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6화 〉 원래 내꺼였잖아.
* * *
'눈으로만 본 걸 판단하라는 게 그런 뜻이었나.'
거미 습지를 들어가자마자 안내해줬던 건 기본 정보가 아닌 경고문이었다.
상황 판단을 끝낸 난 즉시 입을 열었다.
"곁에 보이는 자들은 모두 다 동료입니다. 포지션이 변경 됐다고 해서 의심하시면 안 돼요!"
기존에 있던 상식을 버리라는 건 사전에 계획했던 걸 모두 잊으라는 말이었다.
얘는 당연히 이 위치에 있을 거라는 생각을 버리고 오직 눈으로만 판단해야 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깨닫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 됐다.
"바뀐 포지션 자리에 있는 건 사람이 아닌 거미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기본 상식을 버려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캬아아아악!"
"거미다!"
거미 습지에 등장하는 거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거미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사람처럼 직립 보행을 하고 팔 두 개를 제외한 나머지는 등에 숨겨 정말 사람 같았다.
이런 특징이 앞을 잘 보이지 않게 하는 안개와 겹쳐 거미가 습격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었다.
"거미는 동료의 소리를 모방합니다! 눈으로 확인하고 무기를 휘두르세요!"
거미는 아주 영악했다.
동료가 낸 비명 소리를 모방할 수 있는 건 물론 하지 않은 대사도 따로 말할 수 있었다.
단순하게 음성을 녹음하고 뱉는 것이 아닌 완벽하게 구현이 가능한 듯했다.
안개여서 한정된 시야와 사방에서 들리는 비명.
이 두 가지는 사람을 굉장히 한계까지 몰아넣고 정신을 극도로 불안 하게 만들었다.
'아마 정신 계열의 스킬도 사용 되고 있겠지.'
나야 알파메일 속에 있는 마녀의 계약 때문에 괜찮다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아 보였다.
또한 거미들은 헌터들이 굉장히 익숙한지 서포터 포지션 헌터들만 쏙쏙 골라 부상을 입혔다.
"정신 면역 계열 스킬을 가지고 계신 분은 모두 사용해주세요!"
나 혼자 바락바락 소리를 쳐봤자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예전처럼 몬스터가 원샷 원킬이 난다면 상황이 긍정적으로 바뀔 수도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한 방에 머리통을 박살 낼 수가 없었다.
'둔기의 한계인가.'
딱딱한 갑옷을 입었다면 모를까.
질긴 가죽을 온몸에 덮은 거미들은 아주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했다.
여차하면 거미줄을 뽑고 도망까지 치니 상대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차라리 검이라도 있었으면 모를까.
'성검만 뽑을 수 있었어도...'
백두산이 무서운 이유는 한 번 들어오면 따로 나갈 수가 없다는 부분이다.
오프너가 밖에서 대기를 하고 있어도 의미가 없는 게, 밖에 혼자 있는 것조차 위험했다.
따라서 모두 안에 들어와 속전속결로 클리어를 하는 게 목표인데.
"크아아아악! 거미, 거미가아아아!"
"내 팔! 내 팔이!!!"
이런 식으로 계속 시간이 끌린다면 거미들한테 좋은 일만 시켜 주는 꼴이었다.
'폭군은 발동해도 의미 없고... 나한테 지금 당장 좋은 광역기가 없는 게 문제야.'
처음에 외곽 지역에 들어왔을 때 폭군을 발동하고 잡으면 더 쉽지 않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폭군은 백두산에 있는 모든 몬스터들을 아랫것으로 취급하지 않았었다.
그렇다고 강압을 발동해서 전체를 찍어 누르자니 부상자가 있어서 불가능했다.
시야가 제대로 확보 되지 않은 상황에서 타켓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강압은 매우 위험했다.
'애초에 다수가 들어올 만한 던전이 아니었던 거야.'
이제 보니 거미 습지는 소수 인원으로 공략하는 던전이었다.
최저한의 인원으로 숨어 있는 거미를 죽이며 앞으로 전진해 습지가 없는데까지 도착하는.
그런 형식을 취해야 했다.
'사람 수만큼 거미가 나오는 구조여서 너무 불리하다.'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지금 가장 필요한 건 절삭력이 있는 무기와 광역기.
마족화를 사용하면 당장 탐욕의 곡괭이를 뽑을 수 있었지만 마계라는 부분이 걸렸다.
혹시 모를 변수를 위해 마족화는 일단 보류.
'이 두 가지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무기가 형편 좋게 있을 리가...'
상황을 살피며 곤봉을 휘두르던 중 김민수가 시야에 들어왔다.
"으으으악! 저리 가! 징그러워! 거미 너무 싫어! 용! 호랑이!"
정확히는 김민수가 휘두르는 붓검이 눈에 쏙 들어왔다.
주인공을 위한 무기인 만큼 절삭력은 말할 것도 없고, 후속타로 광역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무기.
'...있잖아?'
생각은 짧고 행동은 빨랐다.
"야 김민수!"
[폭군 발동! 아랫것들을 무시하고 천한 자들을 멸시합니다.]
"...저...저는 김민수가 아닙니다!"
폭군을 발동하며 이름을 부르자마자 반응하는 김민수.
저놈이 거미가 아니란 것도 확인했으니 이제 남은 할 일은 딱 하나였다.
"검 내놔."
"에?"
빡!
"꾸에에에엑!"
시원하게 곤봉으로 민수의 골통을 갈긴 뒤 청량한 돼지 멱 따는 소리를 귀에 담았다.
원래 두세 번정도 들어야 했지만 상황이 긴박했기에 한 번으로 만족했다.
[폭군의 낙인이 찍혔던 무기입니다. 주인이 바뀝니다.]
[더 이상 주인공 제약에 의해 무기가 소유가 제한되지 않습니다. 소유자가 바뀝니다.]
[현재 소유자는 주인공백태양입니다.]
'그래, 이거지.'
붓검을 뺏기 전 예상한 결과가 그대로 나왔다.
예전에야 주인공 지분율이 부족해서 붓검이 다시 김민수한테 갔다지만.
이제 내가 더 높으니 원 주인한테 돌아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원래 내 거였잖아.'
[춘향전]을 클리어했을 때 최대 공헌도가 나였음에도 불구하고, 김민수는 특별 보상을 따로 받았었다.
그때 얼마나 억울했는지.
"이제 내 거다 민수야."
늘 김민수가 붓검을 쓸 때마다 속으로 아까워서 죽을 것 같았다.
왜 저걸 저렇게 밖에 못 쓰지? 항상 호랑이! 용! 이러면서 단순하게 사용하는 거야.
조금 더 간편하게 쓸 수 있잖아.
이제 그 한을 풀 때였다.
"키에에에엑!"
"검은 벼락."
달려오는 거미를 향해 아주 가볍게 검을 내려그었다.
붓검의 절삭력은 이미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한 방에 반으로 쪼개지는 거미.
그리고 이어서 세로로 그어진 먹선은 벼락이 되어 하늘로 솟구쳤다가 다시 거미에게 떨어졌다.
'굳이 생명체로 만들지 않아도 돼.'
호랑이와 용이 위력은 좋을 지 몰랐으나 많은 먹선을 먹는다는 게 문제였다.
즉 강한 만큼 시전 시간이 있다는 말인데, 벼락같은 건 한 줄만 그어도 되니 아주 유용했다.
그렇다고 위력이 딸린 것도 아니었기에 사실상 큰 차이도 없었다.
"번개 구름."
검을 휘두를 때 만들어진 먹선으로 먹구름을 만든 뒤 수십 개의 번개를 동시에 내려친다.
"검은 벼락."
김민수와 사용할 때와 전혀 다른 전황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달려들기 직전인 거미들을 벼락이 내려치며 행동을 잠시나마 정지시킨다.
그리고 이런 틈은 헌터들이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는데 효과적이었다.
"포지션을 재정비해! 백태양 헌터가 시간을 벌어 주고 있다!"
"부상자는 뒤로! 힐러도 함께 보내라!"
"시간을 끌어! 벼락이 떨어질 때 같이 친다!"
유능한 헌터들은 곧 벼락을 신호 삼아서 벼락이 떨어지는 타이밍에 공격을 시도했다.
경직이 걸릴 때 정확한 정타를 먹일 때마다 안개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좋네.'
반격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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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태양 헌터가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러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거미 습지 첫 번째 방을 클리어한 후.
사람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나한테 감사 인사를 내뱉었다.
'김민수를 빼고 말이지.'
놈은 나한테 검을 뺏겼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쉽사리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도 눈치가 있는 거겠지.
아마 주변 사람이 없었다면 나한테 쒹쒹 거리며 달려와 '그 검 내거잖아!'를 시전 했을 거다.
"근데 상황이 좋지 않네요, 제가 조금만 더 빨랐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죄송합니다."
죄송하진 않지만 사회성은 발휘해야 됐다.
1급 헌터 인맥은 쌓아두면 언젠가 무조건 이득으로 돌아왔다.
"그런 말씀 마십쇼, 백태양 헌터가 아니었으면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겁니다."
"맞습니다."
이민준과 김민수가 속해 있던 헌터 팀의 팀장, 남상혁은 그런 말 말라며 날 치켜세워줬다.
짧은 칭찬 시각은 여기까지 갖도록 하고 이제 현실을 마주할 차례였다.
"사망자 둘, 치명상 셋, 중상 열다섯 그리고 자잘한 부상은 열둘 명입니다."
"허... 이 정도면 전멸했다고 봐야겠군."
거미 습지에 들어온 사람은 모두 서른 여섯 명.
그중에서 나와 김민수 그리고 각 팀의 팀장을 뺀 모든 헌터가 부상을 입다니.
부상도 문제지만 앞으로 이런 공간을 다섯 번 넘게 클리어해야 된다는 게 문제였다.
"...가장 이상적인 건 모두 부상을 회복하고 나서 움직이는 거지만... 시간제한이 있어서..."
"그러게 말입니다. 오래 시간을 끌면 분명 던전이 붕괴하고 몬스터들이 몰려 나올 텐데."
두 팀장의 말대로 된다면 무조건 전멸인 상황.
난 여기서 해결책을 내놓았다.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두 팀장은 내 의견을 전적으로 존중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컨디션이 제일 좋은 게 팀장님들과 저 그리고 저기 검은...검이라는 자입니다. 그리고 이 던전은 아무래도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몬스터가 적게 나오는 구조 같습니다. 실제로 거미를 잡아본 결과 딱 서른 여섯 마리가 나오더군요."
"네 맞습니다. 그렇다면 설마...?"
이민준은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한 듯 눈동자를 크게 떴다.
"네, 이 앞은 저와 검은 검 두 명이서 돌파하겠습니다. 팀장님들은 부상자들을 돌봐주세요."
그래야 제가 김민수를 아주 손쉽게 패면서 던전을 클리어하고 보상을 뺏을 수 있습니다.
뒷말은 삼켰다.
너무 노골적으로 보이면 좋을 게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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