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2화 〉 진짜 미쳤냐?
* * *
[성검이 참아왔던 불만을 표출합니다.]
[성검이 당신의 지조 없음에 깊게 실망합니다.]
[성검이 붓검은 그저 살랑거릴 줄만 아는 쓸모없는 날붙이일 뿐, 진정한 칼날은 오로지 자신 뿐이라고 말합니다.]
"시끄러."
백두산 중턱에 있는 숙소.
그곳에서 난 가장 넓고 좋은 방 침대에 앉아 성검을 마주 보고 있었다.
검을 마주 보고 있다는 표현이 조금 묘하긴 한데 사실이었다.
'갑자기 말이 엄청 많아졌네.'
진짜 붓검 때문인가?
붓검을 사용하기 전엔 신성력을 아무리 때려 박아도 미동조차 안 하더니.
다른 검 한 번 썼다고 뒤통수를 후리질 않나,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하지 않나.
진작 이럴걸 여태 헛짓거리 했구나 싶었다.
"야 네가 불만이 어디 있냐? 너 양심이 있어? 가성비도 쓰레기고,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하나도 없고."
내 말을 듣자마자 성검은 격하게 날뛰었다.
검 혼자서 허공에 떠 있는 것도 신기한데 붕붕 휘두르는 걸로 감정까지 표현하다니.
확실히 성검은 다르구나 싶었다.
[성검이 그건 다 당신 능력이 모자라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성검이 애초에 당신이 마족화를 한 상태로 뽑은 게 문제라고 말합니다.]
[성검이 진정한 용사라면 자신이 봉인 되어 있어도 다른 검과 바람을 피지 않는 게 지조를 지키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다르긴 달랐다.
'이거 완전 또라이 아냐.'
미친 소리를 하는 걸로 봐선 보통이 아닌 건 확실했다.
물론 위에 두 줄은 사실을 기반으로 해서 뼈를 맞긴 했지만 밑에 줄은 진짜.
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야 그럼 효율도 안 좋은 성검 돌덩이를 들고 싸우라고? 뭐 하러 그래? 난 곤봉도 있는데?"
네가 팩트로 나온다면 나도 팩트로 맞설 수밖에.
성검은 내 말을 듣고서 말을 고르는 듯 잠시 손잡이 부분을 빙글빙들 돌렸다.
짧은 정적이 흐르고 손잡이가 멈추자마자 성검은 다시 의념을 쏘아 댔다.
[성검이 그것조차 바람이라고 말하며 마음에 안 드는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성검이 용사 되는 자라면 곤봉 같은 이미지를 망치는 무기는 버리고 오로지 성검단심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검이 그게 바로 자신을 현모양처로 만드는 길이며 용사와 성검이 백년해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갈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뭐? 현모양처?'
성검 주제에 성별도 있다니.
그럼 애초에 성검이 완전한 생명체라는 말인가?
'어이가 없네.'
여긴 뭐 나왔다하면 다 여자래.
갑자기 생긴 현기증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매만지며 생각을 정리했다.
계속 이런 식으로 가다간 대화가 계속 돌기만 하니 해결책이 필요했다.
성검을 좀 더 효율적으로 건드려서 다른 대화 방향으로 틀 수 있는 무언가.
'아 있었네.'
난 생각이 나자마자 바로 옆에 있던 붓검을 집어 들어 말을 이어 나갔다.
"역시 돌덩이에 박혀 있는 성검보단 붓검이 최고지."
[성검이 당장 방금 발언을 취소하라고 말합니다.]
"용사의 상징이면 뭐 해? 어차피 쓰지도 못 하는데, 붓검이 짱이야 그치?"
[성검이 즉시 그딴 살랑살랑 거리는 창부 같은 검년을 내려 두라고 강하게 어필합니다!]
효과 확실하구만.
붓검을 썼다고 멀쩡하게 잘 싸우고 있는 용사 뒤통수까지 치는 걸 보면.
안 봐도 성검이 얼마나 질투심이 강한 지 알 수 있었다.
이 부분을 잘만 이용한다면 상황을 새로운 국면으로 가져올 수 있을지도 몰랐다.
'위력 하나만큼은 끝내줬단 말이지.'
죄악의 일곱 뿌리 중 분노를 담당하는 마족의 3 페이즈를 일격에 정화시키는 힘.
그 힘만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면 전력에 아주 큰 보탬이 되는 거였다.
그렇기에 난 성검이 더욱더 질투를 하도록 붓검을 더욱더 칭찬했다.
"검은 벼락도 그렇고 아주 내가 원하는 대로 쏙쏙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게 간편하고 좋아 그치?"
[성검이 그딴 잡기술에 현혹 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용사라면 오로지 성검을 사용한 힘만을 칭찬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내가 구름도 만들어서 자동으로 공격하고 응?"
[성검이 그딴 건 정말 기본적인 거니까 절대! 칭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제 좀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말로 하는 칭찬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아서 이젠 아예 몸을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붓검 나랑 뽀뽀 한 번 할까?"
[성검이 당장 지금 행동을 정지하라고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마지막이라고 아주 강하게 말합니다!]
쭉 입술을 내밀고 붓검의 손잡이 중앙 부분에 입을 맞추려는 순간.
"하지 말라고 했지 않느냐! 이 바보! 멍청이! 똥개! 해삼! 말미잘! 멍청한 주인놈아!"
성검이 사람 모습으로 변해 뿅 하고 나타났다.
17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려 보이는 외형에 아담한 체구.
길게 늘어트린 은발과 돌로 된 원피스를 입고 있는 것까지.
누가 봐도 성검이 의인화 한 모습이었다.
"그! 그...진짜 뽀...뽀뽀하기만 해 봐! 바람이야! 바람이라고! 나라는 검이 있는데 막! 어?! 붓검 휘두르면서 즐겁다는 듯 웃기나 하고! 과정이 어쨌든 나랑 힘을 합쳐서 마족 잡아 놓고 왜 붓검 칭찬하는 건데! 더 대단한 일을 한 건 난데! 왜 계속 바람 피냐고오!! 주인놈아!"
그동안 참아왔던 감정을 폭발시키듯 성검은 말을 우다다다 쏟아 냈다.
중간부턴 살짝 발음이 뭉개졌는데 그 이유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완전 애잖아.'
투정 부리는 수준만 봐도 얼마나 어린 지 대충 짐작이 가능했다.
게다가 자기가 뒤통수 친 건 쏙 빼놓고 말해, 정말 내가 나쁜 놈인 것처럼 보이는 화법까지.
진짜 뭐 이런 애가 다 있지.
아니 애가 아니라 검인가.
'의인화 하니까 애가 막 찡얼거리는 것 같아서 귀엽긴 하네.'
무생물이랑 대화하는 느낌도 안 나고, 전보다 훨씬 생동감이 있어서 좋았다.
검이랑 대화하는 걸 다른 사람한테 들켰다간.
검박이 신세를 면치 못할 게 뻔했으니 의인화가 훨씬 좋았다.
"뭐, 뭐라고 말을 좀 하라고!"
"근데 내가 더 나이가 많은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반말해, 주인이라며 내가."
"...내가 인간 나이 기준으로 치면 삼백이 넘는데 왜 존대를 해야 되냐 주인놈아! 네가 나한테 존대를 해야지!"
맙소사.
'미치겠네.'
손이 자동으로 얼굴을 감싸며 마른세수를 두어 번 반복한다.
의인화가 가능한 검에 작은 체구 그리고 나이는 또 삼백이 넘었다는 설정까지.
합법 로리 성검(암컷)이란 설정은 대체 누구 대가리에서 나온 걸까.
그리고 그 설정을 왜 그대로 구현시켜서 내 앞에 갖다 놓은 거지?
골이 당기다 못해 쑤실 지경이었다.
"...그래 뭐 이런 자잘한 건 넘어가고."
"불리하니까 주인놈이 말을 바꾼다! 나쁜 놈! 바람 피는 놈! 줏대도! 지조도 없는 놈! 나 못 쓴다고 바로 다른 검을 만지작거리는 천하의 바람둥이놈!"
"그래그래... 일단 그런 거로 하고 대체 왜 근데 검을 뽑았는데 봉인이 돼 있는 거지? 루베니아가 안배도 했었잖아."
이런 골치 아픈 문제는 일단 넘기고 당장 중요한 것부터 해결하는 게 맞았다.
우선 루베니아가 안배해놨음에도 불구하고 성검이 봉인된 이유를 알아야 했다.
왜 봉인 되어있는지를 알아야 풀든 말든 할 거 아닌가.
"너무 당연한 걸 물어보는군, 그건 당연히 알몸을 보여주기가 싫어서다."
"뭐?"
너무 황당한 대답에 잠시 뇌가 굳었다.
얘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성검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
"검집도 없이 어떻게 맨 칼날을 막 아무한테나 보여주겠나! 주인놈한테도 보여 줄 땐 큰 용기가 필요하거늘 그땐 보는 사람이 너무 많았고... 심지어 그 이후로 다른 옷도 구비해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맨 칼날로 다니는 건 변태 검이나 하는 거니까 예를 들면 저 붓검 같은 아주 쓸모없는!!! 검 말이다!"
그러니까 여태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게 단순히 '검집이 없어서'였다고?
이게 무슨 미친 소리야.
"그럼 왜 조니를 잡을 땐 모습을 드러낸 건데?"
"당연한 걸 묻네? 그건 그... 김민수? 그놈은 대가리가 바닥에 처박혀 있어서 날 못 보고, 조니도 어차피 죽을 놈이니까 상관없어서 그런 거지. 그렇게 되면 주인놈만 보는 거니까!"
아주 당당하게 말하며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냐는 눈빛으로 날 보는 성검.
난 더 이상 분노를 참을 수 없어서 바로 놈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아!"
"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니 그 말도 안 되는 짓거리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 했는 지 알아?"
"숙검을 다루는데 그 정도는 해야지!"
"숙검?"
"숙녀와 검을 합친 말이다. 내가 예전부터 밀고 있는 말이지."
이게 만약 코믹 만화였다면 지금쯤 내 이마엔 빠직 마크가 다섯 개 쯤 박혀 있었을 거다.
"일단 그 빌어먹을 돌 드레스부터 어떻게 해야겠다."
"무! 무슨 짓이냐 변태 주인놈아!"
[리리엘의 메인 스킬 신성력을 사용합니다. 강대한 신성력이 양손에 깃듭니다.]
더 이상 말도 안 되는 장단에 어울려줄 생각이 없었다.
난 리리엘의 신성력을 쏟아붓자 성검이 잠깐 봉인해제 했다는 걸 떠올렸다.
'벗겨진다.'
예상대로 리리엘의 신성력을 손에 감싼 채 돌을 하나하나 부셔가니 성검은 저항도 하지 못했다.
하지 말라는 말만 반복하면서 발악하지만 그런 거론 날 막을 수 없었다.
3분 정도가 지났을까.
성검은 마침내 새하얀 알몸을 드러내게 되었다.
"꺅...! 변태 주인놈...! 이제 날 막... 가...강간하려고...!"
"뭐...?"
성검이 강간이란 말도 알아? 그리고 가장 의문인 점 하나.
'왜 대체 강간이라고 말하면서 보지가 젖는 건데?'
운명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고 했던가.
뜻밖의 시련에 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성검한테 박으라고?'
자지가 무슨 마스터 피스냐? 박으면 다 만사형통이게?
어이가 없지만 사실 지금 당장 생각하는 해결책도 없었다.
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성검을 내려다봤다.
"지...진짜 강...강간...!"
"..."
정말로 어지러워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