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6화 〉 끝과 시작
* * *
김민수가 의식을 잃자마자 그 몸을 잽싸게 차지한 안뚱땡.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짐작하긴 했지만 놈은 몸을 쓰는 쪽으론 영 젬병이었다.
"이...이익! 그만! 그만해!"
"이래서 김민수를 만들었구나, 네가 직접 처음부터 관여한 게 아니라."
안뚱땡을 패면서 이해하지 못 했던 부분들이 자연스럽게 하나씩 설명이 된다.
전개를 억지로라도 만들 수 있고, 히로인 설정까지 바꿔가면 주인공이 쉽게 성장할 수 있는 탄탄대로를 만들었으면서.
왜 굳이 직접 나서지 않고 김민수를 따로 만들어 자캐딸을 쳤는가.
'몸 쓸 자신이 없어서.'
멋진 육체를 만들고는 싶지만 직접 운동하기는 싫고, 활약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몸을 쓸 자신은 없다.
모든 히로인과 꽁냥거리는 건 좋지만 주인공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싫다는 일념으로 김민수를 만들어 낸 거였다.
"너 같은 놈들이 뭘 안다고! 특혜를 그냥 선천적으로 받고 태어난 놈들! 그런 놈들이 대체! 뭘! 내 심정을 알기나 해!"
"몰라, 모르지 하지만 다 너 같이 살진 않아."
부럽고 질투가 날 수도 있겠지만 안뚱땡처럼 열등감에 묻혀 사는 건 극히 드문 경우였다.
주어진 것을 활용하고 더 나아가는 발전적인 마음을 가지지, 남의 업적을 가로 챌 생각 따위.
그 누구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난 이럴 수밖에 없었어! 넌 내 사정을 아무것도 몰라!"
"너만 힘드냐? 개소리를 하고 있어."
안뚱땡이 계속 김민수 근처에 붙으면서 쓸데없는 조언을 하거나 직접 성장의 계기를 마련해준 것도.
전부 다 자기 영향력을 김민수한테 끼치기 위해서였겠지.
실제로 민수는 초반엔 그렇게까지 찐따미를 풍기지 않았었다.
'정말 급격하게 바뀌었지. 어느 순간부터 패션이라던가... 열등감도 심해지고...'
이 모든 게 안뚱땡이 김민수를 자신과 일체화 하기 위해했던 수작이라고 생각하니 구토가 몰려올 지경이었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
계속 이어지는 맹공에 안뚱땡은 김민수의 육체를 단 하나도 활용하지 못하고, 반투명한 막 하나에 몸을 의지했다.
열등감에 찌들어 있으면서 딱 하나 있는 말도 안 되는 특혜로 버티는 꼴이, 안뚱땡의 인생을 압축하는 것 같았다.
김민수였다면 발악이라도 하면서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낼 지언정 반격이라도 했을 텐데.
'허, 너무 쉽잖아.'
이렇게 안뚱땡을 끝낸다고 생각하니 굉장히 허무했다.
'이 순간을 바란 건 맞지만, 이렇게 시시하게 끝나길 바랐던 건 아니었어.'
그토록 쫓아왔던 존재가 이렇게 무기력하고 쓸모없는 놈이란 걸 알았을 때의 공허함.
몇 달 동안 한 놈만을 생각하면서 언젠간 잡는다고 다짐 했는데 그 끝이 고작 이 정도라니.
뭘 위해서 강해지고 그 고생을 했단 말인가.
쩍 쩌적
조금씩 피해를 누적시킬 때마다 반투명한 막이 깨지는 게 눈에 들어온다.
예전에는 무슨 짓을 하더라도 부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게 이렇게 쉽게도 부서지는구나.
"날 때려서 뭐 하겠다고! 뭘 할 수 있는 건데?! 그냥! 그냥 냅두란 말이야! 내가 우승하고 다 같이 행복해지면 얼마나 좋아! 서로 좋잖아!"
"이젠 그냥 입만 아프다."
대꾸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해서 보호막을 깨는 것만 집중했다.
"그만! 그만! 김민수가 죽으면! 너도 손해잖아!"
"난 손해 볼 거 없어."
이건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김민수가 죽는다고 해서 메인 퀘스트가 실패할 일도 이제 없어지고, 그렇다고 놈과 깊은 교류를 나눴던 사람이 슬퍼하는 일도 이젠 없었다.
예전 같았다면 이야기가 달랐겠지만 이미 범죄자로 낙인 찍힌 놈이 죽었는데 슬퍼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잠시 그런 감정을 느낄 순 있어도 그게 추모로 이어지진 않을 게 확실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보여야 본체가 등장하겠지.'
지금은 안뚱땡이 일시적으로 김민수 몸에 빙의한 상태였기에, 본체를 끌어내려면 이 정도는 보여 줘야 했다.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는 즉시 살살 쪼개면서 희망찬 미래를 꿈 꾸는 꼴을 보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쨍그랑!
마침내.
오랫동안 안뚱땡을 지켜줬던 보호막이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청아하고 시원한 감각, 무더운 날 사이다를 한 번에 들이켰을 때 느껴지는 청량감.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만하라고 했잖아!!!"
안뚱땡이 본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리 높은 회복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트라우마가 남는 거 몰라? 저번에 불꽃으로 생긴 것도 치료하는데 얼마나 많은 수고를 들였꾸에에에엑!"
무슨 두더지가 땅바닥에 솟아나오는 것처럼 뿅 하고 나타난 안뚱땡.
그 즉시 내가 한 행동은 일단 주먹에 명치를 꽂아 넣는 거였다.
약 네 달 간 기다렸던 일격이 마침내 들어가 새로운 돼지 멱 따는 소리를 뽑아낸다.
'원조는 다르구나.'
자캐딸로 만든 김민수보다, 확실히 오리지널 안뚱땡한테서 뽑아내는 소리는 그 음조부터가 차원이 달랐다.
자기가 원조라고 우기는 수많은 맛집 사이에서 진짜를 발견한 느낌.
"야 너 그 보호막 한 번 깨지면 쿨타임이 있긴 하구나?"
"무꾸엑, 그만 때려억! 욱! 엑!"
누를 때마다 소리가 나오는 곰 인형처럼 소리를 내뱉는 안뚱땡.
놈을 팰 때 절대 무기는 일절 쓰지 않았다.
이 순간을 오래 즐기려고, 보호막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멍청한 놈을 더 진득하게 패기 위해서.
오로지 두 주먹으로 놈을 신나게 두드렸다.
예전 수련회에서 배웠던 난타의 감각이 다시금 떠오른다.
"이러다가 내가 죽으면억! 죽으면 어떻게 할 거야! 욱! 너 원래 지구로욱! 못 가도옥!"
빡! 빡! 빡!
같잖은 수작으로 시간을 벌겠다는 의도가 너무 빤히 보여서 대답도 하지 않고 놈을 계속 구타했다.
확실히 날 여기에 넣은 놈이니까 나갈 방법과 내보낼 힘도 가지고는 있겠지.
하지만 이제 그런 건 더 이상 상관없었다.
그 말을 듣고 옳다구나 하면서 그만 때릴 만큼 감정의 골은 얕지 않았다.
"내가 알아서 찾아내면 돼."
소설의 영향으로 세상을 바꾸지도 못 하는 놈이 뭘 어떻게 한다고.
그냥 차라리 내가 성장해서 방법을 찾아보는 게 더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 이러다가 나 죽으면 진짜 죽으면!"
[유수진의 메인 스킬 철혈을 사용합니다.]
왼손에 방대한 힘이 깃든다.
[일점집중 발동! 모든 신체의 힘을 왼손에 집중합니다.]
"죽어 그냥."
나중에 후회를 하더라도 지금 만족하자는 마음으로 안뚱땡의 머리통을 작살내려는 그 순간.
"거기까지."
의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더니.
탁, 탁 타다다닥.
순식간에 여러 명이 주변에 나타나 내 몸에 전부 달라붙어 행동을 저지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정확히 종이 한 장 차이로 때리지 못 했음에도 이어진 충격파로 안뚱땡은 머리를 땅에 처박았다는 거다.
이것마저 못 했으면 억울해서 상황 파악을 바로 못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얘네가... 걔네겠구나.'
처음 들어 보는 목소리와 뜨거운 대낮에 검은색 가면을 쓰고 나타난 존재들.
딱 봐도 유이와 카리스가 속해 있는 그룹원들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타이밍 좋게 나타날 리가 없었으니까.
애초에 유이와 카리스가 따라붙지 않았을 때 이미 짐작한 부분이었기에 당황하진 않았다.
"저놈은 우리가 데려가겠다."
"내가 잡았는데 니네가 왜?"
"여기까지 유도한 게 바로 우리니까, 넌 정말 너 스스로 여기까지 상황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나?"
"당연하지 뭔 개소리야."
누굴 호구로 아나.
너무 뻔뻔하게 보따리까지 다 내놓으라는 당당한 태도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김민수가 있는 곳을 찾은 것도 나, 놈을 잡아서 인적 드문 곳으로 이동시켜서 후드려 팬 것도 나.
안뚱땡을 불러낸 것도 나.
전부 다 내가 했는데 어디서 헛소리를 내뱉고 있어.
"니네도 놔 이제."
"..."
잡힌 몸에 힘을 줘서 금방 빠져나갈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저항이 거셌다.
대충 느껴봤을 때 발제트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약한 수준 정도.
이런 놈들이 다섯 정도 나한테 붙어 있었고, 우두머리로 보이는 놈 근처엔 셋.
'그룹의 숫자는 그럼 유이랑 카리스 포함하면 총 열하나인가.'
소수 정예로 활동한다면 꽤 적당한 숫자였다.
"놓으라는 말 안 들려?"
안 들리면 들리게 해 줘야지.
[강압 발동! 대상 생명체 지정 :: 주변에 자신을 제외한 모두]
쾅! 쾅! 쾅! 쾅! 쾅!
안뚱땡이 바닥에 처박혔던 것과 마찬가지로 내 몸을 잡고 있던 다섯의 머리통이 그대로 바닥에 박힌다.
김민수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나와 정반대의 능력이었기 때문이지, 놈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어중이떠중이들은 강압을 제대로 견딜 수조차 없었다.
그래도 출력을 70%까지 끌어올렸을 때 땅에 박히는 거 보면 완전 실력이 없진 않아 보였다.
"백태양, 이 세상은 지금도 정상이 아니다. 원래 세계... 세상을 원래 세계로 돌려야 된다는 거에 너도 동의하지 않았나?"
"그래서 안뚱땡 잡았으면 됐지 뭔 개소리 하는 거야. 공 가로챌 생각 말고 꺼져."
성검과 탐욕의 곡괭이를 꺼내 손에 쥐고 헛소리하는 놈을 바라봤다.
나타난 이유도 모르고 그냥 계속 안뚱땡만 내놓으라고 하는 앵무새 같은 놈.
"진짜 잘 모르겠다 이젠."
일단 패면 답이 나오겠지.
결심했다면 행동은 빠르게.
난 그 즉시 두 번째 참교육을 위해 놈에게 달려갔고.
정확히 놈의 머리통에 곤봉을 박아넣으려는 그 순간.
충격적인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내가 아카데미 순애일지의 원작자다."
이건 또 무슨 개 같은 전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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