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1화 〉 데이트 선포
* * *
이튿날 아침.
'근데 왜 처녀를 땄는데 처녀 폭격기가 발동하지 않은 거지?'
정신을 다잡고 업적 보상을 다시 확인할 때 든 생각이었다.
아테나는 분명 처녀였음에도 불구하고 관계 후 처녀 폭격 보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뭔가 아직 조건을 제대로 충족시키지 않았다는 건데.
'그걸 알려 줘야 할 거 아냐.'
원래도 불친절한 걸 알고 있긴 했지만, 이 정도로 아무 정보도 주지 않을 줄이야.
그나마 가능성 있는 이야기는 처녀를 따도 처녀신 자체의 가치를 훼손 시킨 게 아니라는 것 정도였다.
'올림푸스 처녀 신은 셋이니까 최소 과반수 이상은 넘겨야 되는 걸 수도 있어.'
신과 인간의 기준이 다르다고 본다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사실 충분히라는 부분은 그렇고, 그냥 상황에 억지로 생각을 끼워 맞추는 부분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지금 당장은 보상이 없었기에 그런 식으로 결론을 냈다.
'헤스티아랑 아르테미스 둘 중 하나는 더 따먹어야 된다는 거네.'
어차피 올림푸스 여신들을 다 함락 시키긴 해야 되지만.
뭔가 이런 식으로 말하니까 괜히 쓰레기가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찝찝했다.
엄연히 따지면 뺏는다기보단 지킨다고 보는 게 맞았다.
제우스가 먼저 그렇게 이빨을 보이지 않았다면 난 지금쯤 아주 평탄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순서도 이상해.'
섹스하는데 순번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리리엘 순번이 뒤로 쭉 밀리니 기분이 묘했다.
예전에 이런 식으로 한 명을 맨 뒤로 보내서 서러움이 폭발하기 직전까지 간 사건이 있었는데.
역시 역사는 반복되는 게 맞는 건가.
"지금 또 되게 무례한 생각하고 있죠?"
"어? 아니..? 뭐, 뭐야."
"여자 친구를 보자마자 하는 말이 그런 거 말곤 없나요?"
얘 어떻게 들어왔어.
멜라니는 굉장히 자연스럽게 내 침대 맞은 편 의자에 앉아 날 빤히 바로보고 있었다.
"...어떻게 들어왔어?"
"여자 친구 보자마자 하는 말이 그거 말곤 없냐구요."
"안녕 멜라니, 좋은 아침이야 보고 싶었어."
멜라니는 그 말을 듣자마자 마음에 들었는지 쑥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붙잡으며 새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 정도면 봐줄 만 하네요. 당신은 다 좋은데 남자 친구로서는 빵 점인 거 알아요?"
"에?"
아침 댓바람부터 갑자기 바가지를 긁힌다고?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어리버리는 까고 있을 무렵 멜라니가 손가락으로밖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내 맞은편에 있는 방을 콕 찝은 거였다.
'봤구나.'
이제 무슨 말이 나올 지 예상이 됐기에 난 일단 침대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죄인의 자세를 취했다.
"그새 또 여자가 생겼던데요? 급한 일 있다고 부리나케 나가더니 뭐 어디 헌팅이라도 하고 오셨나 봐요?"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어."
첫 경험의 아픔으로 인해 방에서 곤히 잠들고 있는 아테나까지 봤다면 방법은 단 하나.
'몸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원래 이럴 땐 손을 잡거나 껴안은 상태로 부둥부둥하며 대화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개수작 부릴 생각하지 말고 앉아요."
"응."
멜라니는 이런 것까지 다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차가운 눈짓으로 침대를 가리켰다.
난 일단 죄인의 입장인지라 얌전히 그녀의 말에 순순히 응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죠? 어딜 갔다 왔다하면 여자가 하나씩 늘어난다는 게 진짜 믿어지지가 않아요. 특히 저라는 여자 친구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니까 이게..."
"그 발정 난 하반신을 잘라야 이 일이 끝날까요?!"
"사정이 있어서..."
"대체 무슨 사정이길래 딱 봐도 이미 관계 다 나간 여자를 다른 방 침대에 눕히는 건데요?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방치하고서!"
또 핑계 한 번 대봐요 다 반박해 줄 테니까.
멜라니는 오늘 아주 날 잡았다는 표정으로 단단히 화가 난 듯 날 노려봤다.
"그 정도 했으면 이제 더 만들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성녀님까지가 마지노선인 게 정상 아니냐구요!"
"리리엘이랑은 아무 관계없어."
"벌써 이름까지 튼 사이였어요?"
"어 뭐야 이름 들려?"
안뚱땡이랑 안비실이 사라졌기에 이제 리리엘 이름이 들리게 된 건가?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발견해서 바로 리리엘한테 연락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멜라니는 내가 다른 생각하고 있다는 걸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내 볼을 꼬집었다.
꾸우우우욱.
"아파, 진짜 아파."
"진짜 이런 사람이 남자 친구라니 최악이예요!"
"그래도 최악일 것까진 없지 않나... 나 그래도 나름..."
"헛소리하지 말고 데이트 준비나 해요!"
찌릿.
내 변명을 단번에 틀어막은 멜라니는 다시 의자에 앉으며 날 쳐다 봤다.
근데 방금 뭐라고?
'데이트?'
지금? 이렇게 갑자기?
"빨리 준비해요!"
"어어, 응."
일요일이기도 했고 마침 당장 할 것도 없던 차라 난 곧바로 샤워실로 들어갔다.
'이 정도면 데이트 선언이 아니라 데이트 선포네.'
위풍당당하게 내뱉는 그녀의 모습이 다시 떠오르자 풋하고 웃음이 튀어나왔다.
결국 데이트하고 싶어서 아침 댓바람부터 나한테 찾아온 거구나.
진짜 깜찍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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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태양 집에 찾아가기 세 시간 전.
멜라니는 새벽부터 일어나 바쁘게 움직였다.
'분명 또 여자 만들러 간 거겠지.'
뭘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순 없었지만 분명 결과적으로 여자가 또 늘어날 것을 직감했다.
멜라니는 그게 목적이 아님을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화가 나는 건 도저히 어쩔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백태양은 용사였으며 티는 내지 않지만 이미 생도의 한계를 깨부순 존재였기에 바쁠 게 당연했다.
근데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그 바쁜 과정에서 항상 여자가 생겨난다는 거였다.
그를 좋아하기 전만 해도 별 상관없던 게, 바닷가 이후로 마음가짐이 완전히 바뀌었다.
'몇 명이 더 꼬일 지 몰라.'
백태양이 괘씸하면서도 안심이 되는 건 여자가 늘어나면서도 모든 걸 다 케어 해준다는 부분이었다.
연락도 꾸준히 되고,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찾아와서 연락하고 되도록 통화도 자주 하고.
영상 통화도 해주고, 바빠서 만나지 못할 뿐이지 남자 친구의 의무를 정말 완벽하게 다 했다.
사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그게 다 나한테 집중 되면 좋을 텐데.'
온리 원이 될 수 없단 걸 깨닫자마자 그녀는 넘버 원이 되고자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선점과 선수를 가장 빨리 치는 거였다.
'아침에 찾아가서 데이트하자고 하면 빠져나갈 수 없을 거야.'
애초에 급한 볼일이 있다면서 슝 하고 사라질 때 데이트 약속을 했던 터라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명분이 있다고 해도 거절할 남자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완벽한 상황을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멜라니는 완전 무장을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분명 아무 생각 없이 침대에 누워 있을 테니까 데이트 계획도 내가 짜야지.'
아마 백태양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치채고 있지도 못할 터.
이런 빈틈을 노리는 거야말로 사냥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저번에 디자이너들이 가져다준 옷 어디 있죠?"
"제가 미리 빼서 옷장 앞에 진열해놨습니다 아가씨."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집사 또한 멜라니의 모든 생각을 미리 간파하고 완전 무장 준비를 모두 끝낸 상태였다.
'아가씨가 드디어 일을 내시려 하시는군.'
바닷가에 가신 이후로 '백태양 당신!'에서 '남자 친구!'로 언성 높아지는 단어가 바뀐 걸 보면 관계가 진전 된 걸로 보이긴 했으나.
뭔가 결정적인 한 방이 부족하다고 내심 생각하던 차였다.
아가씨의 말마따나 백태양은 자의든 타의든 어쨌든 바람기가 있는 남자가 맞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백태양이 그것만 빼고 본다면 너무 이상적인 남자에 가까웠다는 거다.
매너 좋고, 인성 좋고, 소문 좋고, 평가 좋고, 쉼표가 몇 개나 있어도 부족할 정도의 미사여구와 수식어들.
인터넷에 기사가 날 때마다 '제발 꼬추는 작겠지'라는 댓글로 도배가 되는 존재.
그리고 그런 댓글조차 청바지를 입었을 때 보이는 구렁이 굴곡으로 인해 모든 논란이 잠재워진 존재.
심지어 몇몇 동영상 플랫폼에선 그의 사이즈를 두고 흑인 리뷰를 하는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그 정도 되는 남자니까 바람기가 있어도 멜라니가 좋아하는 거겠지만.
아무튼 확실한 한 방이 정말 절실한 건 변함없었다.
'도장을 먼저 찍어야 합니다, 아가씨.'
백날천날 정실이라고 떠들어 봤자 아무런 법적 증거가 되지 않는 냉혹한 현실.
그사이에 유일하게 빛을 볼 수 있는 건 오직 혼인 신고서 뿐이었다.
집사는 이 사실을 그대로 고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미 충분히 준비하고 선수를 치려는 그녀의 모습을 믿고 응원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저 그럼 다녀올게요!"
"차로 안 데려다드려도 되겠습니까?"
"그 인간 되게 감각이 예민해서 깰 거예요. 제가 몰래 들어가려면 혼자 가는 게 나요."
"그렇군요, 즐거운 데이트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멈칫.
멜라니는 나가기 직전 집사의 말에 몸이 굳었다.
'내가 말 했나?'
분명 그냥 디자이너 옷을 달라고 하는 거랑 일찍 가는 것 말곤 아무런 티도 안 냈을 텐데.
멜라니는 자신이 아침부터 시작한 야단법석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해졌다.
"데, 데이트 아니고... 그냥 뭐 줄 거 있어서 가는 거예요."
후다닥.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급하게 백태양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데이트 선포 직전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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