도 꿈틀거리는 미간을 진정 시키려는 게 보이는 마당에 듬직한 남자는 무슨.
갑자기 소금이나 물 같은걸 뿌렸을 때 피해야 하나 맞아야 되나를 고민해야 될 팔자다.
"근데 그... 용사님은 연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애요? 어... 남녀 간의 사랑...이죠?"
"그럼 그 남녀 간의 사랑이 여러 개가 동시에 진행 된다면 어떨까요."
"..."
이 양반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진행할 생각이 눈곱 만큼도 없구나.
얼굴만 웃고 있을 뿐 말 하나하나에 압정을 아예 콱콱 박아서 쏘고 있었다.
'너무 적대적인데?'
차라리 첫날 밤을 보냈으면 모를까.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점에서 이 정도 적대감은 나도 예상치 못 했다.
나와 만나게 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두 알고 있는 건가?
'부정은 못 하겠지만.'
그것만 하려고 만나는 것도 아니었으니 억울한 감이 좀 없지 않아 있었다.
섹스만 하는 게 아니라 섹스'도' 하려고 만나는 게 핵심이었는데.
아버지의 마음은 그걸 받아들이는 방식이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어 뭐... 다 잘 진행하면 되지 않을까요?"
"전부 다 행복하게 만드실 수 있다고 하시는 겁니까? 정말로요? 모두와 결혼하는 그런... 이상적인 결말이 존재할 거로 생각 하시나요?"
"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