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2화 〉 이건 나도 생각 못 했는데
* * *
끔벅끔벅.
"..."
백태양이 씻겠다고 나간 뒤 멜라니는 '근데 이제 뭘 해야 하지'라는 고민에 사로잡혔다.
전날까지 여러 플랫폼 사이트에서 연애 초기 커플 데이트 코스를 열심히 뒤적거려봤지만.
딱히 끌리는 게 하나도 없어서 아직 제대로 된 일정이 없었다.
그녀가 준비한 거라곤 여자 친구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외모와 데이트하겠다는 실행력이 전부였다.
사실 그 두 개만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다 했다고 볼 수 있었으나 멜라니는 부족함을 느꼈다.
'음... 아무래도 이제 일반적인 데이트는 못 하겠죠.'
원래도 유명한 빅토리 생도인데 그중에서 그곳을 대표하는 백태양과 카이반 그룹의 후계자 조합이라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인파가 몰릴 지 짐작조차 안 됐다.
그나마 다행인 건 파파라치 같은 경우는 충분한 압박을 넣음으로 딱히 따라붙지 않는다는 점이었으나.
평범한 데이트하기 위해선 변장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근데 그럼 화장 다 망가지잖아.'
변장의 기본은 마스크와 선글라스 그리고 모자가 대표적이었다.
그리고 그걸 전부 착용하는 순간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 준비한 의미가 다 사라진다는 거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변장하고 일반인처럼 데이트를 한다는 생각은 무조건 지양하는 게 옳았다.
'그럼 어디 으슥한 곳에서...'
보통 연예인들이 연애할 땐 차 안에서 하거나 집에서 한다던데.
근데 그렇게 너무 둘만 있는 장소에 있다 보면 막 그렇고 그런 짓하게 되는 걸로 가지 않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멜라니는 베개를 주먹으로 거세게 내려찍으며 발갛게 오른 얼굴을 진정시켰다.
물론 아예 안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절대로 하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야한 건 좀 더 나중에...'
너무 그렇게 노골적으로 둘만 있으면 그런 쪽을 막 원하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보일까 봐 걱정이었다.
한다고 해도 결국 저번처럼 체력 문제로 인해 바로 앞에 있는 파란 머리칼을 한 여자처럼 될 게 뻔했다.
저 여자도 분명 살을 섞다가 백태양의 체력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걸 텐데.
마음먹고 데이트하겠다고 나왔는데 결과가 저렇게 끝나는 건 원치 않았다.
'음, 아니지 오히려 저런 게 좀 의외라고 해야 할까.'
보통 백태양은 여자와 자면 꼭 옆에서 같이 자곤 했다.
방금 대화에서 딱 봐도 분명 자긴 한 것 같은데, 그런데도 다른 방에서 재웠다는 건 정말 뭔가 사정이 있긴 한 듯 보였다.
'뭐 근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곧 데이트하러 나갈 거라서 집 안에 누가 있든 상관없었다.
애초에 누가 있어도 별로 놀라지 않을 것 같은 곳이긴 했다.
이렇게 넓은 공간에 혼자 산다는 게 늘 믿어지지 않았다.
'근데 진짜 누가 청소해주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남자 혼자서 이렇게 깔끔히 살지.'
멜라니는 아직 춘향이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제대로 모르고 있었기에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백태양의 집은 펜트하우스를 벤치마킹해서 최대한 고급스러운 느낌을 살린 집이었다.
그만큼 구조가 여러 가지 있었고 청소할 때 신경 써야 할 곳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근데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백태양의 집은 정말 깔끔했다.
3층집 중에서 제대로 쓰는 공간이 1층 밖에 되지 않는 남자가 청소를 이렇게까지 하다니.
멜라니는 새삼 백태양과 결혼한 후의 미래를 꿈꿨을 때 그가 얼마나 가정적인 지를 상상했다.
"뭘 그렇게 웃어?"
"당신이랑 결..., 아니 뭔 인기척도 안 내고 들어와요?!"
"했는데, 네가 생각을 너무 깊게 한 거야."
백태양은 어느새 샤워를 다 끝냈는지 머리를 탈탈 털며 방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멜라니는 '결'까지 말한 거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목욕 가운 사이 대놓고 덜렁거리는 양물 때문에 다시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아니 씻고 나오면 보통 제대로 가려야 되는 거 아니예요?!"
"우리 사인데 뭐 어때."
우리 사이.
참 듣기 좋은 어감이었지만 백태양의 자지를 보고 나니 마냥 행복할 수만 없었다.
저게 또 뱃 속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아랫배가 묘하게 따듯해지면서도 모호한 감정이 피어났다.
이게 대체 무슨 감정인지, 갓 처녀를 벗어난 멜라니는 짐작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래서 어디 갈지 생각해봤어?"
없으면 내가 씻으면서 몇 개 생각해 둔 게 있는데, 어때?
데이트 하자고 다짜고짜 찾아왔음에도 샤워하면서 데이트 코스를 생각해 두는 철저함.
'...뭐지?'
그런 배려가 마냥 좋을 줄 알았던 멜라니는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나빠짐을 느꼈다.
입이 자연스레 앞으로 튀어나오고 볼은 복어처럼 빵빵해진다.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백태양은 장난기 가득한 웃음으로 볼을 콕 찔렀다.
"뭐야, 서운해?"
"네? 제가 왜 서운해요? 그럴 이유가 없는데?"
"근데 얼굴은 그런 표정인데?"
내가 지금 서운해한다고?
영문 모를 표정을 지은 멜라니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백태양은 말을 이어갔다.
"같이 생각하자 그럼."
멜라니는 아직 자기 감정을 제대로 알 수 없었기에.
일단 백태양의 말에 긍정했다.
이질적인 간질거림이 마음 한구석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
'너무 능숙하게 말해서 삐졌네.'
멜라니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사실 서운함을 느끼는 것보단 삐졌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었다.
과도하게 모든 걸 너무 당연하게 척척하는 남자 친구를 보고 '오 배려가 넘치네'라는 생각보단.
'얼마나 여자를 많이 만나 봤길래 이게 자연스럽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서 일어난 상황이었다.
첫연애, 첫 경험 이런 것들하면서 풋풋하고 서로 맞춰가는 형식으로 하고 싶은 마음과 달리.
모든 걸 다 익숙하게 말하는 남자 친구를 보고 '나만 풋풋한 거구나'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한결과였다.
'이걸 생각 못 했네.'
수진이나 유민이 같은 경우는 굉장히 자연스럽게 데이트를 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대처가 미흡했다.
분명 혜미랑 유이도 데이트를 할 일이 반드시 생길텐데, 이런 부분은 주의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뭐 따로 하고 싶은 거 있어?"
"...사실 제일 하고 싶은 건 평범한 데이트예요."
그나마 다행인 건 멜라니가 이런 부분으로 꽁했다고 입을 다무는 유형이 아니란 거였다.
자기감정을 무조건적으로 숨기는 타입이 아니었기에 원하는바를 바로 말해 줘서 좋았다.
'서운한 상태라는 것도 어느 정도 인정한 것 같고.'
이러면 기분을 빨리 풀어 줄 수 있었기에 곤란한 상황까진 가지 않을 것 같았다.
'평범한 데이트라.'
가장 이상적인 건 원더랜드를 한 번 더 가는 거였지만 거기서 능숙한 티를 내면 또 서운해할 게 분명했기에.
최대한 데이트코스를 겹치지 않는 선에서 머리를 굴렸다.
'백화점 데이트는 수진이랑 했고... 교내 데이트는 혜미랑 한 수준이지... 연구실에서 그렇게 했으니까... 그럼 음.'
하나씩 장소를 소거법으로 지워나가다가 문득 굉장히 평범하게 즐길 수 있는 게 하나 떠올랐다.
"그럼 보드 게임 카페 갈까?"
"보드 게임이요?"
"응 게임도 되게 많고, 서로 막 경쟁하거나 협력 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어때?"
"거기서 허벅지에 하는 틱택토 게임 같은 거 할 생각 아니죠?"
"아니지, 날 뭘로 보고."
"변태호색한색마요."
"..."
[이건 아무리 나으리를 사랑하는 저조차 부정할 수 없네요, 소녀를 매우 쳐주시와요.]
[맞는 말 아니더냐? 주인놈아, 인간화하자마자 바로 옷을 벗기고 날 개처럼 따먹은 걸 보면 변태호색한색마라는 표현이 주인놈에게 아주 딱 알맞은구나.]
이어지는 삼연타에 잠깐 어지러움을 느꼈다.
행동은 그렇게 해도 나름 배려를 한다고 했는데.
'내 인식이 그렇게 이미 박혔구나.'
멜라니가 말을 내뱉자마자 푸스스 웃자 나도 따라 웃으며 핸드폰을 들었다.
내가 처음부터 자신만만하게 데이트 코스를 대강 짜놨다고 한 덴 다 이유가 있었다.
뚜르르르르.
네 태양님.
"아 그 프라이빗 룸으로 해서 보드 게임 카페 하나 예약 부탁드릴려구요."
알겠습니다.
보금자리 백태양 전담팀에게 전화 한 통이면 모든 준비가 끝이 난다.
역시 지인 찬스 만한 게 없었다.
"앙...아앙...흐아아앙...!"
전담팀의 안내받아 보드 게임 카페 룸에 들어가자마자 사방에서 신음이 흘러나온다.
한 곳만 그러면 노크해서 뭐 하는 거냐고 항의라도 했겠지만 모든 룸에서 신음이 나왔다.
찌걱찌걱찌걱.
거짓말 탐지기 전기 충격을 맞고 신음을 흘리나라는 생각조차 먹히지 않을 정도로 들리는 둔탁한 소리.
딱 봐도 허벅지랑 둔부가 맞닿으며 씹물을 뽑아내고 있을 것으로 추정됐다.
"원래 보드 게임 카페에서 신음이 나오나요?"
"이건 나도 생각 못 했는데..."
생각해 보면 프라이빗 룸인 만큼 이용하는 게 우리뿐만 아닐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이런 식으로 일반인이 들어오지 못한다고 보드 게임 카페에서 대놓고 섹스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모든 룸에서 번식을 할 줄이야.
"...일단 들어갈까요?"
"어? 어어..."
멜라니는 뭐 어쩌겠냐는 표정으로 안내 된 방에 들어갔다.
'뭐 이리 순탄치가 않냐.'
일반 데이트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건지 난생처음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아앙...아앙...아앙...! 오빠앙...!"
아니 보드 게임 카페에서 대체 섹스를 왜 하냐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