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9화 〉 육체의 재구성
* * *
"...여긴 어디야."
분명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까진 기억하는데.
눈을 떠보니 주변이 온통 하얗게 뒤덮인 공간에 누워 있었다.
하얀 눈이 온 세상을 뒤덮은 듯한 공간.
내가 처음에 안뚱땡을 만난 장소와 비슷했다.
"춘향아, 메르피."
소환수들을 불러봤으나 묵묵부답.
혹시나 해서 메인 스킬을 발동시켜보거나 다른 스킬을 사용해봤지만 반응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몸에 특별한 이상이 생기거나 한 건 아닌 걸로 봐선 어떤 술수에 당한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냥 정말 설명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해야 하나.
'뭐야 이게.'
일단 가만히 있긴 뭐 하니 몸을 움직였다.
저벅저벅.
전후좌우 어딜 걸어도 하얗게 펼쳐진 공간.
정말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생각도 못 했네.'
백태양의 삶에 너무 적응해와서 그럴까.
이태옥 시절에 대한 기억이 정말 가물가물했다.
인간관계부터 시작해서 거기에서 뭘 했고 뭐가 어떻고 하는 등등.
이젠 어쩌면 정말 이태옥보단 백태양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 상태였다.
'괜히 자리가 이러니까 여러 생각이 들게 되네.'
만약 소설 주인공이었다면 지구에 남을 건지 소설 속에 남을 건지 생각하고 있었겠지.
뭐 따지고 보면 초반엔 정말 소설 속인 게 맞았으니 엄밀히 따지자면 느낌은 똑같았다.
'근데 싸질러둔 게 너무 많단 말이야.'
보통 영화에서도 이런 장면은 여태 소중히 쌓아왔던 인연이냐 아니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지구의 추억이냐를 따질텐데.
나 같은 경우는 이미 벌인 일이 너무 많아서 지구로 돌아간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 하나 보고 사는 사람이 너무 많아지기도 했고, 여기가 소설 속 세계가 아니란 것도 알게 되었으니.
어쩌면 백태양 삶이 더 나에게 어울리지 않나 싶기도 했다.
"생각 정리는 얼추 다 됐어?"
"...?"
그렇게 정처 없이 걷고 있을 때 뒤에서 불쑥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너무 자주 들었으며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목소리.
'내 목소리잖아.'
설마 뒤를 돌아보면 나랑 똑같이 생긴 애가 하나 나타나있는 건가.
'진짜 그런 뻔한 전개겠어.'
그런 마음을 품고 뒤를 돌아본 순간.
"허."
정말로 나와 똑같이 생긴 녀석이 날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어딜 봐도 나였다.
도플갱어가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그렇다면 여긴 던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생각하는지 대충 짐작 가는데, 그런 건 아냐. 그냥 마지막 작업을 위한 거지."
"마지막 작업?"
이런 상황에서 안뚱땡을 한 번 만났었기 때문일까.
당황스럽다거나 뭐부터 해야 할지 몰라서 어리둥절하거나 그런 건 없었다.
"그래, 원래는 위기의 순간에나 일어나야 할 법한 일인데... 네가 신위를 얻는 바람에 많이 앞당겨졌어."
"신위?"
그게 지금, 이 상황이랑 대체 무슨 관계인 거지.
섣불리 먼저 질문하거나 하진 않았다.
스킬 발동도 불가능하고 소환수도 꺼낼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방을 자극하는 건 옳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래, 신위. 뭐 그걸로 신이 되거나 할 순 없겠지만 넥타르는 좀 이야기가 달라지거든. 헤라의 젖도 먹었고 말이야."
"그래서?"
"육체의 재구성.. 이게 백태양의 육체만을 말하는 게 아니거든."
"뭐?"
육체의 재구성이 백태양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면 뭘 뜻하는 걸까.
'설마 나?'
이태옥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건가.
뜬금없이 그 이야기가 왜 나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는 육체와 혼이 따로 있는 상태였잖아. 정확히 말하자면 백태양의 육체에 이태옥의 혼이 들어간 거였지. 그리고 백태양의 삶을 살았고."
"...?"
당연한 말을 뭐 저렇게 장황하게 하고 있어.
놈은 1+2=3이라는 걸 굉장히 거창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근데 거기서 육체가 재구성 되면 어떨 것 같아?"
"그냥 무협지에서 나오는 환골탈태 같은 거 아냐?"
"조금 달라."
녀석은 점점 이야기가 결론에서 향하고 있다는 듯 진한 미소를 지었다.
"여태 내 육체로 활동하던 네가, 이제 정말 너만의 육체를 가지게 됐다는 거지.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을 보내기 위해 내가 이렇게 온 거고."
"..."
이게 무슨 급 전개야.
'아니지, 급 전개가 맞겠구나.'
세상이 아직 소설일 시절 날 여기에 끌고 온 건 안뚱땡이었다.
안뚱땡이 백태양 몸에 넣길 의도한 건 아닐 테지만 모든 건 놈으로부터 시작된 일.
시작부터가 엉망진창이었으니 당연히 과정이 이런 식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였다.
"급조된 캐릭터의 운명 같은 거지. 아마 이제부터 넌 조금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을 거야."
"아니 계속 이상한 말만 하고, 그게 무슨..."
"잘 있어."
놈은 그 말을 끝으로 가루가 되어 사라졌고 상황을 요약하기라도 하듯 메시지 창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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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혼연일체] 달성!
당신은 여태 남의 육체에 깃들어 있던 삶을 살아왔던 존재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 육체가 재구성 됨으로 당신의 혼에 딱 알맞게 변했습니다.
혼과 육체가 다르기에 일어났던 모든 불균형을 해소합니다.
이태옥의 삶과 백태양의 삶으로 인한 혼란을 더 이상 겪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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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웁!"
메시지를 보며 상황을 이해하려고 하는 순간 몸에서 구토감이 올라왔다.
참을 수 없는 감각에 입을 열고 토사물을 뱉어내자 타르 같은 것들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무협지에서 흔히 보는 노폐물 배출로 보이는 과정으로 보였으나 미세하게 다른 점이 두 가지 있었다.
'젠장...'
그건 바로 또 정신을 잃는 다는 점이었다.
꿈틀꿈틀.
그나마 다행인 건 저번처럼 눈을 떴을 때 완전히 다른 상황에 부닥치진 않았었다.
정신을 잃자마자 바로 복귀한 듯 쓰러져 있는 몸을 일으키자.
"일어났구나 이 쓰레기 같은 놈."
제우스로 보이는 놈이 번개를 들고 있었고.
"네가 만악의 근원이라고 들었다. 백태양."
토르가 망치를 들고 언제든지 내려찍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호구들이 알아서 찾아와줌에 감사하며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허둥지둥 거리다가 선문답 듣고 정신을 잃는 것보다.
그냥 이렇게 속 시원하게 애들을 패는 게 훨씬 편했다.
"빨리 끝내자."
신계를 정리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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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태양이 일어나기 몇 시간 전.
제우스와 토르 그리고 포세이돈은 아프로디테의 말을 듣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소리지?"
"아프로디테, 똑바로 말하라."
토르는 관계자가 아니니 제우스와 포세이돈이 앞장서 아프로디테에게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사랑의 신이기에 백태양과 헤라의 흔적을 알 수 있다는 말.
이건 아무리 좋게 해석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다면 제우스가 최초로 바람을 맞는 건가.'
맨날 바람 피던 놈도 바람을 맞는 상황이 오긴 하는군.
토르는 얌전히 이야기를 들으며 주변에 어디 씹을 게 없나 두리번거렸다.
아주 재미있는 상황이 펼쳐질 게 벌써 눈에 훤했다.
"헤라는 백태양과 아테나의 흔적을 느끼고 먼저 떠났어요. 혼자서 가겠다고 말하고서 말이죠. 근데 결과가 이런 식이라는 건... 무슨 뜻인지 더 말 안 해도 아시겠죠?"
"..."
"헤라가 바람을 폈다는 말이로구만!"
말없이 고개를 숙인 제우스와 정답을 맞춰 기뻐하는 포세이돈.
두 사람의 입장 차이는 내 일이냐 아니냐의 차이였다.
"분명 최면이다. 최면을 썼을 거야."
"아뇨, 그건 아닙니다. 헤라는 자기 의지로 갔어요."
제우스가 발악이라도 하듯 외부의 변수가 있음을 암시했지만 아프로디테는 그런 류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시켰다.
"신이 인간이 건 최면에 걸린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요. 그녀는 정말 자기 의지로 백태양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제우스는 아주 차분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내해라."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눈치 없이 제우스 뒤에서 박수를 치며 포세이돈은 한마디를 거들었다.
"불륜 현장에 급습하다니, 설레는군."
"..."
토르는 바람 당한 제우스와 눈치 없이 상처를 후벼 파는 포세이돈을 바라보며 속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인간에게 벌도 내리고 남의 가정사가 박살 나는 재미있는 장면도 보다니.
이게 일석이조가 아니라면 뭐가 일석이조란 말인가.
"분명 아테나 은신처에 있을 거예요."
"은신처 위치는 어떻게 알아낸 거지?"
"거기서 사랑의 흔적이 진하게 느껴지니까요. 평소에 느껴지지 않던 장소에서... 그것도 헤라의 사랑 기운은 누구보다 진하게 느껴지는걸요."
불륜을 아주 뜨겁게 진행하고 있다는 말과 다름없었지만 제우스는 차분하게 화를 가라앉혔다.
여기서 화를 내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무튼 아프로디테의 안내 끝에 제우스를 포함한 나머지는 모두 아테나의 은신처에 도착했고.
"..."
거기서 보고 싶지 않았던 장면을 목격 했다.
"주인님이 왜 안 깨어나는 걸까요?"
처녀신이라고 알려진 아테나가 알몸으로 외간 남자를 끌어안으며 몸을 따듯하게 해주는 장면과.
"일단 내가 젖을 먹여보마."
자기 아내가 망설임 없이 젖가슴을 꺼내 모유를 짜내며 백태양의 입에 흘러 들이는 광경이.
제우스의 눈에 들어온다.
"..."
또르륵.
눈물 한 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